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거대 로마 조각상이 거기서 나와···‘천년 뒤 서울’에 대한 ‘빈곤한 상상력’
천년 뒤 북한산 배경으로 거대 로마 조각상
과거·현재·미래가 뒤섞인 시간대
“세계가 점점 동질화”라는 작가 설명
서구중심 세계화에 대한 비판적 성찰 없는
‘빈곤한 상상력’ 아쉬워
1000년 뒤 세상의 모습은 어떨까. ‘6번째 대멸종’이 예견되는 지구온난화의 시대에 1000년 뒤를 상상하는 일은 점점 어려워진다.
미국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 다니엘 아샴은 1000년 뒤를 상상하는데 거침이 없다. ‘상상의 고고학’이라 부르는 콘셉트로 핸드폰, 신발, 카메라와 같이 오늘날 일상에서 사용되는 물건들이 미래에 유물로 발굴된 형태로 제작하거나, 고대 그리스·로마 조각상을 재해석한 조각 등을 선보인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밀로의 비너스’ 조각상을 군데군데 침식되거나, 반투명한 결정체인 방해석이 돋아난 듯한 신비로운 모습으로 만드는 식이다. 말하자면 ‘낡은 것은 새롭게, 익숙한 것은 낡아 보이게’가 아샴의 ‘상상의 고고학’의 방법론인 것 같다. 아샴은 티파니·디올·포르쉐 등 명품 브랜드와 협업이 끊이지 않는 상업적으로 인기있는 작가다.
아샴이 ‘1000년 뒤 서울’의 모습을 상상했다. 서울 송파구 롯데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제목은 ‘서울 3024-발굴된 미래’다. 아샴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대규모 개인전을 위해 신작 2점 ‘3024년 북한산에서 발견된 헬멧을 쓴 아테나’과 ‘3024년 북한산에서 발견된 신격화된 로마 조각상’을 선보였다.
중국 산수화를 연상시키는 배경 사이로 헬멧을 쓴 거대한 아테나 여신상이 보이고, 침식되고 방해석이 돋아난 로마 조각상들이 동굴 너머 계곡 사이에 보인다. 그림을 본 순간 두 가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림에 묘사된 장소가 북한산이라고? 1000년 뒤 북한산에 왜 대형 고대 로마 조각상이 있을까?
제목에 ‘북한산’이라는 단어가 없다면 그림의 배경을 쉽사리 알아채기 어렵다. 절벽 위에 구부러진 소나무 한 그루가 그림 속 장소가 동아시아의 한 산이라는 것을 암시할 뿐이다. 아샴은 인공지능(AI) 등을 이용해 북한산의 이미지를 찾고 자신의 상상력과 결부시켜 작품의 이미지를 완성했다고 한다.
AI의 도움으로 그린 북한산의 모습이 전형적인 동양 산수화의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오리엔탈리즘의 혐의를 벗긴 어렵지만, 북한산이 북한산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굳이 문제삼지 않을 수 있다. 아샴의 그림이 본래 풍경의 사실적 재현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샴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혼재된 시간성을 표현하며, 장소와 시간대가 뒤섞인 가상의 배경을 작품 속에 그려왔다. 함께 전시된 폭 5m가 넘는 대작 ‘숭고한 계곡, 스투바이탈’에선 오스트리아 티롤의 계곡 스투바이탈 풍경을 배경으로 그리스 장군 페리클레스, 비너스 이탈리카 조각상과 함께 스타워즈의 알투-디투와 쓰리피오, 포르쉐 911터보가 그려져 시간과 장소, 문화와 역사가 융합된 세계관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대형 로마 조각상은? 이에 대해 아샴은 지난 11일 롯데뮤지엄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50년 전, 100년 전에 비해 세계가 점점 비슷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롯데뮤지엄 측은 “작가는 미래의 서울, 북한산에서 서양 고대 조각 유물을 발견한다는 허구적 스토리와 상황을 담아 한국 관람객을 위한 서사를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1000년 뒤 동질화·균질화된 세상의 한국을 배경으로 서구문명을 상징하는 대형 로마 조각을 그린 그림 속에서 한국 관람객이 자신의 자리를 찾고 이야기를 상상하기란 어렵다. 이 그림 속엔 맥락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유럽을 배경으로 그린 로마 조각상과 서울을 배경으로 그린 로마 조각상은 전혀 다른 맥락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데, 그림 속엔 그런 맥락의 차이가 무시된다. 동양적 산수 풍경 속에 작가가 즐겨 그리는 로마 조각상을 그린 뒤 ‘3024 서울’이라고 이름붙였다는 것 이상을 상상하긴 어렵다. 배경만 동양적 산수로 바꾼 ‘설정 변경’에 가깝다.
현재 세계 미술계는 서구 중심의 미술사에서 벗어나 대안을 찾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제60회 베니스비엔날레는 ‘어디든 외국인은 있다’를 주제로 그동안 소외되었던 선주민, 이주민, 퀴어, 여성 작가들에게 무대를 내줬다. 이는 서구 중심의 세계화가 초래한 위기에 대한 반성적 성찰과 맞닿아있다. ‘3024 서울’에선 최소한의 반성적 제스처도 보이지 않는다.
“누구나 쉽게 예술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내 철학이다.”
아샴은 자신의 작품이 상업적이란 비판에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너무 쉬운 상상은 재미가 없는 법이다. 성찰이 없는 자리를 채우는 건 ‘빈곤한 상상력’이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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