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적자로 허덕이는데…총수 일가는 고배당으로 ‘돈잔치’
(시사저널=이석 기자)
정부는 7월3일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 해결을 위한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인 역동경제 로드맵을 발표했다. 기업이 배당을 늘리면 법인세 등을 깎아줘 투자자 유입을 늘리고 기업 성장 역시 뒷받침하겠다는 게 골자다. 재계는 곧바로 화답했다. 현대·기아차와 하나투어, SK가스 등이 특별 배당 방식으로 기말 배당금을 크게 높여 잡았다. 정부 정책에 발맞춰 지배구조 손보기에 나서는 기업도 일부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국거래소도 현재 자사 기업공시 채널인 카인드(KIND)를 통해 상장사의 기업 가치 제고계획(밸류업)을 공시하고 있다. 카인드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국내 상장기업 2676곳 중에서 가장 많은 배당(배당성향 기준)을 한 곳은 씨젠과 일양약품이다. 순이익 대비 배당금을 나타내는 배당성향은 각각 5091%와 2477%를 기록했다. 천종윤 씨젠 대표와 정도언 일양약품 회장 등 오너 일가 지분율이 30% 정도임을 감안할 때 소액주주들 역시 상당한 배당 수익을 거뒀을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배당성향 1위 상장사는 씨젠
주목되는 사실은 이들 기업의 실적이 최근 몇 년간 하락세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진단키트 전문기업인 씨젠은 2020년 초 불거진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고속 성장했다. 2021년 기준으로 매출은 1조3708억원, 영업이익은 6667억원을 기록했다. 하지만 엔데믹이 시작되면서 씨젠의 실적 하락세가 가팔라졌다. 지난해 매출은 3674억원으로 2년 만에 4분의 1 토막이 났고, 영업이익은 301억원 적자로 전환됐다. 주가 역시 2020년 8월 고점인 16만원대에서 2만원대까지 추락한 상태다.
일양약품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3년간 매출은 3700억원을 오르내리고 있고, 영업이익은 시간이 흐를수록 하락하는 추세다. 특히 당기순이익의 하락세가 가파르다. 지난해 순이익은 1억원으로 순이익률은 2년 만에 6.99%에서 0.03%로 떨어졌다. 주가 역시 2000년 7월 장 중 한때 10만원대를 돌파한 후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7월17일 현재 일양약품은 1만3540원으로 장을 마쳤다.
정부가 추진 중인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두고 재계 안팎에서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자가 만난 재계 인사들은 "기업의 고배당 전략이 실적 하락에 따른 주주 달래기로 전락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기업 임원은 "엔데믹 이후 주요 제약사나 바이오 기업의 실적이 동반 하락했다. 이 경우 현금 비축을 위해 배당을 줄이는 게 보통이지만 제약·바이오 기업들은 '주주 환원 정책'을 이유로 배당 규모를 유지하거나 오히려 늘렸다"면서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결을 위한 기업 밸류업 전략이 회사에 '약'이 아니라 '독'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재계를 둘러보면 계열사 실적 악화에도 고배당으로 현금을 챙기는 총수 일가가 적지 않다. 전자랜드를 운영하는 홍봉철 SYS리테일 회장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기준으로 이 회사의 매출은 7230억원에서 5998억원으로 전년 대비 17%나 하락했다. 영업이익과 당기순이익은 4년 연속 적자 상태다. 그럼에도 오너인 홍봉철 회장은 SYS리테일 모회사인 SYS홀딩스를 통해 매년 거액의 배당을 타가면서 뒷말이 나오고 있다. 실적 악화 책임에서 홍 회장 일가 역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홍 회장은 2012년 3월 100호 직영점을 오픈하면서 "2015년까지 매장을 200개로 늘려 매출 1조5000억원 시대를 열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전자랜드 실적은 시간이 흐를수록 퇴보하고 있다. 홍 회장은 2022년 경영 일선에 물러났다. 전자랜드 대표뿐 아니라 사내이사직도 내려놓았다. 대규모 구조조정도 단행했다. 현재는 홍 회장의 장남인 홍원표 이사가 전자랜드 사업을 총괄하고 있지만 영업 적자 폭은 오히려 확대됐다. 그럼에도 홍 회장 일가는 '배당 잔치'를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논란이 예상된다.
총수 일가 지분 높을수록 배당 적극적
한국ESF기준원이 최근 발표한 '과다배당 기업들의 실태분석' 보고서 등에 따르면, 총수가 적은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기업일수록 현금 배당에 소극적이다. 반대로 총수 일가가 직간접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기업의 경우 배당에 적극적이다. 그해 거둔 순이익을 초과해 배당금을 지급하는 것은 기본이다. 장기간 적자에도 높은 배당을 지급하고 있음에도 큰 주목을 받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상당수 재벌기업이 배당을 총수 일가의 곳간 채우기나 승계에 활용하고 있는 상태다. 2020년 부동산 활황기만 해도 부영그룹의 지주회사인 (주)부영은 매출 2조원대를 넘봤다. 하지만 이듬해 매출이 3분의 1 토막이 나면서 영업이익과 순이익 역시 적자로 전환됐다. 지난해 (주)부영의 매출은 5365억원을 기록했다. 영업이익과 당기순이익은 -2291억원과 -2922억원으로 적자 폭이 확대됐다. 부동산 경기 악화로 주력 계열사인 부영주택의 실적이 크게 하락한 게 원인으로 꼽힌다.
그럼에도 (주)부영은 2021년과 2022년에 각각 2005억원과 1260억원을 현금으로 배당했다. 이중근 회장이 (주)부영의 지분 93.7%를 보유한 점을 감안할 때 이 회장은 최근 3년간 3000억원 넘는 배당을 타갔다. 이전 3년간 받은 배당금(122억원)보다 25배나 높았다. 재계에서는 이 회장이 83세로 고령인데, 핵심 계열사에 대한 오너 2세들의 지분율이 미미한 점에 주목한다. 향후 경영권 승계에 필요한 천문학적인 증여세에 대비해 현금을 쌓아놓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2021년 LG그룹에서 분리한 LX그룹의 경우 실적 악화에도 오히려 배당률을 높였다. 그룹 지주회사인 LX홀딩스의 지난해 연결 기준 매출과 영업이익은 각각 379억원과 732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대비 매출은 7669% 올랐지만, 영업이익은 54%나 하락했다. 하지만 올해 210억원의 배당금을 지급했다. 배당금 규모는 지난해(241억원)보다 줄었지만, 배당성향은 14.2%에서 26.6%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덕분에 구본준 회장(20.37%)과 두 자녀인 구형모 LX MDI 대표(12.15%), 연제씨(8.7%)는 지난해와 올해 각각 98억원과 85억원의 배당금을 타갔다. 이 돈이 향후 지주사 지분 매입 등 2세 승계에 사용될 것으로 재계는 보고 있다.
농심가 삼남인 신동익 메가마트 부회장의 경우 사익편취 논란도 제기됐다. 신 부회장은 현재 메가마트를 통해 엔디에스와 농심캐피탈 등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는데, 배당금이 매년 수십억원에 달한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메가마트와 엔디에스, 농심캐피탈은 각각 28억6000만원, 25억2000만원, 26억5000만원을 배당했다. 신 부회장이 이들 회사를 직간접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만큼, 상당한 배당 수익을 올렸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 중에서도 눈에 띄는 회사가 농심캐피탈이다. 이 회사는 지난해 영업이익과 순이익이 각각 88%, 86%나 하락했음에도 배당은 순이익(7억2000만원)의 4배에 육박하다. 문제는 이 회사가 올린 매출의 40% 정도가 계열사와의 내부거래를 통해 나온다는 점이다. 이렇게 벌어들인 돈은 배당을 통해 신 부회장에게 돌아간다는 점에서 사익편취 논란도 일고 있는 것이다. 특히 농심은 2022년부터 공정위가 발표한 사익편취 규제 대상에 포함됐다. 규제의 잣대 또한 이전보다 엄격해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대책 마련이 필요해 보인다고 재계는 지적한다.
"배당 확대로 기업 경쟁력 약화 우려"
경영 전문가들은 배당 확대 정책이 오히려 기업의 경쟁력 약화로 번지지 않을까 우려한다. 정부가 기대한 대로 배당이 주주 참여 확대와 기업 밸류업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수익 창출력과 맞닿아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권상집 한성대 사회과학부 교수는 "주주 환원을 위한 배당이 내부 자금 축소와 투자 위축으로 이어진다면 신중할 필요가 있다"면서 "무엇보다 순이익을 초과하는 배당을 하는 경우 경영진의 의사결정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등 관련 제도 역시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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