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쿨파] "지상에는 조용필, 지하에는 김민기"

박형기 기자 2024. 7. 22.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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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 소극장의 상징으로 꼽히는 ‘학전’을 30여 년간 운영하며 후배 예술인을 배출해 온 가수 김민기가 21일 별세했다. 향년 73세. (뉴스1 DB)2024.7.22/뉴스1

(서울=뉴스1) 박형기 기자 = ‘시나쿨파’는 중국 탓이라는 뜻으로, 국제 문제를 다루는 칼럼이다. 그런데 오늘은 좀 일탈을 해 볼 참이다.

한 시대를 상징하는 '싱어송라이터' 김민기가 결국 불귀의 객이 됐기 때문이다.

시대의 명곡 아침이슬, 상록수의 작사·작곡가로만 알고 있던 김민기를 재발견한 계기는 최근 SBS가 제작한 다큐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라는 프로그램이었다.

SBS스페셜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포스터

학전(배움밭), 뒷것 참 단어부터 신선하다. 그의 노랫말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일단 당대 최고의 서정시인이었다.

그는 배움밭을 창단, 스스로를 “뒷것”이라고 칭하며 “앞것”들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이 다큐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음악평론가 강헌의 소개로 당대의 가객 조용필과 김민기가 직접 만났다는 사실이다.

당대 거물의 만남에서 조용필이 아침이슬을 불렀음에도 김민기가 답가를 하지 않자 조용필이 10여 곡의 노래를 내리 불렀다고 강헌은 회상했다.

가수 조용필이 23일 오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가왕 '조용필 데뷔 50주년 기념메달' 공개행사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18.10.23/뉴스1 ⓒ News1 박세연 기자

이처럼 김민기는 자신이 직접 노래하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기금 모금을 위해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는 대중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을 금기시했다.

필자는 ‘친구’라는 노래로 그를 처음 접했다. 그 역시 노래를 아주 잘한다. 저음의 김광석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럼에도 유독 나서는 것을 싫어했던 모양이다.

음악평론가 강헌은 "당시 지상에는 조용필, 지하에는 김민기가 있다는 말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실제 싱어송라이터로서 김민기는 조용필에 버금가는 업적을 남겼다.

슈퍼 울트라 메가 히트송이 있기 때문이다. 80년대를 나란히 수놓았던 노래가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김민기의 ‘아침이슬’이었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남녀노소가 즐겨 불렀다. 특히 당시 학생들은 수학여행을 가면 조용필의 노래를 메들리로 불러 재꼈다.

그런데 아침이슬 또한 남녀노소 모두가 즐겨 불렀다. 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연대생 이한열 열사의 죽음이었다. 그를 위한 장례는 사실상 국민장이었다. 당시 100만 인파가 시청 광장에 모였었다.

5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제37주기 이한열 추모식에서 우상호 (사)이한열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24.6.5/뉴스1 ⓒ News1 김명섭 기자

당시 연세대 학생회장이 우상호 전 의원이었다. 그는 학생들이 가두 행진 중 운동가를 부르면 시민들이 따라 부르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누군가 아침이슬을 부르자 모두 따라 불러 아침이슬을 계속 불렀다고 회고했다.

SBS 다큐에서 김민기는 자신도 그 자리에 있었고, 아침이슬이 불리는 것을 보고 더 이상 내 노래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고, 쑥스러워 대열을 이탈했다고 고백했다.

아침이슬은 전 국민이 부르는 메가 히트곡일 뿐 아니라 진보 진영의 사실상 애국가였다.

김민기는 음악적 업적에서도 조용필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당대의 ‘싱송라’인 것이다.

그런데 조용필이 김민기 옆에도 못 가는 것이 있다. 바로 김민기는 단순한 싱송라가 아니라 사회 운동가였다는 점이다.(조용필을 폄훼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는 농사를 직접 지으면서 농민 운동에 간여했고, 직접 공장에 취업해 노동운동도 했다. 노동자 단체 결혼식을 위한 축가가 그 유명한 상록수다. 이뿐 아니라 그는 야학도 운영했었다. 그는 항상 한국 사회의 음지를 지향했던 것이다.

그는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음지가 어느 정도 없어지자 극단 학전을 창단, 한국 문화산업 역군을 양성해 냈다.

설경구, 황정민, 김윤석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은 물론, 윤도현 등 유명 가수가 모두 학전 출신이다. 김광석은 학전에서 1000회 공연을 했고, 유홍준 교수도 학전에서 한국 문화유산 답사기 강연을 했다.

학전은 한국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한국 문화의 '산실'이었던 것이다.

특히 학전은 당시 연극판에서 처음으로 배우들에게 ‘개런티’를 지급하는 등 혁신적 운영을 했다.

SBS 다큐에 나오는 학전 출신 배우들은 인터뷰에서 이구동성으로 김민기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냥 선생님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존경을 담은 선생님이었다.

단원들은 "선생님보다 돈을 더 받는 단원이 많을수록 선생님은 기뻐하셨다"며 김민기에게 진심 어린 존경을 표했다. 그들에게는 거의 신 같은 존재로 보였다.

학전 스토리의 백미는 학전을 청산할 때 마지막 빚을 김민기가 자신의 유일한 재산인 아파트를 팔아 청산했다는 대목이다.

31일 오후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학전블루 소극장에서 공사 관계자들이 간판 철거작업을 하고 있다. 학전 측은 이날 현판 철거식을 마지막으로 33년을 함께한 종로구 동숭동 터와 작별을 고한다. 2024.3.31/뉴스1 ⓒ News1 민경석 기자

학전 출신으로 성공한 배우들이 우리도 벌 만큼 벌었으니 우리가 돈을 갹출해 빚을 청산하겠다고 하자 김민기가 "내 일"이라며 단호히 거부했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선생님을 넘어 거의 성인 수준이다.

한류가 풍성해질 수 있었던 것은 수준급 문화예술 공연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학전은 내로라하는 문화예술 일꾼을 수도 없이 배출했다. 자신을 뒷것, 후배들을 앞것이라고 부르며 후배를 키운 김민기 덕이다.

수많은 대한민국 엔터 산업의 일꾼을 키워낸 학전의 설립자 김민기는 한류 열풍을 가능케 한 가장 큰, 숨은 공로자일 것이다.

최고 문화 훈장인 금관 문화 훈장은 이런 사람에게 주라고 있는 것일 터이다. 김민기는 은관 문화 훈장까지 수상했다.

sinopark@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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