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루이비통 매장 한산…‘명품 만리장성’이 허물어지고 있다
22일 중국의 최대 번화가인 베이징 궈마오에서 말쑥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줄 서는 곳은 명품 매장이 아니라 20위안(약 4000원)짜리 뷔페를 제공하는 카페·식당들이었다. 한때 낮 시간에도 대기 줄이 있었던 2층짜리 에르메스·반클리프앤아펠 등 매장은 손님 없이 한산해 직원들이 문 앞을 서성일 정도였다. 반면 인근의 고급 호텔인 젠궈호텔 커피숍 앞에는 정장 차림의 고소득 직장인들이 줄을 섰다. 이곳에선 점심 시간이면 스타벅스 커피 값의 절반 수준인 20위안으로 뷔페 식사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궈마오의 한 아파트에서 월세살이하는 상하이 출신 직장인 A씨는 “궈마오의 고소득 직장인들은 명품보다 값싼 점심에 끌리는 게 요즘 현실”이라고 했다.
전 세계 명품 소비의 약 25%를 차지하는 중국에서 명품 판매가 급감하고 있다. 베인앤컴퍼니는 최근 보고서에서 코로나 팬데믹 이후 빠르게 성장했던 명품 시장(2023년 1조6000억달러 규모)은 중국 소비 급감의 여파로 올해 성장이 0%에 머물 수 있다고 예상했다. 중국에서 경제 회복이 더딘 가운데 ‘럭셔리 셰이밍(luxury shaming·명품 소비 망신 주기)’과 ‘소비 다운그레이드(消費降級·소비 수준을 낮추는 현상)’가 동시에 일어나면서 명품이 외면받고 있는 것이다.
까르띠에, 반클리프앤아펠 등 브랜드를 보유한 리치몬드그룹은 최근 지난 1분기 중국 매출이 27%나 하락했다고 밝혔다. 구찌는 전체의 약 35%를 차지하는 중국 매출이 곤두박질치면서 지난 3월 모회사의 시가총액이 90억달러 증발했다. 올해 들어 베르사체와 버버리의 중국 내 평균 할인율은 50% 이상이고, 마크제이콥스는 온라인 쇼핑몰인 티몰에서 이달부터 핸드백·의류·신발 반값 판매에 나섰다. 보테가베네타는 가방 구매 시 24개월 무이자 할부를 제공한다.
중국의 명품 소비가 급격히 줄어든 것은 당국이 ‘공동부유(다같이 잘 살자)’ 정책을 추진하며 사치·배금주의를 막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사정 당국인 중앙 기율감찰위는 지난 2월 “배금론, 서방 추종론 등 잘못된 사상을 타파하고 쾌락주의와 사치 풍조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밝혔다. 2008년 금융 위기 당시 미국·유럽에서도 사치를 부끄러워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적이 있는데, 중국에서는 국가 주도로 이러한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이 특징이다.
웨이보·샤오훙수 등 소셜미디어에서는 ‘부자 인플루언서’들이 대거 퇴출되면서 명품 과시 콘텐츠의 씨가 마르고 있다. “1000만위안(약 19억원)어치를 몸에 걸쳐야 외출한다”는 말로 유명한 인플루언서 왕훙취안신(王紅權星)의 팔로어 440만명짜리 더우인(중국판 틱톡) 계정은 지난 5월 갑자기 사라졌다. 중국 관영 차이나데일리는 “중국 소셜미디어에서는 부를 과시하는 계정이 속속 삭제되거나 활동 정지되며 단속이 강화되고 있다”고 했다.
중국 엘리트 계층이 소득 급감으로 ‘소비 다운그레이드’를 선택한 것도 명품 판매가 감소한 이유다. 시진핑 국가주석 지시로 2022년 7월 금융기관 임직원의 고연봉을 제한하자 대다수 금융 엘리트의 연봉이 30%가량 낮아졌다. 게다가 부동산 시장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중국 중산층들의 재산이 쪼그라든 것도 지갑을 열지 못하는 이유가 됐다. 이 때문에 중국인들은 명품을 사더라도 엔화 약세를 틈타 일본에서 구매하는 등 ‘알뜰 쇼핑’에 나서는 실정이다.
중국 정부는 당장 경제 반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명품 소비’를 장려하는 메시지를 다시 내기 힘들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씀씀이가 커질수록 불만도 커진다는 점을 알기 때문이다. 또 대부분 서방 기업 소유인 명품 브랜드를 띄워주기보다 국산 전기차·가전 등에 중국 소비자들의 돈이 흘러가도록 유도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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