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설]‘멋쟁해병’식 인맥 활용 문제
“대학도 안 가면 저 같은 사람한테 다른 자원이 뭐가 있어요?”
몇해 전 청소년 대상 진로 캠프에서 만난 고등학생이 내게 한 질문이다. 강의 중 내가 “학벌에 너무 구애받지 말고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해보라”고 한 말을 짚으면서 “부모님도 평범하고 특출난 재능도 없는 저 같은 사람한테는 학벌 말곤 다른 기댈 게 없지 않으냐?”고 물었다. 지금도 교복 차림과 그 당당한 태도가 떠오를 만큼 인상 깊은 기억이다. 그 질문은 이후 여러 맥락에서 종종 떠오르곤 했다. 최근 해병대 채모 상병 사망 사건과 관련된 ‘멋쟁해병’이라는 인맥 그룹 이슈를 접했을 때도 그랬다.
“(…) 절대 사표 내지 마라, 내가 VIP에게 얘기를 하겠다. (…) 왜 그러냐면 아마 내년쯤에 발표할 거거든. 해병대 별 4개 만들 거거든.”
투자회사 대표가 검사 출신 변호사에게, 자신이 ‘VIP’와 연결돼 있으며 그를 통해 지인인 해병대 사단장을 승진시키려 한다는 통화 내역이 육성 그대로 보도됐다. 다만 이 사람의 말이 실제로 전달돼 대통령의 직권남용에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면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다. 그래서 정치권과 언론의 관심은 이 대화 이후로 현행법상 불법 행위가 있었느냐에 집중돼 있다.
그러나 찝찝함이 남는다. 불법만 없었다면, 저 대화로 드러난 인맥 그룹 자체는 문제가 없을까? 녹음파일 속의 그 번들번들한 말투가 자꾸 몇해 전 고등학생의 질문과 겹쳐진다. “저런 사람들이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더 부자 되고, 더 출세하는 사회에서 저 같은 평범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데요?” 이렇게 다시 묻는 것 같다.
지난주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의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지명된 J D 밴스 상원의원은 책 <힐빌리의 노래>로 유명해졌다. 러스트벨트 지역 가난한 백인들의 삶을 자전적으로 그린 이 책에서 밴스는 가난한 아이들에겐 사회적 연결망이 거의 없음을 강조한다. 그는 해병대에 입대해서야 은행을 이용하는 법을 배웠고, 예일대 로스쿨에 입학해서야 ‘금융’이란 게 사람들이 실제 종사하는 산업군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그는 가난한 아이들의 삶에 정부가 보다 일찍 개입해야 한다고, 스스로 대학에 가기를 기다려선 안 된다고 이 책에서 주장했다. 그러나 정치 입문 후 그의 입장은 바뀐다. 저소득층을 위한 정부 개입을 반대하고 시장경제에 맡기자는 쪽으로 돌아선 것이다. 이번에 공화당 부통령 후보까지 됐으니 그가 어려운 환경에서도 학벌과 해병대 이력, 금융회사 경력 등 자원을 획득해온 노력들이 결실을 맺은 셈이다. 다만 이 자원들은 그가 책에 그린 ‘사회적 연결망 없는 아이들’을 위해 쓰이진 않았다. 반대로 그 아이들이 그의 개인적 성취에 자원으로 사용된 셈이라 하겠다.
그러니까 이런 찝찝함이다. 국회 청문회에서 날선 질문을 쏟아내는 정치인 중에, 이 일을 앞다퉈 보도하는 언론인 중에, 그리고 나를 포함해 이 이슈를 소비하는 사람들 중에 앞의 그 고등학생에게 이렇게 답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가진 사람들이 자원을 자기들만을 위해 쓰지 않게 사회가 막아줄 거야. 어른들 중에는 그런 인맥을 거부하는 사람이 더 많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황세원 일in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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