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그늘에서 서사를 읽다

한겨레21 2024. 7. 22.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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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기호의 이야기 사회학]캐릭터가 서사를 압도하는 영웅의 시대… ‘이야기되지 않는 이야기’들의 연대기 만들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가 2024년 7월13일 선거 유세 도중 총격을 당한 직후 지지자들을 향해 주먹을 쥐어 보이고 있다. AP 연합뉴스

한 장의 사진으로 미국 대선이 결정됐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한 총격범의 암살 시도로 총알이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의 귀를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쓰러지지 않고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쥐고 공중을 향해 치켜들었다. 그의 주먹 뒤로 파란 하늘에 성조기가 나부낀다. 두려워하지 않는 지도자의 강인한 모습과 그가 ‘만들 다시 위대해질 국가’(마가·MAGA)의 이미지가 완벽하게 합쳐져 강력한 서사로 다가온다.

한 장의 사진이지만 그냥 한 장의 사진이 아니다. 이 사진에도 연대기가 있다. 다수의 사람은 이 사진을 보며 1945년 미 해병대가 일본 이오섬(이오지마)을 점령한 뒤 성조기를 게시하는 사진을 떠올렸다. 알려진 것처럼 1945년 나흘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미군은 이오섬에서 가장 높은 스리바치산을 장악했다. 성조기를 세우라는 지시에 따라 해병대원 여섯 명이 깃대를 수직으로 세웠다. 그 역동적인 불굴의 이미지가 전달하는 의미도 강력했고 명확했다. “우리는 이겼고 너희는 졌고 이 승리는 돌이킬 수 없다.”

트럼프를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만든 것

이미지는 이미지로서만 강력한 것이 아니다. 이미지는 캐릭터를 통하기 때문에 강력하다. 총격 이후 트럼프의 대응을 두고 사실 이것은 그저 이미지가 만들어낸 ‘신화’라고만 한다면 트럼프에게는 매우 공정하지 못한 해석이다. 저 순간 고개를 숙이며 경호원 사이로 숨었을 정치인이 훨씬 많을 것이다. 상처의 깊고 얕음과 상관없이 바닥에 쓰러졌을 정치인도 많았을 것이다. 조건반사적이건 의식적이건 저 순간 주먹을 불끈 하늘로 치켜든 것은 트럼프이고, 그 순간 트럼프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됐다.

대체 불가능한 존재. 즉 유일무이함은 존재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한 영광이며 각인이다. 우리는 모두 다른 누구로도 대체되지 않는 유일무이한 존재로 살고 싶지 않은가. 물론 우리 모두 누군가에게는 대체되지 않는 존재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러나 절대다수의 사람은 그 사랑하는 사람들의 경계를 넘어가면 대체됨을 넘어 소모품에 불과하다. 세계 전체로부터 대체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건 사실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영웅 신화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영웅이야말로 대체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토르의 망치를 생각해보자. 아무나 그 망치를 들 수 없다. 선택받은 자 혹은 자격 있는 자만이 가능하다. 그렇기에 그 망치를 드는 자는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지 않는다. 설령 다른 사람이 그 망치를 들더라도 그를 대체한 게 아니다. 영웅의 뒤를 잇는 또 다른 영웅의 등장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 사진을 보며 1945년 미 해병대가 이오지마를 점령한 뒤 성조기를 게시한 사진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위키미디어 제공

트럼프가 영웅적인 모습을 보여줬음은 분명하다. 이를 쇼맨십이니 뭐니 하는 말로 부정할 수는 없다. 저 순간 저런 모습을 취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저 모습에는 그가 살아온 삶의 역사와 태도가 반영됐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저 사진의 서사는 그 이후에 나온 것이다.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신화적 서사가 캐릭터에 앞선 것이 아니라 캐릭터가 있기에 이미지가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 다시 강조하겠지만 그가 엎드리거나 누웠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서사다.

더구나 공교롭게도 이 이미지를 통해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존재로 각인된 트럼프의 모습은 승리를 위해 ‘대체’를 강력하게 요청받고 있는 조 바이든 대통령과 정확하게 대비를 이룬다. 지난 토론과 그 이후 기자회견에서 바이든이 보여준 모습은 그를 대체할 사람이 없다는 게 아니라 그가 대체돼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대체될 수 없는 자의 모습을 보여줘야 할 자리에서 대체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오는 자체가 이미 치명적이다. 대체될 수 없음을 보여준 자와 대체돼야만 한다는 요구를 받는 자 사이의 승부가 어떨지는 너무 분명하다. 민주당의 고민이 깊어질 것이다.

‘조작 음모론’에 기대하는 대신에

그렇다면 트럼프가 영웅적 모습을 보였다는 것, 그것을 인정하는 것 말고 다른 할 일은 없는가? 아마 이 지점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멍청한 짓은 그가 보인 모습이 영웅이 아니라고 극구 부정하는 지질한 모습을 보이거나 혹은 조작이라느니 뭐니 하는 음모론에 기대는 것일 테다. 다행히도 민주당의 고위급 정치 자문을 맡은 사람이 이런 음모론이 넘쳐흐르는 것에 바로 사과했다고 한다.

그보다 나은 일이 있다. 그의 영웅적 면모는 긍정하면서 바로 그 영웅적 캐릭터에 의해 가려지는/곁에 설 수 있는 서사가 무엇인지를 읽어내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읽기’의 힘과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읽기’는 캐릭터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캐릭터에 휘둘리지 않고 그에 의해 끌려나오는 텍스트에 주목한다. 읽기의 대상이 되는 것은 텍스트-서사이며 나아가 텍스트-서사와 캐릭터의 관계다. 지금은 서사가 캐릭터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가 서사를 압도하는 시대다.

영국의 문화이론가 스튜어트 홀이 말한 것처럼 독해에는 세 가지 수준의 ‘읽기’가 있다. 첫 번째는 지배적 독해다. 이것은 이미지-서사를 만든 사람이 의도한 방식대로 내포된 의미를 따라가며 독해하는 것이다. 이런 독해는 순응적 독자, 때에 따라서는 순응을 넘어 순종하는 독자를 만들어낸다. 이 독자들은 이미지/텍스트와 자기 사이에 아무런 거리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거리가 없기 때문에 이들이 읽은 것은 읽었다고 말할 수 없다. 이들로부터 나올 수 있는 말은 주어진 말일 뿐이다. 한나 아렌트가 간파한 대로 말하면 이들의 말은 진부한 말이며 무사유의 말이다.

두 번째 독해는 타협적·협상적 읽기다. 사실 스튜어트 홀에 따르면 모든 읽기는 협상적이다. 완전히 저항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내포된 의미에 완전히 순응하는 지배적 읽기도 아니다. 이야기를 생산하는 자와 수용하는 자 사이에는 간극과 긴장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세 번째로 저항적 읽기가 있다. 생산자에 의해 이미지/텍스트에 내포된 의미를 완전히 뒤집어 읽는 방식이다. 일상적으로는 몇몇 전위적인 사람이 이렇게 읽지만, 특정한 때가 되면 대중 전체가 전복적 독해를 한다. 그때가 ‘혁명’의 시간이 되는 경우가 많다.

영웅 옆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

그러나 감히 말하자면 이런 ‘읽기’는 눈앞에 있는 텍스트에만 주목한다. ‘깊이 읽기’는 지금의 텍스트와 (비평적 읽기의 근간이 되는) 콘텍스트만이 아니라 이 텍스트를 어떤 텍스트의 옆에 놓을지 고민한다. 깊이 읽기는 텍스트에서, 그리고 텍스트 때문에 말해지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그 말해지지 않는 것을 말하는 행위다. 발터 베냐민의 사유를 빌려 말한다면, 그 ‘영웅’이 처한 ‘비상상태’ 옆에 언제나 예외(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일상인 사람들의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를 곁에 둠으로써 비상(예외)상태의 연대기를 드러내는 것, 그 연대기가 서사이며 그것의 발화가 읽기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금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전세계 언론이 정치 지도자 한 명의 피격에 대해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정작 그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떠오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영웅’의 이야기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대비하는 것은 캐릭터가 서사를 압도하는 시대에 그런 캐릭터가 ‘될 수 없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통해 동시대를 질문에 부친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지금 우리가 ‘서사’를 읽는 때인지 영웅이라는 ‘캐릭터’에 압도되는 때인지를 말이다.

그런 점에서 동시대는 명백히 캐릭터가 서사를 압도하는 시대다. 어느 시대나 서사를 압도하는 영웅은 나타나고, 그 영웅에게 대중은 열광한다. 영웅의 본래적 의미가 서사를 압도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영웅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 기댈 수 있는 것은 그들을 대변하고 대표하는 영웅을 고대하고 맞이하는 게 아니라 영웅(의 시대)에 맞서는 ‘서사의 시대’를 다시 여는 것이다.

트럼프의 ‘영웅적 면모’는 긍정하면서도 바로 그 영웅 캐릭터 탓에 가려지는 서사가 무엇인지를 읽어내는 일이 가능하다. 사진은 2024년 7월16일(현지시각)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중부 누세라이트 빈민촌에서 한 소년이 이스라엘군 공격을 받은 학교에서 물품을 치우는 모습. 신화 연합뉴스
아룬다티 로이의 <9월이여, 오라> 표지. 녹색평론 제공

영웅에 맞선 서사의 힘을 보여준 대표적인 예로는 부커상 수상자인 아룬다티 로이의 <9월이여, 오라>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이 짧지만 강렬한 글에서 전세계를 경악에 몰아넣은 9·11테러가 얼마나 끔찍한 인류사적 사건이었는지에 대해 전혀 부정하지 않는다. 그보다 더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며 9·11을 상대화하는 것도 아니다. 대신 그는 9·11테러가 일어난 그 9월에 얼마나 많은 불의와 사건과 저항이 있었는지를 하나하나 꺼낸다. 그럼으로써 그는 9·11의 연대기를 완전히 다시 쓴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에 맞서는 연대기에 9·11을 훼손 없이 그 위치로 돌려준다. 이를 통해 9·11은 잊힌 자신의 자매형제들과 함께 있게 된다. 저 홀로만 선 존재가 아니라 형제자매를 발견하고 그 곁에 같이 서는 것, 이것이 서사가 아니면 무엇이 서사이겠는가?

서사의 디테일은 연대기에 있다

계원예술대에서 학생들에게 고전문학을 어떻게 콘텐츠화할지 가르치는 강사 고동균이 이야기한 것처럼 서사의 디테일이란 바로 이 연대기에 있다. 캐릭터에 압도당하는 것이 아니라 압도당한 서사의 연대기를 다시 세우는 것이 바로 ‘읽기’의 의미이며 힘이다. 읽기란 영웅적 캐릭터가 압도하며 제시하는 서사를 신화로 치부하며 그것을 저항적 독해를 따라 해체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 곁에 이야기되지 않은 이야기, 그 이야기들의 연대기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우리’가 그 곁에 세울 만한 ‘이야기되지 않은 이야기’를 충분히 들었다면 말이다. 정치 공동체, 특히 민주주의 정치 공동체의 운명이 이 연대기를 새로 쓸 줄 아는 ‘읽는(읽을 수 있는) 존재’에게 달려 있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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