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수염 부통령’ 95년 만에 등장하나
지난 15일 미국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 J.D. 밴스(Vance)에게는 40세라는 어린 나이만큼 이목을 끄는 특징이 하나 더 있다. 코 아래와 턱을 덮고 있는 빽빽한 수염이다. 뉴욕타임스(NYT), 워싱턴포스트 등 미 주요 매체들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수염을 싫어하는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밴스가 부통령 후보로 낙점될 거라고 예측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며 “밴스 지명으로 미국에서 76년 만에 수염을 기른 부통령 후보가 등장했다”고 했다.
1944년과 1948년에 콧수염을 기른 토머스 듀이가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대선에 출마했다가 두 번 모두 낙선한 이후로는 대통령·부통령 후보 중 수염을 기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수염을 길렀던 마지막 부통령은 1929년 허버트 후버의 러닝메이트로 당선된 찰스 커티스다. 수염을 길렀던 미국 대통령을 찾기 위해선 1908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해 대선에서 승리한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대통령이 긴 콧수염을 길렀다.
왜 현대 정치인들은 수염 스타일을 기피할까. 대중이 원하는 깔끔하고 진취적인 정치인 상(像)과 잘 맞지 않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복장 연구자인 리처드 포드 스탠퍼드 교수는 NYT에 “역사적으로 면도한 얼굴은 도시적 면모와 단정함의 상징이었다”며 “수염은 전원 생활, 노인, 반(反)문화 같은 이미지와 연결되는데 이 중 유권자에게 대중적으로 호소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설명했다. NYT는 “밴스의 (수염) 스타일은 현대 정치의 통념을 뒤엎고 오랜 정치적 금기를 깨뜨린 것”이라고 했다.
수염을 부정적으로 보는 인식은 정치권에 국한되지 않는다. 일례로 미 프로야구 명문 구단 뉴욕 양키스는 장발과 텁수룩한 수염을 금지한다. 잘 정돈된 콧수염 외에 입술 아래쪽으로는 수염을 허용하지 않는 ‘외모 규정’이 1976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무절제하고 관리되지 않은 모습을 관중에게 보여줄 수 없다는 이유다. 턱수염이 트레이드마크였던 선수들도 양키스에 입단하기 위해 말끔하게 면도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밴스는 수염을 자신의 고유한 특징으로 잘 활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자칫 아이 같아 보일 수 있는 동그란 얼굴형을 가리고 남성적인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연출했다는 것이다. 또 수염에 거부감을 가질 가능성이 높은 스윙 보터(부동층)보다는 남성적인 터프함을 강조하는 강성 트럼프 지지층 ‘매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에 호소하기에도 좋은 전략이라는 분석이다.
회고록 ‘힐빌리의 노래’로 2016년 처음 대중 앞에 등장했을 때 밴스의 턱에는 수염이 없었다. 2021년 상원 의원 선거에 뛰어들 때부터 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 전까지 벤처 투자자로 활동하며 전형적인 실리콘밸리 화이트칼라(사무직) 패션을 선보였던 밴스의 스타일이 ‘트럼프 판박이’로 변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과거엔 가벼운 재킷이나 체크무늬 셔츠, 청바지처럼 실용적인 옷들을 주로 입었고, 정장을 입더라도 밝은 색을 선택하곤 했다. 그러나 상원 의원 출마 이후로는 트럼프식 ‘파워 수트’ 패션으로 점점 변해갔다는 평가다. 넉넉한 사이즈, 넓은 옷깃, 빳빳한 어깨 패드, 어두운 색 정장, 순백의 셔츠, 트럼프의 트레이드 마크 붉은색 넥타이가 특징이다. 미 정치 매체 폴리티코는 “자신이 과거에 취했던 반(反)트럼프 입장을 철회하고 트럼프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한 변신으로 보인다”라고 분석했다.
수염을 통해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또 다른 정치인으로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있다. 2022년 2월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 전에는 젤렌스키도 수염이 없었다. 수염을 통해 강인하고 고독한 전사(戰士)의 이미지를 연출, 결사 항전의 메시지를 전하고 국민을 하나로 묶는 데 적절한 효과를 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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