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처럼 끝 없는 그리기… 스페이스 테미 '그리고 그리고'
불안·우울 등 어두운 정서 유쾌하게 풀어내
조선시대 문자도 현대적 재구성… 교훈 해석
드로잉(drawing)과 페인팅(painting)은 '그리는 행위'를 의미한다. 수많은 점이 모여 선을 만들고 사물의 윤곽을 이끌어내듯 그리는 행위는 끝없이 이어질 때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대전 중구 테미로 스페이스 테미(space TEMI)에서 다음 달 17일까지 개최하는 기획전 '그리고 그리고'는 이 같은 그리는 행위의 지속성을 함의한다. 전시명도 동사 '그리다'와 부사 '그리고'를 이어 붙여 도수진과 박정기의 연속적인 작품 세계를 조망한다. 독일 뮌스터 미술대학에서 유학한 두 작가의 작품을 만나면 그림의 연쇄적인 반응 속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 도수진은 드로잉 470여 점과 페인팅 16점, 박정기는 조선시대 '문자도(文字圖)'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페인팅 13점을 전시장 곳곳에 선보인다.
◇도수진의 드로잉 룸
도수진은 회화의 행위에 주목한다. 그는 그림을 그린다는 것을 애써 산꼭대기에 올린 바위가 굴러 떨어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시지프의 형벌'과 비슷하다고 여긴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무의미한 고통 속에서 부조리한 삶을 살아가는 고독한 개인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470여 점의 드로잉이 무수히 이어지는 전시공간도 출발점과 최종점이 모호하다. 책을 펼치면 가장 먼저 첫 문장을 찾듯 관람객들은 드로잉의 첫머리를 찾으려 애쓰지만 이내 실패하고 만다. 당연하다. 지난해 11월부터 드로잉 작업을 시작했다는 도수진은 "하루 한 장에서 세 장 정도 꾸준히 작업하려고 노력했다"며 "아주 사소한 사건이나 감정을 그렸고, 언어로 정리되기 전 무의식에 가까운 것을 그리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그리고자 했다"고 말했다. 애시당초 도수진의 드로잉 룸은 시작과 끝맺음이 있는 '선'이 아니다. 끝없이 이어지며 반복되는 '끈'에 가깝다. 그림을 그리고 그리고 그리는 공간이다. 이 공간에 들어서면 산 정상에서 터벅터벅 내려오는 시지프의 시간을 조금이나마 체험해볼 수 있다.
◇도수진의 페인팅 룸
이번 전시에 공개된 도수진의 페인팅 16점은 모두 올해 완성된 신작이다. 그중 '현기증'은 소용돌이 한가운데 서 있는 소녀를 그렸다. 내부와 외부 환경이 제각기 돌아가는 상태를 표현했다. 어지러움과 혼돈이 극심하다. 도수진은 "성장기 시절 정서적 혼란과 심리적 불안으로 생겨난 현기증과 디지털 시대에서 급속한 변화로 맞은 현기증이 동시에 발생한 자전적 상황을 표현했다"며 "불안정한 상태를 의미하는 동시에 이러한 시간을 버티고 버텨야 하는 고통의 과정을 내포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불안하고 어두운 정서는 다른 작품들에서도 이어진다. '죽음과 소녀 2024'는 마리안 스톡스의 '죽음과 소녀'를 차용했다. 도수진은 마리안이 그린 검은 날개와 검은 의상을 입은 저승사자를 담배를 피우며 선글라스를 쓴 사슴벌레로 탈바꿈했다. 독일 시인 마티아스 클라우디우스가 동명의 시에서 저승사자를 '나는 너의 친구'라고 표현한 데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샤워'와 '일이 끝나면' 등의 작품에서도 우울한 감정을 유쾌하게 풀어냈다. 일이 끝난 소녀가 가죽과 가발을 옷걸이와 거치대에 걸어두고 씻는 모습은 가면을 쓴 채 사회를 살아가는 개개인을 암시한다. 도수진의 작품은 마치 외부에서 가해지는 공격을 심드렁하게 맞이하는 느낌이다. 그는 부조리한 운명을 피하거나 벗어나려고 애쓰지 않는다.
◇박정기의 현대판 문자도
박정기는 조선시대 문자도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했다. 문자도는 글자의 의미와 연관성 있는 고사 등의 내용을 한자 획에 그려넣어 서체를 구성한 그림이다. 이번에 전시한 13점의 회화 모두 올해 작업한 신작이다. 그는 해서체로 쓴 '약(藥)'이라는 문자 안에 정선의 '관폭도'와 '금성평사', '설평기려', '영화환도'의 일부를 그려넣었다. 자연의 고즈넉함이 한결같다. 약(藥)은 '즐거울 락(樂)'에 '풀 초(草)'를 결합한 문자다. 약초를 먹고 즐거운 상태로 되돌아간다는 뜻이다. 박정기가 새겨넣은 정선의 다섯 작품은 일종의 약초로 작용한다. 자연의 고즈넉함이 관람객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거(去)'라는 작품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덴쇼 슈분의 '십우도'를 차용했다. 십우도는 참선의 수행 과정을 10개의 그림으로 나타낸 작품이다. 박정기는 거(去)라는 문자가 갑골문에서 사람이 문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형상화했다는 데 착안했다. '간다' 혹은 '떠난다'라는 의미를 지닌 문자에 깨달음을 얻고자 한 동자승의 수행을 담았다. 이 밖에 '심(心)', '선(禪)', '불(佛)' 등의 문자도에서 조선시대 교훈을 현대적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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