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 빼고 생활 녹여… ‘슬기로운 여장 연기’
실직하고 여성 변장한 파일럿
재취업후 겪는 ‘소동극’ 그려
일상 속의 성차별 언행 지적
“특정 성별 희화화하지 않고
관객에 자연스러운 웃음 건네”
따지고 보면 ‘여장 남자’ 캐릭터는 매우 익숙한 설정이다. ‘미세스 다웃파이어’(1994)·‘화이트 칙스’(2004)·‘헤어 스프레이’(2007) 등 그동안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수없이 등장했다. 보통은 코미디의 소재로 활용됐다. 여성으로 변장한 남성이 맞닥뜨리는 황당한 상황에서 폭소가 터졌다. 따라서 애초부터 치밀한 개연성을 찾긴 어렵다. 주변 모두가 ‘여장 남자를 알아채지 못한다’는 판타지에 동참한다는 전제하에 저항 없이 웃음을 즐기는 것이다. 하지만 배우 조정석이 주연을 맡은 영화 ‘파일럿’(감독 김한결·31일 개봉)은 좀 달라 보인다.
◇남성성을 감추지 못하는 주인공의 소동극
주인공 한정우(조정석 분)는 공군사관학교를 수석 졸업한 유능한 파일럿이다. 웬만한 연예인을 뛰어넘는 SNS 팔로어를 보유해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섭외된다. 하지만 회식 자리에서 승무원을 ‘꽃’에 비유한 발언이 담긴 녹음 파일이 공개되면서 실직하고, 아내에게 이혼 통보를 받는다. 판판이 재취업에 실패한 그는 여동생 한정미의 신분을 도용해 여성 파일럿으로 한 항공사에 들어가게 된다.
이때부터 ‘파일럿’은 소동극의 형태를 띤다. 여성처럼 화장했지만 치마를 입고 은연중 ‘쩍벌’ 자세로 앉고, 저녁이 되면 푸르스름한 수염이 화장 위로 올라온다. 가슴 보형물이나 남성의 목소리가 툭 튀어나오는 전형적인 장면도 있지만 이를 자연스러운 스토리 흐름 속에 녹여 ‘억지웃음을 강요한다’는 거부감을 지운다.
스웨덴 영화 ‘콕피트’(2012)를 리메이크했지만, ‘파일럿’은 웃음 속에 한국적 정서를 골고루 심었다. 남성들이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던지는 농담이 폭력일 수 있다는 것이 여장한 한정우의 시선으로 부각되는 한편, 무작정 여성 비중을 높이겠다는 고용 방침이 역차별이 될 수 있다고 일깨운다. 또한 남녀 갈등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메시지도 심는다. 하지만 이는 하나의 장치일 뿐, ‘코미디’로서 장르적 쾌감에 집중하며 ‘파일럿’은 한 우물을 판다. 데뷔작인 ‘가장 보통의 연애’(2019)에서 아슬아슬한 성담론을 절묘한 웃음으로 승화시킨 김한결 감독의 솜씨는 여전하다.
◇조정석標 코미디의 핵심? ‘억지’ 걷어낸 생활 연기
‘파일럿’에서 한정우와 한정미를 동시에 연기하는 조정석은 이 영화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한정미가 되기 위해 7㎏을 감량하고 여성 속옷까지 챙겨입은 조정석의 옷맵시는 그럴싸하다. 그는 “옷 입으면 1단, 화장하면 2단, 가발 쓰면 3단 변신이 완성된다. 3단 변신 후 모습은 내가 봐도 예쁘더라”라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조정석표 여장 남자의 모습이 대중에게 익숙하다는 것도 ‘파일럿’에 접근하는 문턱을 낮추는 요인이다. 그는 드래그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뮤지컬 ‘헤드윅’을 수년간 책임지며 ‘뽀드윅’(얼굴이 뽀얀 헤드윅)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여성스러운 동작과 말투는 이미 조정석의 전매특허다. 그는 “많이 해왔기 때문에 여장 남자에 대한 부담감은 전혀 없었다”면서 “‘헤드윅’은 성전환수술에 실패한 사람이지만 한정미는 한정우가 연기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제 목소리의 음역대를 높여 연기하려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파일럿’의 화룡점정은 단연 조정석의 능청스러운 코미디다. 그의 희극 연기는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출세작인 ‘건축학개론’은 그가 남녀의 키스를 “X나 비벼”라며 온몸으로 표현하던 ‘납득이’로 기억된다. 속옷 차림으로 머리에 무스를 바르는 백수를 연기한 ‘엑시트’(2019)는 942만 관객을 홀렸다. 진지한 사극인 ‘관상’(2013·913만 명)에서도 특유의 춤사위로 웃음을 이끌어내며 작품의 완급을 조절했다.
조정석표 코미디의 타율이 높은 이유는 ‘웃음을 위한 웃음’을 지양하기 때문이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생활감’ 있는 연기에 집중한다. 고 로빈 윌리엄스의 ‘미세스 다웃파이어’가 돋보였던 이유는, 경제력은 없지만 아이들은 끔찍하게 사랑하는 아빠가 그들 곁에 있고 싶어 여성 가정부로 분해야 했던 상황이 주는 당위성이 컸기 때문이다. 가장으로서 역할을 다하기 위해 다시 파일럿이 되려 여장을 하게 되는 한정우를 연기하는 조정석의 노력과 몹시 겹친다.
그는 “어릴 때 정말 좋아했던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미세스 다웃파이어’를 떠올렸고 연기할 때도 참고했다”면서 “감독이 생각하는 코미디의 경중(輕重)이 나와 잘 맞았다. 여성을 희화화하거나 억지로 웃기려고 연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안진용 기자 realyo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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