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의 시각] ‘두산매직’, 27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1999년 10월 15일, 사상 최초로 대기업 총수가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하는 사건이 있었다. 2년 전인 1997년 있었던 계열사 간 합병 때문이었다. 당시 한나라당(국민의힘의 전신) 의원들은 두 회사의 합병비율이 불공정하게 책정돼 소액주주들이 피해를 보았다며 재벌 기업 회장을 질타했다.
이때 국감에 불려나갔던 그룹 총수가 바로 고(故) 박용오 전 두산 회장이다. OB맥주와 두산음료의 합병 비율이 문제였다. OB맥주는 3년간 2500억원의 누적 적자를 기록하며 자본잠식에 빠진 부실회사였고 두산음료는 수천억원의 현금 유입이 예정된 우량 기업이었음에도, 합병비율이 시세에 근거해 1대 1.15로 정해졌던 것이다. 당시 주식시장 일각에서는 자산 가치를 기준으로 삼았다면 두 회사 합병비율이 1대 24.5에 육박했을 것이라며, 두산그룹이 양사 합병을 위해 주가를 조작했다는 의혹까지 제기했다.
그로부터 27년이 지난 지금, 두산그룹은 또다시 계열사 간 합병 문제로 도마 위에 올랐다. 이번에는 두산밥캣이다. 두산밥캣은 그룹 내 최고의 캐시카우로 연간 영업이익이 1조원, 순자산이 6조원에 육박하는 계열사다. 알짜 회사다 보니 2021년에 이어 이번에도 두산그룹의 ‘떼었다 붙였다’ 전략의 희생양이 됐다.
두산그룹은 최근 두산밥캣과 두산로보틱스의 시가총액이 5조원대로 비슷하다며 시총을 주식 수로 나눠 교환비율을 1대 0.63으로 정했다. 우량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던 두산에너빌리티의 주주들은 졸지에 캐시카우를 뺏기게 됐고, 두산밥캣 주주들은 보유 지분 절반을 100억원대 적자에 순자산이 4000억원대에 불과한 두산로보틱스 주식과 맞바꾸게 됐다. 우선 두산밥캣을 로보틱스 자회사로 보낸 뒤, 내년 중 두 회사를 합병해 하나로 만들겠다고 한다.
이번에도 입법부는 칼을 뽑아 들었다. 김현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상장법인의 공정한 합병가액 산정 책임을 강화하는 내용의 ‘두산밥캣 방지법’을 발의한 것이다. 여러 모로 기시감이 드는 상황이다.
소액 주주들 사이에선 두산그룹이 이번에도 ‘마법’을 부렸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온다. 이번 지배구조 개편을 통해 그룹 지주사인 (주)두산은 캐시카우 두산밥캣에 대한 간접 지분율을 14%에서 42%로 끌어올릴 수 있게 됐다. 배당금도 그만큼 더 가져갈 수 있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이런 효과를 얻게 됐으니 마법 운운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런 마법이 가능한 이유는 법적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현행 자본시장법 시행령 제176조의5에 따르면, 상장사와 비상장사가 합병할 때는 ‘최근 한 달간 거래량 가중산술평균 종가, 일주일 거래량 가중산술평균종가, 최근 종가’의 산술평균을 상장사의 합병가액으로 정해야 한다. “다만 이 가격이 자산가치에 미달할 경우 자산가치를 합병가액으로 정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지만, 어디까지나 ‘~정할 수 있다’, 즉 선택 사항에 불과하다. 대주주가 자산가치를 무시하고 시장가치만으로 편파적인 합병비율을 정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한 구조다.
대주주가 합병가액을 제멋대로 정하는 걸 방지하겠다며 1997년 증권거래법을 통해 합병가액과 합병 요건 및 절차를 규정하기 시작했는데, ‘~정할 수 있다’는 이 문구 하나 때문에 면죄부만 쥐어준 꼴이 됐다. 이렇게 정해진 합병 비율이 불공정해도 법에서 정한 산식을 따랐다는 이유로 주주들이 합병 무효 소송을 제기해도 구제를 받기 어려운 것이다. 불공정 입증 책임은 원고가 져야 하는데, 회사 내부 정보를 많이 알지도 못하는 소액주주가 이를 입증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시피 한 일이다.
또 이사회가 결정한 합병가액이 ‘회사’가 아닌 ‘주주’에게 손해를 끼쳤을 경우, 주주가 이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거나 배임 혐의를 적용해 고발할 수 있는지 여부도 애매하다. 불리한 합병 비율은 회사 자체의 이익이 아닌 주주의 이익을 해치기 때문에, 이사진이 주주의 이익을 보호할 법적 의무가 없다면 소액주주 입장에선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시가를 이용해 대주주에게 유리한 합병가액을 정하는 관행이 오직 한국에만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미국과 독일, 일본 등 경제 선진국들은 합병가액 산정을 자율에 맡기되 결정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이의 제기 창구를 충분히 열어 놓는 등 공정성을 강화하고 있다.
이는 비단 두산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SK이노베이션과 SK E&S가 비슷한 방식으로 자산 가격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시가만을 토대로 합병가액을 정했고,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SK(주)와 SK C&C도 비슷한 절차를 밟았다. 현대차그룹은 현대모비스의 모듈 및 AS 사업부를 분할해 현대글로비스와 합병시키려 했지만 해외 주주들의 반발에 철회된 바 있다. 우리 증시를 좀먹는 고질적인 병폐가 해결되지 않는 한, 금융당국이 강조하는 ‘밸류업’은 해외 주주들로부터 비웃음만 살 것이다. 제고하겠다던 ‘밸류’가 대주주만의 주식 가치를 의미한 건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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