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경멸하는 벼락부자 최악”… 계층 희미해지며 중요해진 공동체 매너[설혜심의 매너·에티켓의 역사]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 2024. 7. 22.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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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락출세한 이들 위한 예법서
모방과 허세는 열등감의 반영… 가난한 사람 무시 가장 꼴사나워
엄격한 계층·서열 느슨해지며… 공동체 관계 중요해진 사회 반영
18세기 영국 남성의 과한 머리 장식을 풍자한 그림. 이 시기 영국에선 벼락출세한 사람, 벼락부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옷차림이나 문화적 소양을 통해 지위를 과시하려는 과장과 허세가 만연했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
《이래즈머스 존스 ‘매너 있는 사람’

“비천한 신분에 교육받지 못했는데 뜻밖에 돈과 권력을 움켜쥐게 된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쓰인 책.” ‘매너 있는 사람 혹은 세련된 평민’(1720년)이라는 책에 부제로 달린 말이다. ‘매너 있는 사람’은 매우 독특한 예법서다. 젠틀맨의 이상을 설파하던 대부분의 예법서와 달리 온전히 벼락출세한 이들이 유의해야 할 행동거지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저자인 이래즈머스 존스는 당시 영국에 그런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고, 그들에게 매너가 절실히 필요하기에 이 책을 썼다고 밝힌다.

저자는 우선 벼락부자들의 특징을 나열한다. 그들은 거리에서 소동이나 폭동이 발생하면 무슨 일인지 물어보고 폭도들 속에 섞이곤 한다. 그것은 점잖지 못한 행동인데, 더욱이 “그러다가 시계나 코담뱃갑을 잃어버릴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외에도 너무 많은 사례가 제시된다.

집에서 카드놀이가 벌어졌을 때, 남편이 잃고 있다면 부인이 근처에서 들여다보면 안 된다. 그 부인이 탁월한 센스가 있거나 교육을 아주 잘 받은 나머지 이기는 사람을 향해 어떤 불편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을 만큼 훈련된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이래즈머스 존스의 ‘매너 있는 사람 혹은 세련된 평민’ 속표지. 1720년 처음 출간된 이 책은 특이하게 벼락출세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예법서다. 사진 출처 구글북스
‘매너 있는 사람’은 독자로 상정된 사람들, 즉 벼락부자들이 상류층으로 보이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쳤는가를 냉소적인 시선으로 그려낸다. 그런 사람들은 말끝마다 저명 인사를 들먹이는 경향이 있는데, 주체성 없이 비굴한 성향을 지녔음을 증명할 뿐이다.

단지 돋보이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한 행동들도 볼썽사납기는 마찬가지였다. 교회에서 이마를 쳐가며 요란하게 참회하거나 예배 중에 시계나 코담뱃갑을 꺼내는 행동은 “신성한 신의 처소를 종교적 참배의 장소가 아니라 경매장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저자는 벼락출세한 이들이 흔히 자기가 왕인 듯이 느끼거나 왕을 흉내 내어 주머니에 현금을 갖고 다니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그런 사람들은 막상 돈을 내야 할 상황이 되면 “바지를 갈아입어서 그렇다는 둥”의 핑계를 대며 동료들에게 돈을 빌린다는 것이다. 저자는 허세와 열등감은 동전의 양면이고, 매너가 갖춰지지 않은 사람은 금방 그 바닥이 드러나게 마련이라고 일갈했다.

그런 사람들은 종종 소비에서 사회적 모방(social emulation)을 통해 상층부에 진입하려는 성급한 열망을 드러내곤 했다. 저자는 유행에 민감한 사회에서 유행을 좇는 일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수긍하면서도, “모두가 위를 보고 최대한 빠르게 그것을 모방하려” 하는 세태를 고발한다. 돈이 들어오자마자 자신과 가족을 엄청난 재산을 가진 상인처럼 꾸미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 술집 여급조차도 얼마간의 돈을 손에 쥐자마자 귀족 여성이 다니는 의상실로 달려가 실크 망토로 몸을 감싼다는 것이다.

비단 옷차림뿐이 아니었다. 사회 전반에 더 높은 신분인 척하는 과장과 허세가 만연했고, 그것은 무례와 천박함의 지표였다. 저자는 “오비디우스의 비가(悲歌) 정도나 읽을 수준의 라틴어 실력을 지니고 베르길리우스의 장엄한 아름다움이나 호라티우스의 용맹함을 칭송하는 이들은 실제로는 둘 다에서 한 페이지도 해석하지 못한 인간들이다”라고 비꼰다. 나아가 미천한 상인이나 신사의 시종이 걸핏하면 “제 명예를 걸고”라고 소리치는 일을 견딜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벼락출세한 이들이 보인 가장 꼴사나운 행동은 과거 자신이 속했던 신분의 사람들을 무시하며 거리를 두는 행태였다. 멋진 신사들로 가득한 커피숍에 일을 보러 들어온 정직한 상인을 표정 없이 빤히 쳐다보거나, 교회에서 자리에 앉을 때면 아는 사람과 경쟁하듯이 굴거나 가난한 이들을 비웃는 등의 최악의 매너를 보인다는 것이다. 특히 급전이 필요한 친구에게 ‘돈을 찔끔찔끔 주면서 인내를 시험하고 희망과 공포 사이를 오가게 고문하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다.

저자는 자기보다 상황이 나쁘다는 이유로 지인을 경멸하거나 눈길을 돌려버린다면 그것은 인생의 커다란 흠결이고 반드시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처럼 ‘매너 있는 사람’은 이 시대 영국에서 타인에게 호감을 주어야 한다는 명제가 떠올랐음을 드러낸다. 그것은 사실 매우 영국적인 현상이었다.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은 17세기 말 영국이 사회적 계층의 ‘재배치’를 이루었다고 보았다. 프랑스 혁명과 같은 극단적인 폭력으로 치닫지 않고, 정치적이고 헌법적인 해결책을 추구할 수 있는 시민사회가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 계층이 자연적 질서로 여겨지기보다는 오로지 분업의 요구사항이자 관습으로 인식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변화는 도덕과 매너 사이의 관계에도 변화를 끼치게 된다. 즉, 도덕을 인물 내부에서 찾던 경향에서 벗어나 사회적 차원에서 접근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구성원들 사이의 호의적인 상호 소통이 극도로 중요해졌다. 엄격한 계서제가 느슨해지면서 오히려 더 공동체의 눈치를 보고, 상대방이 싫어할 행동을 하지 않고, 호감을 얻는 일이 중요해진 시대가 열린 것이다.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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