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러움 버리고 광야로”… 70년대 청년 정신 지킨 별, 김민기

박은주 기자 2024. 7. 22.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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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주의 이사람의 길]
그림과 통기타, 글쓰기 좋아한 소년 70년대 청년문화 기수로
한점 빼고 불태운 재능있는 화가이자 시인, 싱어송 라이터
‘아침이슬’은 국민가요, 노동자 다룬 노랫말로 금지곡 다수
지난 2012년 10월 23일 연극 더 복서를 무대에 올리는 연출자 김민기씨가 학전블루에서 연출의 변을 말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아침 이슬)

노래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 떠났다. 노래극으로, 소극장으로 50여 년간 한국 대중문화의 ‘청년 정신’을 지켜온 김민기 전 학전 대표가 21일 오후 8시 20분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민기는 지난해 가을 위암 4기 진단을 받고, 최근까지 경기 고양시 일산 집에서 통원하며 항암 치료를 받아왔다. 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돼 상태가 악화됐다고 한다.

그래픽=박상훈

1951년 전북 익산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김민기는 6·25 전쟁 말기 부친을 잃고 서울로 상경했다. 산파였던 어머니가 돈을 벌어 중학교 때는 미국으로 보이스카우트 캠프를 다녀온 적도 있다. 경기중·고 때부터 그림을 그리며 통기타를 쳤던 그는 서울대 회화과에 69학번으로 입학, 1970년 단과대 후배로 입학한 고교 동창 김영세(이노디자인 대표)를 다시 만나며 ‘가수’의 길에 들어섰다. 두 사람은 신입생 환영회에서 자정 넘게 노래를 불렀고, 친구들은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라는 이름도 지어줬다. 도비두는 명동 YWCA에 있던 포크송의 산실 ‘청개구리의 집’에서 노래하며 음악계 주목을 받았다. 김영세씨는 이렇게 기억했다. “민기는 천재였다. 밥 딜런의 노래를 부르는데 발음까지도 완벽했고, 악보를 그리며 노래를 즉석에서 만들어냈다.”

김영세 이노디자인대표의 미국 캘리포니아주 팰로알토 사옥에 걸린 김민기의 그림. '화가 김민기'로 살았어도 성공했을 만큼 그림이 뛰어나다. 김민기가 음악활동을 하며 신세 진 김영세의 어머니에게 선물한 작품이다. /김영세 제공

김민기는 아예 학교도 그만두고 음악에 빠졌다. “2, 3학년 때쯤 민기가 그림을 다 불태웠다고 했어요.” 그 때 그림 한 점을 김영세에게 선물했다. 너그럽게 노래 작업을 응원해 준 ‘친구 어머니’를 위한 작품 하나만 남기고 그림과 ‘절연’한 것이다.

김민기의 노래, 양희은이 국민 노래로 만들다

1971년 하반기 발표한 ‘아침 이슬’은 1971년 김민기 첫 앨범 ‘김민기’에 수록됐고, 이어 편곡해 양희은에게도 줬다. 곡은 기이하게 정치 바람을 탔다. 1971년에는 아름다운 노랫말로 ‘건전가요 서울시문화상’을 받았고, 1975년 ‘묘지’라는 가사가 들어갔다는 이유로 다른 곡과 함께 금지곡이 됐다. 역설적으로 1970년대 유신 반대 시위, 1987년 민주 항쟁, 2016년 광화문 시위까지 50여 년간 가장 많이 불린 운동권 노래가 됐다. 출발은 그런 게 아니었다. 김민기가 수유동 형 집(혹은 공동묘지)에서 술 취해 잠들었다 일어나 4·19 탑 공원 근처를 걷다 수풀에 맺힌 이슬을 보며 지은 노래라고 한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권혜인

70년대 그의 노래는 계속 ‘정치적 불꽃’이 됐다. ‘늙은 군인의 노래’ ‘상록수’ 등 상당수가 금지됐다. 시위대가 애창하고 당국이 제재하는 상황의 반복이었다. 간결하면서도 서정적인 가사가 대중의 감성을 흔드는 데 더할 나위 없었다. 노래 ‘친구’는 익사한 선배의 동생을 기리며 만들었지만, 시위 현장에서는 옥사한 운동권을 기리는 노래로 불렸다.

경기고 선배이면서 그의 40년 지기인 한 인사는 “김민기는 사실 시인이에요. 문장이 너무 좋잖아요. 김민기가 그러더라고. 자기는 운동권이었던 적이 없었다고.” 말이 길지 않은 김민기는 시위 현장에 나와 자기 노래를 부른 적도, 정치적 구호를 외친 적도 없다.

'아침 이슬'이 수록된 음반의 표지. 1971년 나온 1집과는 음반 디자인이 다르다.

그의 감성은 늘 소외받는 곳으로 향했다. 인천 피혁 공장 노동자의 결혼식 축가로 만든 ‘상록수’, 노동자의 비참한 삶을 그린 노래극 ‘공장의 불빛’ 같은 것들이다. 대중이 ‘아침 이슬’과 ‘상록수’를 더 많이 부를수록 그는 ‘가수’에서 멀어졌다. “가수를 하기엔 목소리가 너무 낮다”고 했지만, 그 탓은 결코 아니었다. 상업적 성공과는 거리를 뒀고, 탄압받은 과거를 ‘권력’으로 환금하지 않았다. 대신 문화적 ‘인프라’를 깔아왔다. 이런 일을 두고 무대에 나서는 ‘앞것’이 아니라 ‘뒷것’이라고 했다.

2000년대 초 뮤지컬 ‘지하철 1호선’에 물건을 강매하는 깡패 역할로 학전 소극장 무대에 선 배우 황정민. 뒤의 모자 쓴 남자는 조승우다. 두 사람은 설경구, 김윤석, 장현성과 함께 ‘학전 독수리 5형제’로 불리며 큰 인기를 얻었다. /학전

정작 가수로 무대에 서기는 꺼려, ‘뒷것’ 자처

1991년 대학로에 문을 연 소극장 ‘학전’은 김민기의 ‘뒷것’ 정신이 구현된 공간이다. 고(故) 김광석을 필두로 들국화, 안치환, 장필순, 이소라, 윤도현, 나윤선 같은 음악가들이 배출됐다. 1994년 독일 원작(Line 1)을 번안해 올린 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사회적 고민을 가미한 작품으로 2023년까지 8천회 이상 공연돼 70만명이 넘게 봤다. 설경구·김윤석·황정민·장현성·조승우는 이 소극장이 배출한 스타, ‘학전 독수리 5형제’로 불린다. 뮤지컬 ‘의형제’(2000), ‘개똥이’(2006)는 물론 어린이극 ‘우리는 친구다’ ‘고추장 떡볶이’까지 지평을 넓히려 애썼다.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그 흔한 ‘정부 지원’을 받지 않고, 지난 3월 15일 개관 33년 만에 문을 닫았다.

친구 김영세가 말했다. “그를 운동권, 저항 가수로 가두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는 나서지 않는 ‘천재 아티스트’였다.”

문득 김민기 노래 중 ‘봉우리’가 생각났다. “우리 땀 흘리며 가는/ 여기 숲속의 좁게 난 길/ 높은 곳에 봉우리는 없는지도 몰라/ 그래 친구여 바로 여긴지도 몰라/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유족은 배우자 이미영씨와 2남. 빈소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2, 3호실. 발인은 24일 오전 8시, 장지 천안공원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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