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詩 읽기] 이토록 푸르뎅뎅한 시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비 오신다.
긴 긴 장마다.
어릴 땐 장마가 싫었다.
장마 지면 비를 피한다는 핑계로 어느 산장 같은 곳에 숨어, 한 사나흘 틀어박혀 있고 싶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비 오신다. 긴 긴 장마다. 어릴 땐 장마가 싫었다. 더운 것만으로도 고단한데 축축해지기까지 해야 하다니 심통이 났다. 언제부터일까? 갇히는 것 중 제일은 빗속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됐다. 장마 지면 비를 피한다는 핑계로 어느 산장 같은 곳에 숨어, 한 사나흘 틀어박혀 있고 싶다. 벽난로 앞에 젖은 양말을 널어두고, 질릴 때까지 빗소리를 듣다 졸고 싶다. 꿈같은 일일까?
눅눅한 빨래를 개다 ‘장마’의 첫 구절을 돌림노래 외듯 흥얼거린다. “공작산 수타사로 물미나리나 보러 갈까” “구죽죽 비는 오시는 날”……. 듣는 이가 없어도 괜찮다. 그저 내리는 비에 대고 흥얼거릴 뿐이다. 그런데 공작산 수타사는 어디쯤에 있는 절일까? 그곳의 물미나리·패랭이꽃은 얼마나 싱싱할까? 시 속 화자를 따라 수타사 요사채 아랫목에 앉아 젖은 발을 말리며 옥수수나 먹고 싶다. 비 맞아 짙어진 산을 내다보며 이 시에 나오는 오종종한 명사들, 괜히 수첩에 따라 적어보고 싶다. 물푸레·함박꽃·민화투·장마… 단어들을 어여삐 여기고 싶다.
내가 아는 시인 김사인은 며칠은 꼼짝 않고 물미나리·패랭이꽃 구경에 마음을 둘 수 있는 사람이다. 누구도 보지 않는 작고 귀한 것을 찾아내, 쓰다듬듯 한사코 눈길을 주는 사람이다. ‘장마’라는 제목으로 이토록 푸르뎅뎅한 시를 쓸 수 있는 사람도 그뿐이다. 가까운 절에라도 찾아가 빗물에 마음을 헹구고 싶어지는 날이다. 그나저나 그칠 기색 없이 내리는 장맛비에 피해를 입는 사람이 없어야 할 텐데. 비는 구경에 좋을 정도로만 오시길.
박연준 시인
Copyright © 농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