[인사이드 스토리]신동빈의 깊은 고민…결국 '곳간'에 있었다
롯데건설, PF 우발채무로 고전…간신히 회복
해외법인·자산 매각 등 재무구조 개선 박차
재무 건전성 관리 특명
롯데그룹이 지난 18일 하반기 VCM(Value Creation Meeting)을 열었습니다. VCM은 2018년부터 매년 상·하반기 두차례 열리는 사장단 회의입니다. 롯데그룹 계열사의 대표이사들이 모여 그룹 경영 방침과 전략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입니다. 이번 VCM에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을 비롯해 롯데지주 대표이사 및 실장, 사업군 총괄대표와 계열사 대표 등 80여 명이 모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신 회장은 하반기 경영 방침으로 △기존사업의 본원적 경쟁력 강화 △글로벌 사업에서의 안정적 수익 창출 △미래 성장을 위한 고부가 사업 확대 △재무 건전성 관리 강화 등 4가지를 꼽았습니다. 이 중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재무 건전성 관리 강화'입니다.
신 회장은 2018년 하반기 VCM을 제외하고는 매번 이 자리에 직접 참석해 그룹 전략에 대한 메시지를 공유해왔습니다. 롯데그룹은 매 VCM마다 신 회장의 메시지를 외부에 공개하고 있는데요. 그룹 비전을 제시하고 그를 위한 실행 방법을 당부하는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2015년 경영권 분쟁 이후 그룹을 둘러싼 환경이 계속 좋지 않았던 만큼 신 회장은 자주 위기의식을 강조해왔습니다. 때로는 대표이사들을 질책하기도 하고, 격려하기도 했죠.
그런데 이번에는 신 회장이 그룹의 재무 건전성에 대한 우려를 직접 언급했습니다. 2018년 이후 신 회장이 VCM에서 재무 건전성을 거론했다고 롯데그룹이 공식적으로 밝힌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만큼 롯데그룹의 재무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셈입니다.
'캐시카우' 롯데케미칼의 위기
롯데그룹 재무 상태를 악화시킨 주범 중 하나는 롯데케미칼입니다. 롯데케미칼은 롯데그룹을 지탱해온 중요한 '캐시카우'입니다. 롯데그룹이 2022년 벌어들인 매출액 84조8000억원 중 33.8%가 롯데케미칼을 위시한 화학군에서 나왔습니다. 유통(25.5%), 건설·렌탈·인프라(21.8%)의 비중을 훌쩍 넘는 수치죠. 벌어들이는 돈이 워낙 많다보니 2021년까지 차입금보다 현금성자산이 더 많은, 즉 순차입금이 플러스(+)인 '무차입 경영'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상황이 바뀐 건 2021년 하반기부터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석유화학 업황 사이클이 좋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석유화학은 경기 사이클을 타는 대표적인 업종입니다. 2021년 하반기부터 지속된 다운 사이클이 3년째 지속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2019년 이후 대규모로 설비를 증설하면서 석유화학 제품 자급률을 높였고 여기에 코로나19까지 맞물리며 석유화학 제품 수요가 크게 감소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고유가 상황이 겹치면서 기초화학 비중이 큰 롯데케미칼은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롯데케미칼은 2022년 연결 기준 7226억원의 영업손실을 내며 적자 전환했고, 지난해에도 3331억원의 손실을 기록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롯데케미칼이 단행한 대규모 투자는 재무 부담을 더욱 키웠습니다. 롯데케미칼은 2022년 10월 배터리 소재 사업에 진출하기 위해 2조7000억원을 들여 동박 제조기업 일진머티리얼즈(현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를 인수했습니다. 또 인도네시아에 대규모 석유화학단지를 조성하는 '라인 프로젝트'도 진행 중입니다. 여기에는 총 39억달러(약 5조원)가 쓰일 예정입니다.
이런 대규모 투자 탓에 롯데케미칼의 차입금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습니다. 한국기업평가에 따르면 롯데케미칼의 총차입금은 2021년 말 기준 3조6658억원이었으나 지난 1분기 말에는 10조9408억원까지 늘어났습니다. 총차입금에서 롯데케미칼이 보유한 현금성자산을 제외한 순차입금은 2021년 마이너스(-) 8165억원이었지만 지난 1분기 말 기준 6조5535억까지 뛰었습니다.
전방위 지원 받은 롯데건설
롯데그룹의 재무 부담을 키운 계열사는 롯데케미칼뿐만이 아닙니다. 롯데건설도 그룹의 재무 건전성 악화를 가져온 원인 중 하나로 꼽힙니다. 2022년 말 건설업계를 덮친 프로젝트파이낸싱(PF) 우발채무 위기 때문입니다. 당시 강원도 춘천 레고랜드 사태로 채권시장이 갑자기 얼어붙으면서 당장 만기가 도래하는 부동산 PF의 차환이 어려워졌습니다. 나이스신용평가에 따르면 그해 11월 말 기준 롯데건설의 PF 우발채무 규모는 6조9000억원이었습니다.
롯데건설은 이때 롯데케미칼, 롯데정밀화학, 롯데홈쇼핑 등 계열사으로부터 유상증자와 대여를 통해 약 1조1000억원의 자금을 조달해 급한 불을 껐습니다. 또 자체적으로 금융권에서 1조4000억원 가량을 추가 차입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유동성 위기는 지속됐고, 대규모 차입에 따른 이자 부담은 더 커졌습니다.
다행히 올해 초 롯데건설은 계열사와 금융기관이 참여한 PF 펀드 '프로젝트 샬롯'을 조성해 총 2조3000억원의 추가 자금을 수혈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프로젝트 샬롯에는 은행, 증권사 등 금융기관이 선·중순위로 참여해 1조6000억원을 댔고, 롯데물산(2000억원)·롯데정밀화학(2000억원)·호텔롯데(1500억원)·롯데캐피탈(1500억원) 등 롯데그룹 계열사가 7000억원을 댔습니다. 이 중 롯데물산과 호텔롯데는 선·중순위 대출 일부에 대한 이자자금보충약정도 제공했습니다. 이자 지급 지연 등이 발생할 때 두 회사가 부족한 자금을 댄다는 의미입니다.
문제는 롯데건설을 지원한 계열사들의 상황 역시 썩 좋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롯데정밀화학은 석유화학 업종 다운 사이클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고요. 호텔롯데 역시 면세사업 위기로 실적이 크게 악화하는 중입니다. 호텔롯데가 운영하는 롯데면세점, 롯데케미칼은 최근 비상경영체제에 들어갔을 정도입니다.
롯데건설은 현재 간신히 위기를 넘긴 상태입니다. 하지만 최대주주인 롯데케미칼 역시 재무 부담이 가중된 상황이어서 앞으로는 롯데건설이 스스로 자금을 조달해야 합니다. 롯데건설은 현재 1200억원 규모의 회사채 발행을 추진 중인데요. 롯데케미칼의 지급보증 없이 자체 신용등급을 기반으로 자금을 조달할 예정입니다.
투자 위축?
이처럼 그룹의 캐시카우였던 롯데케미칼의 재무구조 악화에 롯데건설 사태 등이 겹치면서 그룹의 신용에도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국내 신용평가사들은 지난달 롯데그룹 계열사들의 무보증사채 신용등급 전망을 줄줄이 하향조정 했습니다. 그만큼 시장에서도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국기업평가는 롯데케미칼, 롯데지주, 롯데건설(롯데케미칼 보증)의 등급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조정했고요. 한국신용평가는 롯데케미칼, 롯데지주, 롯데물산, 롯데캐피탈, 롯데렌탈의 등급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낮췄습니다. 신용등급 전망이 낮아졌다는 건 추후 신용등급 자체가 하향될 수 있다는 의미인데요. 신용등급이 내려가면 자금 조달시 이자 책정에 불리하고 더 나아가 자금 조달이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이때문에 당분간 롯데그룹의 투자는 더욱 조심스러워질 가능성이 큽니다. 신 회장도 이번 VCM에서 "재무 측면에서 고금리, 지정학적 이슈 등 외부 리스크가 과거보다 높아진 상황"이라며 "주요 투자 의사결정시 더욱 면밀하고 철저하게 사업성을 검토해달라"고 당부했는데요. 앞서 롯데그룹은 수년간 많은 기업들을 사들였고 지분 투자도 단행했습니다. 한샘, 미니스톱,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 중고나라, 와디즈, 쏘카에 해외 사업체까지 전방위적으로 투자했죠. 하지만 이들 투자 중 '성공작'이라고 평가할 만한 것은 아직 찾기 어렵습니다.
롯데그룹은 재무구조 개선을 위한 작업을 계속할 예정입니다. 롯데케미칼은 올해 초 무산됐던 파키스탄 법인 LCPL의 매각을 재추진하고 있습니다. 2010년 인수했던 말레이시아 법인 LC타이탄 역시 다시 시장에 내놓을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롯데쇼핑은 부산과 포항의 점포 매각을 추진 중입니다.
중국의 롯데백화점 청두점과 청두 관련 법인 매각도 계속 진행하고 있습니다. 롯데면세점은 점포 철수 등을 포함한 고강도 구조조정을 진행 중이고요. 올해 초 신 회장이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업을 앞으로도 몇 개 정도 매각해 갈 것"이라고 언급한 만큼 일부 사업의 매각 가능성도 나옵니다.
신 회장의 장남 신유열 롯데지주 미래성장실장(전무)의 행보도 주목할 만합니다. 신 전무는 지난해 인사에서 롯데지주 미래성장실장과 롯데바이오로직스 글로벌전략실장을 겸임하게 됐습니다. 롯데그룹의 새 성장동력을 찾는 역할을 맡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룹 재무 부담이 커진 상황에서 새로운 투자처를 찾아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안게 된 그가 어떤 새로운 먹거리를 찾게 될지도 관전 포인트겠네요.
정혜인 (hij@bizwat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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