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와 해리스가 완성할 미국의 ‘부족 정치’ [정의길의 세계, 그리고]

정의길 기자 2024. 7. 22.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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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 부통령이 2017년 카말라 해리스 상원의원에게 상원 의원 선서를 받고 있다. AP 연합뉴스
미국의 정체성 정치는 양당의 성격도 바꾸었다. 공화당은 중상류층보다는 백인 중하류층에 비중을 두고, 민주당은 정치적 올바름과 이민 출신 유권자 계층을 의식해 해외 군사 개입을 강화하고 있다. 기존의 가치와 노선이 뒤죽박죽된 음울한 디스토피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정의길 | 국제부 선임기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대선에서 하차해, 민주당 후보는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그럴 경우, 역대 어느 대선보다도 대조적인 후보의 대결이 된다.

남성 대 여성, 백인 대 비백인, 부자 대 중하류층, 선주민 대 이민자, 다수자 대 소수자 등 젠더, 인종, 계급 등 모든 측면에서 그렇다. 이런 구도는 보통 흙수저 출신의 성공 이야기로 미화되나, 현재 미국 정치의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는 데 비극이 있다. 인종, 젠더, 종교 등 개인이 가진 집단적 정체성에 호소하는 정체성 정치의 악화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정체성 정치를 ‘부족 정치’라고도 한다.

도널드 트럼프가 정체성 정치의 소산이다. 미국에서 주인이라고 생각하나 사회경제적 쇠락에 분노·좌절하는 백인 중하류층들은 그 책임을 이민자와 비백인들의 약진에 돌리는 트럼프에게 열광한다. 반면, 1980년대 이후 미국의 진보 진영은 대중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운동이 침체하자, 소수자 집단에 주력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인종, 젠더, 종교 등에서 소수자들의 권리와 자유를 옹호하고 이들을 동원했고, 이는 민주당의 선거에서 가장 큰 몫이 됐다. 소수자들의 입장과 권리를 옹호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정치적 올바름’(폴리티컬 커렉트니스)은 진보 진영의 주류 이념이 되다시피 했다. 이는 사회문화적으로 보수적인 비도시 지역의 백인 중하류층들을 더욱 반민주당화했고, 결국 트럼프의 탄생까지 이어졌다.

미국의 정체성 정치가 강화되는 과정은 민주당과 공화당의 성격도 바꾸었다.

이번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채택한 강령을 보면, 공화당의 전통적 의제인 ‘작은 정부’, 즉 이를 위한 재정적자 삭감과 사회보장 축소 등이 쏙 빠졌다. 대신에, “사회보장 및 메디케어(노령자 의료보험)의 삭감 없는 유지를 위한 싸움” 등이 들어가고, 단순히 ‘감세’ 보다는 “노동자를 위한 대규모 감세 및 팁에 무과세”를 선언했다. 해외를 지향하는 전통적인 군비 확장 노선 대신에 “3차대전 예방, 유럽과 중동에서 평화 복원, 그리고 우리 나라 전체에 대한 위대한 아이언돔 미사일 방어망 구축―이 모든 것은 미국에서 제조” 등을 담았다. 그리고 강령 1호는 “국경 봉쇄 및 이민자 침공 저지”다. 공화당이 중상류층에서 백인 중하류층으로 비중을 옮기고, 이들의 우파 대중주의화에 기대고 있다.

민주당은 대외 정책에서 관여와 협상, 타협보다는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명목하에 대결 쪽으로 선회했다. 정치적 올바름에 입각한 당내의 자유주의자들이 해외의 권위주의 정권에 강력히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민자 출신 유권자들을 의식한 것이 크다. 민주당 중진 낸시 펠로시 의원이 2022년 하원의장 신분으로 대만을 방문해, 미-중 대결 위기를 고조시킨 것도 지역구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최대 차이나타운의 유권자들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배경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확장도 그렇다. 1999년 폴란드, 체코, 헝가리 등 동유럽 국가들의 나토 가입 배경에는 당시 오대호 연안의 경합주에서 중요한 폴란드 등 동유럽계 유권자를 겨냥한 클린턴 행정부의 선거 전술이 있다. 애초 클린턴 행정부는 이들 국가의 나토 가입 대신에 ‘평화를 위한 동반자’ 프로그램 참가를 추진했다. 1994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에 기록적인 대패를 당하자, 나토 확장을 선택했다.

빌 클린턴은 1995년 5월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과 만나 “나는 어려운 선거에 직면했다. 위스콘신, 일리노이, 오하이오는 열쇠다. 공화당은 나토 확장으로 이들 주를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나토 확장을 늦추라고 요구하지 마라”라고 말했다. 당시는 국방부에서도 나토 확장에 회의적이었다. 나토 확장이 가시화되던 1997년 11월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폴란드, 체코, 헝가리계 미국인에게서 그들 조국의 나토 가입 약속으로 표를 얻는 것은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일”이라며 “이 멍청한 결정은 나토를 어디로 가는지 누구도 알 수 없는 비탈길로 몰아넣었다”고 비판했다.

이미 트럼프는 이민과 난민, 민주당 정부의 해외 군사 개입을 더욱 쟁점으로 삼으며, 해리스의 후보 등극을 겨냥하고 있다. 해리스와 민주당은 지금까지처럼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라는 명목으로 이 문제들을 넘어갈 수 있을까? 기존의 가치와 노선이 뒤죽박죽된 음울한 디스토피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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