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희망을 몸으로 경험할 때 [뉴스룸에서]
김진철 | 문화부장
애플리케이션을 열어보니 462일 하고도 5시간23분43초를 막 지나고 있다. 138만6674원을 아꼈다고 한다. 70일14시간49분30초 수명이 늘었다는 것은 추정치일 것이다. 지난해 4월 이래로 지금까지 9244개비 담배를 안 피운 결과다. 그렇다. 지금까지 금연에 성공하고 있다. 국립암센터 금연캠프 이후 주기적으로 만난 담당의는 콜레스테롤과 혈당 문제까지 제기했다. 덕분에 금연 6개월 시점에 달리기를 시작했다. 주로 아침 시간에, 적어도 사흘에 한번은 5㎞가량 뛰는 것을 ‘루틴’으로 삼아왔다. 먹고 마시는 일에도 조금 신경을 쓰면서, 근 몇년간 밥·술로 늘어가던 뱃살이 줄어들고 몸무게도 몇 ㎏은 떨어졌다.
‘윤석열 나이’ 덕을 잠시 봤지만 별수 없이 쉰 줄에 들어설 참이다. 건강하고 씩씩하게 삶을 일궈나가는 또래들이 훨씬 많지만, 대기업 임원으로 승진한 고교 동창의 부고가 지난봄 찾아들기도 했다. 늙어감을 인식하는 일이 이제는 더욱 자연스러워져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소설가 김훈의 에세이 ‘허송세월’에는 나이 들어가는 일의 아득함이 특유의 필치로 그려져 있다. 이제 심혈관 질환으로 병원에 드나드는 작가는 50대 중반에 한 스님을 만나 담배를 끊을 뻔했다. “이 사람아, 그걸 왜 못 끊어. 자네가 안 피우면 되는 거야. 피우면 못 끊은 거고. (…) 그렇게 쉬운 걸 못하는구나. 쉬워서 못하느냐.” 작가는 결국 예순다섯에 이르러 담배와 연을 끊기에 이르는데, 스님은 작가의 스승이 됐다.
책에는 ‘늙기의 즐거움’이라고 적혀 있고, ‘허송세월’에 염세나 비관, 후회의 뜻은 담겨 있지 않다.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빛은 환하고 볕은 따스할 것이다. 특히 이 대목에서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 히라야마(야쿠쇼 고지)가 떠올랐다. 이른 시간 골목길 비질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공중화장실 청소부 히라야마는 같은 순서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친다. 히라야마는 도쿄 시부야 공중화장실 변기 안쪽까지 반짝반짝 닦는다. 점심이 되면 고즈넉한 공원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고 우유를 마신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는 햇빛, 일본어로 ‘고모레비’의 찰나를 필름 카메라로 담아낸다.
이보다 더한 허송세월이 있을까. 곱씹고 돌아보고 다시 나아가는 삶의 반복, 몸과 마음을 빛과 볕으로 채우는 시간들, 매일 비슷하지만 결코 같지 않은 고모레비의 반짝이는 순간을 기억하는 의식. 이런 것이 김훈이 규정한 허송세월이라면 나는 이른 아침 동네 공원길을 뛸 때 허송세월한다. 온몸의 땀구멍이 열리며 신선한 기운이 차오르는, 비워내고 가벼워지면서 동시에 채워지는 시간이 허송세월의 깊은 뜻이다. 허송세월은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든다.
김훈은 “살아 있는 인간의 몸속에서 희망을 확인하는 일은 그야말로 희망”이라며 몸과 정신의 관계를 통찰한다. “아마도 이런 희망은 실핏줄이나 장기의 오지 속과 근육의 갈피마다 서식하는 생명 현상 그 자체인 것이어서, 사유나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다만 경험될 뿐이다. 몸의 희망을 몸으로 경험할 때, 우리는 육체성과 정신성의 간극을 넘어서는 행복을 느낀다.” 김훈은 이런 행복을 ‘몸과 삶 사이의 직접성’이라고 명명한다. 그 또한 “개를 데리고 새벽 공원을 달릴 때” 직접성의 행복을 느낀다.
오는 26일부터 다음달 11일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올림픽이 열린다. 한국 선수단은 22개 종목 140여명 선수로, 1976년 몬트리올 대회(50명) 이후 최소 규모다. 역설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선수들이나 시민들이나 직접성의 행복을 느낄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 싶다. 게다가 일촉즉발의 국제 정세 속에 큰 규모의 스포츠 대회가 열린다. 올림픽 기간만이라도 휴전하자는 목소리도, 영향력은 없을지언정 다시금 커진다. ‘스포츠 제전을 통한 평화롭고 더 나은 세계 건설’이 올림픽 개최 목표다. 올림픽은 작은 희망의 실마리를 부여잡을 기회다. 이리 뛰고 저리 달리는 선수들의 울끈불끈한 근육들을 보며 허송세월하는 기쁨을 누리는, 희망 가득한 올림픽이었으면 좋겠다.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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