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지하철 놓친 덕에 되찾은 인연
약속이 있는데 집에서 우물쭈물하다가 늦게 나왔다. 일찍 나오는 날은 버스도 빨리 오고 지하철도 내 발걸음에 딱딱 맞춰서 도착하는 거 같은데, 늦었다는 예감이 드는 날은 정류장에 도착하기 10초 전에 버스가 출발하고, 지하철 계단을 다다다닥 뛰어서 내려갈 때 지하철 문이 닫히는 경우가 많다.
그날도 역시 늦었다는 예감이 들었고, 평소처럼 지하철 계단을 다다다닥 뛰어서 내려갔는데 역시나 치익- 지하철 문이 닫히고 열차는 출발했다. 아, 이놈의 예감은 틀리는 적이 없구나. 한숨 쉬고 있는데 나보다 더 늦게 계단을 턱턱턱턱 뛰어 내려오는 사람이 있길래 돌아봤더니, 어라! 모르는 사람인데 얼굴은 아는 느낌? 그런데 상대방도 내 얼굴을 보더니 깜짝 놀랐고, 우리는 3초 동안 서로 기억 저장소에서 기억을 끄집어 냈다. 그러고 동시에 서로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악수했다.
그 친구는 나랑 중학교 때까지 엄청 친하게 지냈는데 중3 겨울방학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전학 간 병철이라는 친구였다. 그 시절에는 휴대전화도 없고 인터넷도 없어 예고 없이 헤어지면 그냥 이산가족 된 듯 영영 이별하던 시절이라 통 소식을 알 수가 없었다. 친한 친구의 갑작스러운 증발에 난 많이 당황했고 그 친구에게 약간 서운한 마음도 있었는데, 이렇게 느닷없이 서울 용산구에 있는 녹사평역에서 우연히 만나다니. 그것도 서로 지하철을 놓친 우연으로.
우리는 서로 목적지를 물어봤고 다행스럽게도 여섯 정거장을 함께 타고 갈 수 있었다. 여섯 정거장을 지나면서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결혼은 했는지, 아이는 몇 살인지, 집은 어디인지, 부모님은 건강하신지 최대한 빠르게 궁금한 이야기를 물어봤다. 여섯 정거장이 어찌나 빠르게 지나가던지. 우리는 서로 명함을 나눠 갖고 한번 더 악수한 후, 내가 먼저 내렸다.
열차 문이 닫히고 그 친구가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든 뒤, 나는 늦어버린 약속 장소로 뛰어갔다. 뛰어가는 동안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마치 열여섯 살 그 시절로 여행을 다녀온 듯한 기분. 여행이 뭐 별건가. 지하철을 놓친 덕분에 우연히 친구도 만났고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즐거웠으면 이게 여행이지!
/이재국·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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