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신촌 '빨간 잠수경'…흉물일까, 예술일까

김다빈 2024. 7. 22.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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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물 유지보수 놓고
작가·건축주 갈등 심화
도시 미관과 예술성 보존 사이
건축주 현대百은 보수 원하지만
작가 "낡아가는 것도 예술" 반대
저작권법 '동일성유지권' 쟁점
작가 의도 주장하면 무시 어려워
건축조형물 곳곳서 저작권 분쟁
사후관리 법규정 등 개선책 시급
22일 서울 창천동 현대백화점 신촌점 앞 광장에 자리한 높이 4m의 조형물 ‘빨간 잠수경’. 2009년 설치된 이 조형물은 유지보수 문제로 건축주와 원작자 간 갈등을 빚고 있다. 최혁 기자


서울 신촌의 상징적 조형물 ‘빨간 잠수경’이 노후화로 인한 유지보수 문제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 건축주인 현대백화점은 보수를 원하지만, 작품의 원작자인 육근병 작가는 ‘낡음도 예술’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29년 전 도입된 건축물 미술품 제도의 사후관리 규정 미비로 해결책을 찾기 어려운 가운데, 매년 800여 개의 새로운 건축 조형물이 설치되고 있어 이런 갈등이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흉물” VS “낡음도 예술”

22일 현대백화점은 “빨간 잠수경 노후화에 따른 유지보수를 제안했지만, 작가 측이 거절했다”고 밝혔다. 육 작가는 ‘낡아가는 것도 하나의 예술’이라는 취지로 유지보수에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빨간 잠수경은 창천동 현대백화점 앞 광장에 있는 높이 4m 조형물이다. 2009년 현대백화점의 후원으로 설치됐다. ‘제2의 백남준’으로 불리는 육 작가의 설치미술 ‘생존은 역사다’ 연작 중 하나다. 15년 동안 자리를 지키며 신촌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지만, 표면 페인트가 벗겨지고 녹이 스는 등 세월의 흔적이 남았다. 낡아가는 조형물을 바라보는 시민 의견은 엇갈린다. 신촌동에 있는 대학을 졸업한 이규진 씨(31)는 “빨간 잠수경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느낌이 인상적”이라고 말했지만, 김모씨는 “담배 자국 같아 보이는 부분들이 흉하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정준모 미술평론가는 “노후화로 인해 경관을 해쳐 대중이 불편해한다면 공공미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대백화점은 유지보수를 원하지만, 작가의 저작권법상 동일성유지권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동일성유지권은 저작자가 자신의 저작물이 본래의 모습대로 활용되도록 할 권리로, 저작물의 변경이나 삭제 시 저작자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박애란 한국저작권위원회 변호사는 “같은 색으로 페인트칠하는 정도의 보수라면 동일성유지권 침해라고 보기 어렵다”면서도 “작가가 ‘낡아가는 게 작품의 의도였다’고 주장하면 무시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빨간 잠수경을 초창기 모습으로 복원하는 게 본질적인 내용의 변경인지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건축미술품 2만 개…저작권 분쟁도↑

이처럼 조형물의 유지보수를 둘러싼 작가와 건축주 간 갈등은 더 늘어날 전망이다. 1995년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가 시행된 이후 매년 700~900개의 미술작품이 설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연면적 1만㎡ 이상인 건축물을 신축·중축할 때 건축주가 의무적으로 건축비의 일정 비율을 미술작품 설치에 사용하거나 문화예술진흥기금으로 출연하도록 한 제도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따르면 전국에 설치된 건축물 미술작품은 2만3904개에 달한다.

조형물 관리를 둘러싼 갈등 사례도 증가하고 있다. 경기 용인시는 2015년 시청광장 개선 계획의 일환으로 설치 조형물을 이전 후 재조합했다. 이에 변숙경 작가가 “동일성유지권 침해”를 주장하며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2020년 서울고등법원은 용인시에 1000만원 지급을 명령했다. 포스코는 서울 대치동 본사 앞에 설치된 조형물 ‘아마벨’이 흉물스럽다는 비판을 받자, 1999년 이전을 계획했으나 작가의 반발로 무산됐다. 결국 포스코는 철거 대신 조형물 주위에 나무를 심는 방법을 택했다. 작가인 미국의 추상화가 프랭크 스텔라가 지난 5월 사망한 후에야 포스코는 작품의 처분을 선택할 수 있게 됐다.

전문가들은 건축물 미술품을 둘러싼 갈등의 근본 원인으로 사후관리 규제 부재를 지적했다. 현행 문화예술진흥법 시행령에는 건축물 미술품의 유지보수, 장소 이전, 변경 조치 등에 관한 구체적인 규정이 마련돼 있지 않아 문제가 되고 있다. 이철남 충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미술작품의 사후관리 정책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저작권 분쟁 예방을 위한 장치를 포함해야 한다”며 “작가로부터 작품의 관리매뉴얼을 사전에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김다빈 기자 davinc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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