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노동이사제의 후퇴…정치 논리 밀려 정원 ‘반토막’

기민도 기자 2024. 7. 22.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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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3일 서울시의회에서 서울시 노동이사제 운영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이 재적 62, 찬성 45, 반대 16, 기권 1명으로 통과되고 있는 모습. 서울시의회 영상 회의록 갈무리.

“노동자가 감히 회사 경영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게 싫은 거죠. 그러니 법이 정한 노동이사를 ‘강성노조 프락치’로 매도하면서 어떻게든 밀어내려고 하는 겁니다.”

서울의료원 노동이사를 지낸 박경표씨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는 한겨레와 이야기하는 내내 “여당 시의원들로부터 일방적으로 매도당한 억울함”을 격정적으로 토로했다. 그가 노동이사로 활동하며 일궈낸 성과는 스스로 생각해도 ‘멋진’ 일이었다. 30명 남짓한 서울의료원 조리원들은 한여름에도 에어컨 없는 고온의 주방에서 일했다. 매년 에어컨 설치를 요구했지만, 부서 간 협업이 원활하지 않아 진척이 없었다. 박경표 노동이사는 조리원 간담회에서 이 사실을 파악하고 영양팀, 기획처, 시설관리팀 담당자를 소집했다. 그는 “노동이사는 경영진이기 때문에 예산·시설 부서 담당자를 불러 에어컨 설치 예산을 확보하고 일을 진척시킬 수 있었다. 조리원들 근로환경이 좋아지면 환자들이 먹는 음식 질도 높아질 텐데 예전엔 왜 그게 잘 안됐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지난 5월3일 국민의힘이 주도하는 서울시의회는 “노동이사가 민주노총의 편향된 목소리만 대표한다”며 34명의 서울시 산하기관 노동이사 정원을 17명으로 줄이는 ‘서울시 노동이사제 운영에 관한 조례 일부 개정 조례안’을 일방 처리했다. 직원 수가 ‘300명 이상 1000명 미만’인 기관은 2명이던 노동이사 정원을 1명으로 줄이고, 300명 미만인 기관은 아예 없애는 내용이었다. 2016년 전국에서 처음 조례로 제정되면서 공공기관 노동이사제 도입의 마중물이 됐던 서울시 노동이사제가 정치 논리에 밀려 퇴행하는 순간이었다. 서울시 산하기관 노동이사들은 “시의회가 노동이사제를 너무 편협하게 본 것”이라고 반발했다. 오근우 전 서울주택도시공사(SH) 노동이사는 “서울시 산하기관 노동이사는 전 직원의 투표로 선출한다. 게다가 우리 기관 노조에는 상급단체도 없다”며 허탈해했다.

실제 노동이사들의 활동 내용을 살펴보면 이들이 노조 입장만 대변했던 것도 아니다. 서울교통공사 노동이사 2명은 지난해 11월23일 임시이사회에 올라온 ‘기후동행카드 시범사업 도입안’에 찬성했다. 당시 노조원들은 오세훈 서울시장의 핵심 사업인 기후동행카드에 대해 ‘매달 26억원의 적자가 예상되는 만큼, 구조조정이 가속화될 수 있다’는 이유로 부정적이었다. 노기호 당시 노동이사는 “당시 이런 현장의 목소리를 이사회에 정확히 전달하면서도 탄소중립이라는 대의에 동의해 찬성 입장을 냈다. 국민의힘 시의원들이 이런 사정을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노동이사가 서울시장이나 소속 기관장보다 기관의 재정 상황을 더 걱정하기도 한다. 오근우 전 서울주택도시공사 노동이사는 2021년 임기를 시작한 뒤 공사가 임대료 부문에서 연간 4천억원의 적자를 보고 있다는 데 문제의식을 느꼈다. 그는 “서울시장과 공사 사장은 자기 임기 동안 임대료를 올리는 게 정치적으로 부담되기 마련이다. 그러니 2004년 이후 19년 동안 임대료를 딱 한번밖에 안 올렸다”고 했다. 오 전 이사는 서울주택도시공사의 특정 지역 임대료 수준이 같은 공공주택 사업을 하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43%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데이터를 통해 확인했다. 그는 이 문제를 이사회에서 꾸준히 제기했고, 결국 2023년에 5%를 인상(약 180억원)하게 됐다. 그는 “3년 임기인 상임이사들보다 회사를 오래 다닐 사람은 기관 소속 노동자들”이라고 했다.

서울의료원과 서울주택도시공사, 서울교통공사 등 4개 기관은 직원 수가 1000명 이상이라 이번 조례 개정으로 타격을 받지 않는다. 문제는 서울문화재단 등 정원이 300명 미만인 기관에선 앞으로 노동이사를 선출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2026년 2월 임기가 끝나는 강득주 서울문화재단 노동이사는 “노동이사가 더 필요한 것은 노조가 약하고 직원 수가 적은 기관들인데, 이런 기관들부터 없어지게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서울시의 노동이사제 후퇴는 다른 지방자치단체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김재욱 전국공공기관노동이사협의회 의장은 “인천과 충남에서 노동이사의 활동 권한을 강화하는 조례 개정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서울시 움직임을 본 뒤 추진하지 않기로 했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지방정부의 노동이사제가 중대 고비를 맞고 있다고 진단했다. 노광표 전 서울시투자출연기관 노사정협의회 위원장은 “조례의 한계에 얽매인 이 시스템에 법적 뒷받침을 할 필요가 명확해진 것”이라며 “지방정부 노동이사제를 상위 법률로 제도화하기 위해서는 정치권의 관심은 물론 노조와 노동이사들 스스로 노동이사의 구실과 권한을 명확히 하려는 연구와 논의를 지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민도 기자 ke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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