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포스트잇] [32] 개미와 아우슈비츠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한 남성 개그맨이 ‘썰’을 풀었다. 그는 해가 중천에 떠 있도록 잠을 자고 있었다. 손자가 한심했던 할머니는 걸레로 방바닥을 닦으면서 이러셨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 부지런함을 배우라! 좀 더 자자, 좀 더 눕자 하면, 빈곤이 도적처럼 오느니라!” TV 화면 속 사람들과 TV 밖에 있는 사람들이 웃음을 빵 터뜨렸다.
그런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째, 개그맨이 할머니의 재밌는 캐릭터를 잘 포착해 흉내 냈기 때문이다. 둘째, 할머니가 손자의 게으름을 탓하기 위해 들이댄 존재가 ‘개미’였기 때문이다. 어떤 부지런한 인물을 비교 대상으로 삼았더라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시시껄렁했을 터이다. 부지런함의 우주 최강자 개미를 내세운 내러티브의 파격성이 저 개그를 살렸다.
‘그것이 알고 싶다’의 진행자 목소리를 흉내 내본다. “그런데 말입니다, 과연 이것이 황당할 만큼 극단적인 비교로 웃음을 폭발시킨, 그야말로 성공한 개그에 불과한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어려운 삶을 견딜 만한 지혜를 얻을 수는 없을까요?”
‘인간은 저마다의 지옥을 가지고 있다’라는 시쳇말은 인상 깊다. 고통스럽지 않은 인생이 없다는 뜻일 게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사르트르의 말도 있다. 이걸 쉽게 각색하면, ‘남들이 내 지옥을 몰라준다’가 아닐까? 누구에게나 어려운 시절이 있다. 무엇보다 사람의 가장 큰 병은 ‘낙담’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닥을 쳤다가 다시 올라와본 이의 프리미엄은 자신에 대한 구원의 경험은 물론이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해력일 것이다.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나치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회고록을 있는 대로 찾아서 섭렵하던 시기가 내게 있었다. 그곳이 어떤 지옥이었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평소에는 잊고 지내다가도, 도저히 견디기 힘든 날들이 다시 닥치면 또 거듭해 읽곤 한다. 그것이 내가 내 지옥에 갇혔을 적에 그 지옥을 탈출하는 가장 요긴한 비법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불행을 즐거워하는 건 최악의 악행이지만, 나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던 이들의 기록을 숙지하며 그들의 그것보다 하잘것없는 내 고통을 자각하고 반성하는 일은 최선의 겸손이다. 이 말은, 인간은 겸손하지 않을 적에 제 지옥에 갇힌다는 소리일 수도 있다. 할머니가 개미로 손자를 꾸짖으신 것은 사실 웃기만 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극단적인 제시로 잠든 상식을 일깨우는 기법은 개그 이전에 깊은 지혜인 까닭이다.
게으름과 ‘개미’의 관계는 우리 각자 삶의 지옥과 ‘아우슈비츠’에 바꿔 대입된다. 내가 나의 불행 앞에 늦잠 자는 자였다면, 저 ‘개미’의 자리에는 아우슈비츠에서도 살아남아 절망을 증언하며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낙담보다 더 위험한 것이 ‘의기양양’입니다. 왜냐고요? 그게 곧 지옥으로 변할 거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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