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족들의 집 ‘한울삶’에서 한솥밥을 먹다

한겨레 2024. 7. 22.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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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박래군의 인권의 꿈] 12화 유가협 사무국장
유가협 회원들은 명지대생 강경대군이 시위 도중 치사당한 다음날인 1991년 4월27일 서울 연세대에서 ‘어머니의 노래’ 발표회를 했다. 사진은 박정기(맨 오른쪽)씨를 비롯한 유가족들이 열사들의 영정을 모신 한울삶에서 노래 연습을 하는 모습이다. 유가협 제공

넘쳐나는 일에 사무국장역 자처
서화전 수익·가족들 갹출금으로
허름한 한옥에 유가족 거처 마련
신영복 글씨로 ‘한울삶’ 현판 달아

재정 안정화 위해 후원회 조직
가석방 문익환 목사가 회장 맡아
수익사업으로 대학축제 장터 운영

자식 잃게한 사회 구조에 대한
유가족 궁금증에 가족교실 열어

1989년 8월12일, 연세대학교 장기원기념관에서 유가협 제4차 정기총회가 열렸다. 이날 총회는 구속되어 8개월 동안 수감 생활을 하신 두 분(정연관 모친 임분이, 박선영 모친 오영자) 석방 환영대회와 같이 열렸다. 그날 나는 총회에서 유가협 사무국장으로 임명됐다. 유가협에서 해야 할 일은 넘쳐나고 있는데, 언제까지 정미경 혼자서 일을 보게 할 수는 없어서 사무국을 만들자고 내가 제안을 했다. 그런데 어른들은 사무국장을 맡길 사람이 없다고 주저하셨다.

“사람이 딱히 없으면 제가 할게요.”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른다. 그냥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른들은 모두 반겼고, 정미경도 손뼉을 치면서 좋아했다. 내가 사회단체에서 처음 받은 직책이었다.

눈치 보지 않고 울고 웃다

유가협은 점점 활기가 넘쳐갔다. 창신동 봉제공장 골목의 정면에 있는 허름한 한옥이 유가족들의 집이었다. 왼편에는 민가협 사무실이 있었다. 이 집을 구입하는 데는 서화전 수익금만으로는 너무 부족했다. 턱없이 모자란 돈은 가족들이 십시일반 갹출을 해서 마련했다. 이소선 어머니가 나서서 유가족들을 설득했다. “사무실을 얻으려고 해도 아이들 영정 건다고 못 내준다고 하고, 지방에서 오면 친척 집에 가서 묵어야 하는데 말도 안 통하잖아. 정말 우리집이 있어야 하는 기라, 하루를 자도 맘 편히 자고 갈 수 있는 그런 집, 우리 아이들 사진 걸어놓고 남 눈치 안 보고 울고 싶으면 울고, 웃고 싶으면 웃을 수 있는 그런 집 하나 만들자고.”

유가협은 1989년 12월 한울삶 집들이에 앞서 열사들의 영정사진부터 만들어 벽을 채웠다. 사진은 2007년 12월 인혁당 유가족들의 성금으로, 20년 사이 늘어난 열사들의 영정사진을 추가로 제작해 전시한 날이다. 가운데가 고 이소선 어머니의 모습이다. 유가협 제공

어머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붙잡고 설득했다. 그렇게 마련한 집에서 누구 눈치 보지 않고 자식들 얘기를 할 수 있었고, 웃고 울 수 있었다. 밥도 같이 해먹고, 술도 한잔 하고 그러다가 흥이 나면 노래도 하고 고스톱도 쳤다. 가족들은 벽에 걸린 당신들의 자식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을 하시고는 했다. “얘들아, 집 잘 지키고 있어.” 일 보고 돌아와서는 “집 잘 보고 있었냐”면서 다시 영정사진을 쓰다듬었다. 이렇게 맘 놓고 영정 걸어놓고 말을 걸고, 대화를 해도 누구 하나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는 그런 공간이었다.

1989년 봄 서화전을 열어 유가협 만남의 집 마련을 위한 종잣돈을 모은 유가족들은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의 허름한 한옥을 구해 그해 12월17일 입주했다. 신영복 선생이 서화전 때 기증한 글씨 ‘한울삶’(사진)을 만남의 집 이름으로 정했다. 유가협 제공

박정기 아버지는 집 이름을 고민했다. ‘한울삶’은 서화전 때 신영복 선생님이 내놓은 작품이었다. “이 집은 한 울타리에서 한 가족처럼 같이 사는 집, 한울삶이어야 해.” 그래서 신영복 선생님에게 부탁해서 글씨를 얻었고, 그걸로 현판을 만들어 달았다. 나는 서울에 어디 갈 곳도 없던 처지라 1년을 ‘한울삶’에서 어머니 아버지들과 한솥밥을 먹으면서 살았다.

유가협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영정 사진을 보고 멈칫했다. 안 그러겠는가? 수십 명의 죽은 사람들 얼굴 사진이 벽면에 가득 걸린 그런 방에 들어오면 당연히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 방에서 내어주는 밥상에 앉는데 밥이 제대로 넘어갈 리 없었다. 그럴 때마다 이소선 어머님이 한 말씀 하셨다. “싸우려면 힘이 있어야지. 왜 그렇게 깨지락거리노. 밥 많이 먹고 힘내서 싸워야지.”

처음에는 그랬지만, 여러 번 다녀가게 되면 이제는 자연스럽게 그곳에 앉아 밥도 먹고, 술도 마시면서 어머니 아버지들과 어울렸다. 유가협에만 오면 사람들이 밥맛이 좋다고 했다. 팔도에서 오신 어머님들이 경쟁적으로 음식 솜씨를 자랑하는데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박선영 어머니는 누구든 손을 잡아끌어다가 자꾸 밥을 더 퍼줬다. “난 내 딸을 잃었지만, 수백 배 많은 아들, 딸을 얻었어, 잉. 운동하려면 얼마나 배고프겠어. 더 먹어.”

유가협 제5차 정기총회에서 사회를 보고 있는 박래군. 필자 제공

동료에서 부부로

그 시절에 나는 부모님들로부터 ‘밤도깨비’라는 별명을 얻었다. 낮에는 아버지 어머니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찾아오는 사람들과 얘기를 하고, 회의도 하고, 그러다가 저녁에는 술도 한잔 했다. 그때 원조 곱창집에서 곱창볶음을 참 많이도 사다 먹었다. 곱창집 주인도 우리를 알아보고 다른 손님들보다 더 많이 주고는 했다. 그러다가 늦은 밤이 되어서야 책상에 앉아 일했다.

집이 있으니 사람들이 찾아왔다. 인사드리러 오는 사람, 의논하러 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추모 음악회’ 같은 행사들을 만들어갔다. 그들을 주축으로 후원회가 만들어졌다. 후원회를 만드는데 회장은 극구 문익환 목사가 맡아야 한다는 게 가족들의 중론이었다. 감옥까지 찾아가 부탁을 드려 승낙을 얻었다. 문익환 목사님은 1990년 겨울에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한울삶 골목에서 1990년 11월24일에 문익환 목사님 석방환영대회와 함께 후원회 현판식을 가졌다. 후원 회원은 3백명까지 불어났다. 십시일반으로 돈을 만들어서 봉고차도 사줬다. 늙은 어머니 아버지들이 이동하시는 데 불편하지 않게 하자는 뜻이었다. 후원회가 생기고 나서 재정도 좋아졌다. 그래서 한때 사무국 간사가 5명까지 불어났다.

유가협은 1990년 8월 후원회를 창립하고 옥중의 문익환 목사를 초대 후원회장으로 뽑았다. 그해 11월24일 특사로 풀려난 문 목사가 석방 환영회 겸 후원회 현판식에서 인사를 하고 있다. 유가협 제공

부모님들의 활동도 아주 활발해졌다. 서울대, 연세대, 성균관대 등의 대학 축제를 돌아다니면서 장터를 열었다. 활동에 필요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서지만, 유가협 활동을 알리려는 의도도 있었다. 우리보다 먼저 장터를 시작한 곳은 민가협이었다. 민가협과 경쟁적으로 퍼주기를 했다. 장터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1990년 가을 성균관대 축제 때의 장터가 가장 많이 생각난다. 그때 눈에 띄게 예쁜 여학생이 있었다. 장터를 준비하면서 한울삶에도 다녀갔던 학생이었다. 어머니 아버지들은 그 여학생을 기억했다. 김귀정 동아리연합회 회장이었다. 우리는 다음 해 봄에 그녀를 만난다.

한울삶에서 사무실은 문간방을 썼다. 책상 세 개 들어가면 꽉 차는 방이었다. 나와 정미경 간사 둘이 일할 때 래전이 숭실대 후배 정종숙이 간사로 들어왔다. 나보다 5살 연하였다. 우리는 비좁은 사무실에서 온종일 붙어 지내다가 사랑하는 관계로 발전했다. 비밀 연애를 하고 결혼 날짜를 잡고서야 부모님들에게 말씀드리니 모두 깜짝 놀랐다. 1990년 하반기에 부모님이 안양에 전셋집을 마련해줘서 그곳에서 출퇴근했고, 정종숙 간사는 부천에서 출퇴근했다. 퇴근할 때면 우리는 밤마다 구로역에서 안양과 부천으로 헤어져야 했다. 매일 헤어지는 걸 끝내고 싶어 결혼을 서둘렀다. 유가협은 우리 부부가 연애하고, 사랑을 시작했던 곳이다. 결혼하여 딸 둘을 얻어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살고 있으니 우리 가족이 탄생한 고마운 곳이다.

유가족들의 세상공부

유가족들은 늘 죽은 자식에게 못 해준 게 많아서 미안했다. 살아 있을 때 이해하고 격려해주지 못해서도 미안해했다. 자결한 열사들의 부모이건 국가폭력 희생자의 부모이건 내 자식이 왜 죽었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그것이 너무 궁금했다. 세상에 준비된 유가족은 없었다. 그래서 외부 강사를 불러 몇 번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지만, 가족들은 어려워서 이해 못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1990년 겨울에는 우리 사무국에서 직접 해보자고 했다. 내가 교장을 맡고 간사들이 강사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현대사, 정치정세도 공부했고, 유가족의 삶에 대해서도 공부하는 시간을 만들었다. 읽고 쓰는 일을 어려워하시니 한글공부 시간도 마련했다. 투쟁가도 가르쳤다. 너무 잘 따라 하시고, 예습도 잘해오셨다. 방바닥에 배를 깔고 미리 자료를 읽고 복습하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폭설을 뚫고 강원도 강릉에서부터 몇 시간을 걸려서 오시던 김성수 어머니. 광주에서 새벽밥 해먹고 오시던 이재호 어머니 같은 분들이 기억난다. 유가족들은 지금도 만나면 그때의 가족교실 이야기를 많이 하신다. 매일 어머니 아버지들과 대화하고 부대끼며 살다 보니 친부모님만큼 가까워졌다. 유가족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고민과 슬픔과 한을 나에게만은 모두 나눠 주셨던 것 같다. 지금은 대부분 고인이 되셨고, 몇 분은 늙으셔서 거동조차 못 하신다. 이 글을 쓰다 보니 그분들이 많이 그립다.

박래군 |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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