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의 세계 - 이종필의 과학자의 발상법]핵무기 없이도 ‘북한 억제’ 가능…자주국방 ‘최대치’ 만드는 게 먼저다
트럼프 당선 가능성 높아지며 다시 힘 받는 ‘핵무장론’…핵만이 핵 사용 억제한다는 ‘공포의 균형’ 논리, 이미 남북에 성립
윤 대통령, 지난해 한·미 정상회담서 핵무기 포기 대가로 미국 전략자산 전개 얻어냈지만 ‘우리 것’ 아냐
진정 핵무장 원한다면, 핵추진잠수함 도입·사용후핵연료 재처리 준비 등 ‘한발 더’ 다가가는 노력을
일주일 전인 7월16일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핵무기 실험이었던 이른바 ‘트리티니 실험’이 시행된 날이었다. 작년에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에서도 이 실험이 아주 중요한 장면으로 나온다. 트리니티 실험에서 터뜨린 폭탄은 플루토늄239로 만들었다. 핵발전소의 핵연료에 포함된 우라늄238이 중성자를 받아들여 핵변환을 일으키면 플루토늄239가 생성된다. 이런 이유로 핵발전소를 보유한 나라는 잠정적인 핵무기 보유국가로 불리기도 한다. 24기의 원전을 가동 중인 한국도 당연히 포함된다. 플루토늄은 5㎏ 내외의 양만 있으면 핵무기를 만들 수 있다. 플루토늄의 밀도는 물보다 약 20배 크다. 360㎖짜리 소주병 크기로 플루토늄을 모으면 대량살상무기가 된다.
한국에서 핵무기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진 것은 올해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부터이다. 최근 트럼프 쪽 인사들로부터 트럼프가 당선되면 한국의 핵무장을 용인할 수도 있다는 취지의 발언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국내 일부 정치인들이나 유명 인사들이 가끔 자체 핵무장을 주장한 것과는 무게가 다르게 느껴진다. 설령 트럼프가 당선된 뒤에 한국의 핵무장을 허용하지 않더라도 트럼프가 비용문제를 들어 주한미군을 철수하는 등의 초강수를 둔다면, 미국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한국의 자체 핵무장론이 현실적인 큰 힘을 얻을 수 있다.
자체 핵무장을 주장하는 주된 근거는 북한의 핵무기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의 핵무기밖에 없다는 것이다. 핵무기만이 핵무기 사용을 억제할 수 있다는 것은 이른바 ‘상호확증파괴에 의한 공포의 균형’으로 설명된다. 적국이 우리를 핵무기로 공격(1차)하더라도 우리가 핵무기로 보복 공격(2차)을 해서 상대를 초토화(상호확증파괴)시킬 수 있다면 상대방이 우리를 함부로 공격하지 못한다는 논리이다. 따라서 공포의 균형을 성립시키려면 우리의 2차 보복 공격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과시할 필요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핵무기를 탑재하고 있는 전략핵잠수함의 존재는 공포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핵무기를 투발하는 전략폭격기나 탄도미사일에 비해 전략핵잠수함은 그 위치가 노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주요 핵무기 보유 국가는 모두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탑재한 전략핵잠수함을 필수적으로 운용하고 있다.
상호확증파괴를 보다 수월하게 하기 위해 맺은 협정도 있다. 구소련과 미국이 1972년 체결한 탄도탄요격미사일(ABM) 협정이 그것이다. 협정의 핵심은 상대의 탄도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는 방어 미사일 개수를 제한하는 내용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방패와 갑옷을 서로 벗어버림으로써 자신을 상대의 공격에 더 쉽게 노출시킨다는 얘기다. 그래야만 서로가 상대의 2차 보복 공격에 대한 공포 때문에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논리이다. 만약 한쪽이 요격미사일을 늘리면 이는 상대에 대한 선제 핵 공격 의사가 있음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수십 년을 지속한 ABM 협정은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2001년 9·11 사건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명목으로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테러리스트가 핵무기로 미국을 공격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러시아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미국이 갑옷을 입고 방패를 들기로 했으니, 이제 언제든지 미국이 러시아를 핵으로 선제공격할 수도 있겠구나, 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공포의 균형은 핵우산을 제공하고 제공받기로 한 미국과 한국에도 딜레마로 작용한다. 북한이 한국을 핵무기로 공격했을 때 미국이 북한을 핵무기로 보복해 주면, 북한은 다시 미국에 대한 보복 핵 공격에 나설 것이다. 과연 미국이 LA나 뉴욕을 포기하면서까지 한국을 위해 북한에 핵무기를 쏠 것인가, 라고 묻는다면 쉽게 긍정의 답을 내리지는 못할 것이다. 만약 북한이 이점까지 계산에 넣는다면, 즉 북한의 미국에 대한 2차 보복 공격 때문에 미국이 섣불리 북한에 핵무기를 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북한은 한국에 핵 공격을 감행할 유혹을 느낄 것이다. 이런 딜레마는 한국의 자체 핵무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된 논거 중 하나이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공포의 균형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각자가 상대의 2차 보복 공격에 의한 자신의 피해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점이다. 적어도 해당 국가의 최고지도자가 이 정도의 논리를 이해하고 상식적인 판단을 할 수 있어야 공포의 균형이 성립한다. 따라서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미치광이 지도자여서 언제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도 핵무장에 나서야 한다는 논리는 공포의 균형에 위배된다. 김정은이 미치광이라면 우리가 핵무장을 하더라도 우리의 2차 보복 공격에 대한 판단 없이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또는 자신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오판으로 선제 핵 공격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핵무장에 나서 북한 핵무기와 공포의 균형을 이루려면 북한의 김정은이 충분히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지도자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물론 이는 우리 대통령에게도 해당한다. 김정은의 이성과 상식을 믿어야 우리의 핵무장이 의미가 있다는 사실이 다소 껄끄러울 수도 있겠지만, 공포의 균형이 말하는 현실이 그렇다.
그런데 만약 김정은이 충분히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지도자라면 우리가 핵무장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재래식 무기만으로도 2차 보복 공격으로 북한을 초토화시키고 김정은 일가를 몰살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북한의 현재 무장상태를 무력화하고 김씨 일가의 통치체제를 끝내는 데에 굳이 핵무기까지 필요하지 않다.
만약 북한의 통상적인 군사력 수준이 상당히 높다면 우리가 지금의 재래식 무기에 핵무기를 더하는 것이 북한에 새로운 큰 위협이 되겠지만(아마도 중국에는 그럴 것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지금 한국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계기로 민주주의 진영의 무기고로 떠오를 정도로 세계 6위 이상의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 북한의 재래식 전력과 군수보급능력은 수십 년 이전 상태에 머물러 있다. 여기에 핵무기를 더 얹는다고 해서 북한이 마음먹은 선제공격을 주저할 정도의 위협이 추가되지는 않을 것이다. 김정은이 충분히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지도자라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김정은이 이성적이고 상식적이라면 지금의 남북한 군사력과 전체 국력의 차이만으로도 사실상 공포의 균형이 성립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남북한의 매우 독특한 상황이 빚은 결과이다. 만약 김정은이 그 정도의 판단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공포의 균형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핵무장을 한다고 하더라도 북한의 선제공격을 막을 방법은 없다. 이때는 우리가 김정은의 공격징후를 미리 예지하고 우리가 선제적으로 공격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런데 이는 사실상 블라디미르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논리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러나저러나 우리의 자체 핵무장은 실질적으로 우리의 안전을 훨씬 더 강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며칠 전 피격사건에서 천운으로 목숨을 건져 대권가도에 더 큰 힘을 받은 트럼프가 다시 미국의 대통령이 되면 정말로 한국의 핵무장을 용인할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만약 미국이 한국의 핵무장을 용인한다면 국제사회의 제재는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꼭 필요하다면 제재를 감수하면서까지 핵무장에 나설 결심을 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 핵무장을 했을 때 그 결과가 현실적으로 어떠할 것인지는 사전에 충분히 검토해 봐야 한다.
다만 진정으로 핵무장을 원한다면 그전에 미리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다. 핵추진잠수함 도입과 원전의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같은 것들이다. 핵추진잠수함은 추진력을 원자력으로 얻는 잠수함이다. 앞서 말했던 핵무기를 탑재한 전략핵잠수함도 보통 핵추진이다. 핵무기를 탑재하지 않고 적국의 잠수함이나 함정 등을 견제하기 위한 공격형 핵잠수함도 있다. 만약 우리가 핵으로 추진하는 대형잠수함에 현무급의 고위력 재래식 미사일을 탑재한다면 핵무기가 아니더라도 북한을 포함한 주변국의 도발을 크게 견제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SLBM 기술을 갖고 있다. 추후에 핵무장을 결심해야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전략핵잠수함을 따로 건조할 필요가 없다.
또한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는 플루토늄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과정인데 이는 한·미원자력협정 때문에 우리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일본은 전범국임에도 플루토늄을 추출해 국내외 50t 안팎(핵무기 수천기 분량)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과 크게 대조적이다. 이 때문에 일본은 우리보다 핵무장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 있는 셈이다.
작년 4월26일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채택한 ‘워싱턴 선언’에서 한국이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대신 미국의 전략자산을 한국에 더 자주 전개하기로 하는 등 북한의 핵위협에 대처하는 새로운 방안을 제시했다. 나는 이 과정에서 왜 윤석열 대통령이 핵무기 포기 대가로 핵추진잠수함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또는 한·미원자력협정 개정 등을 얻어내지 못했는지 궁금했다. 이들은 NPT 체제에 위배되지 않는다. 미국의 전략자산이나 전술핵은 그 어떤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도 우리 것이 아니다.
정말로 핵무장을 원하는 사람들이라면 NPT 체제를 준수하면서 핵무장에 한발 더 다가갈 수 있는 이런 조건들부터 왜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지, 대통령에게 적극적으로 주문하지 않았는지 나로서는 의문이다. 핵무장을 하지 않더라도 이들 조치만으로 북한에 대한 우리 자체의 억지력을 높일 수 있고, 나중에 핵무장을 결심하더라도 실제 무장까지의 시간을 훨씬 더 단축시킬 수 있으니까 말이다.
트럼프가 당선되든 말든, 미국이 우리 핵무장을 용인하든 말든 지금의 조건 속에서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자주국방의 최대치부터 해 놓는 게 우선이다. 그게 주권국가다.
■이종필 교수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90년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했으며 2001년 입자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연세대·고등과학원 등에서 연구원으로, 고려대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했다. 2016년부터 건국대 상허교양대학에서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신의 입자를 찾아서> <대통령을 위한 과학 에세이> <물리학 클래식>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 <빛의 속도로 이해하는 상대성이론> 등이 있고, <최종이론의 꿈> <블랙홀 전쟁> <물리의 정석>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 등을 우리글로 옮겼다.
이종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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