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딛고, 자유를 향해 달리고 또 달린다

임석규 기자 2024. 7. 22.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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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남녀 두명뿐.

장식도, 장치도 없는 덩그런 무대 위를 둘은 달리고 또 달린다.

경기가 끝나자 두 사람은 또 다른 프로젝트에 도전한다.

쿠헤스타니 연출은 "두 인물이 같은 명분으로 운동했기 때문에 하나의 목소리를 낸다고 생각해 1인 2역을 설정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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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어 연극 ‘블라인드 러너’
이란 여성 인권운동과 유럽 이민 문제 엮어
연극 ‘블라인드 러너’에서 남녀 주인공은 달리고 또 달린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배우는 남녀 두명뿐. 장식도, 장치도 없는 덩그런 무대 위를 둘은 달리고 또 달린다. 페르시아어 연극 ‘블라인드 러너’에서 달리기는 때로 대사보다 더 많은 걸 전달한다. 유럽 여러 연극제에서 화제에 오른 이 작품을 세종문화회관이 싱크넥스트 국외 초청작으로 최근 소개했다. 이란 태생 극작가이자 연출가 아미르 레자 쿠헤스타니가 쓰고 연출했다.

남편은 수감 중인 정치범 아내를 정기적으로 면회한다. 극의 내용을 통해 아내의 신분이 ‘히잡 시위’를 촉발해 수감된 닐루파 하메디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2022년 9월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돼 숨진 22살 마흐사 아미니의 죽음을 에스엔에스(SNS)에 처음 올린 이란 기자다.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는 부부의 대화는 점점 겉돌고 어긋나는데, 남편은 아내의 정치 활동이 원망스럽다. 아내는 그런 남편에게 시위에서 눈을 잃은 젊은 시각 장애인 여성의 달리기를 돕는 ‘가이드 러너’가 되어 파리 달리기 대회에 출전할 것을 권유한다.

파리에서 함께 달리기 위해 리듬을 맞추고 호흡을 다듬는 훈련 과정에서 남편과 시각 장애인 여성 사이엔 유대가 형성되고 묘한 감정이 싹튼다. 경기가 끝나자 두 사람은 또 다른 프로젝트에 도전한다. 프랑스와 영국을 잇는 해저 터널의 첫 기차에 치이지 않도록 자정 무렵 출발해 6시간 안에 38km를 달려 영국에 도착하는 일이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달리기다. 영국에 도착하려는 이민자들의 실제 집단 망명 행로이기도 하다.

페르시아어로 진행되는 이란 연극 ‘블라인드 러너’는 5개의 라이브 카메라를 동원해 관객이 배우들의 세부 표정을 살필 수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1시간 남짓한 연극은 절제하고 응축한다. 등장인물도 셋인데, 배우는 둘이다. 여성 배우가 눈을 뜨면 아내를 연기하고, 눈을 감으면 시각 장애인 여성을 연기한다. 쿠헤스타니 연출은 “두 인물이 같은 명분으로 운동했기 때문에 하나의 목소리를 낸다고 생각해 1인 2역을 설정했다”고 말했다. 닐루파란 실제 여성과 실제 정치 상황을 다루지만 연극은 사실과 허구를 오간다. 5개의 라이브 카메라가 두 배우의 섬세한 표정을 클로즈업하는 연출 기법은 관객의 몰입감을 높여준다. 달리는 두 배우의 거친 숨소리는 연극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연극 ‘블라인드 러너’를 쓰고 연출한 이란 극작가 아미르 레자 쿠헤스타니. 세종문화회관 제공

아내의 정치 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보수적인 남편을 이민자들의 목숨 건 달리기에 동참하도록 한 게 뭘까. 연극에서 개인과 정치를 엮어내는 고리는 달리기다. “개인으로서 투쟁하는 자유는 공동의 성격을 지닐 때 비로소 그 가치가 완성된다.” 쿠헤스타니는 “이런 깨달음으로 작품 초고를 썼다”며 “도쿄 패럴림픽에서 시각장애인 마라톤 선수가 가이드 러너와 함께 달리는 사진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다리 근육을 다칠 정도로 한때 달리기에 몰입했던 그는 말한다. “달린다’는 것은 자유이고, 자유를 속박하는 것에 대한 저항이에요.”

연극은 터널을 지나는 기차의 굉음과 불안한 경적 소리로 막을 내린다. 두 사람은 무사히 영국에 도착했을까. 해피엔딩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판단은 관객 몫이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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