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트럼프의 입과 정치 폭력
뻔한 인물들의 재대결 구도였던 미국 대선이 예상치 못했던 파란만장한 전개를 보여주고 있다. 지난 13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유세 현장에서 총격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미국 대통령이나 대선 주자가 암살당한 사례는 흑인 민권, 베트남전 등을 둘러싸고 갈등이 극에 달했던 1968년 로버트 F 케네디 전 상원의원이 마지막이었다. 암살 미수 사례도 1981년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가장 최근의 일이다. 43년 만에 대권 주자에 대한 암살 기도 사건이 벌어진 셈이다.
총격 사건 이후 조 바이든 대통령은 “통합은 가장 이루기 힘든 목표지만 지금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분노와 증오의 언행을 삼가달라고 당부한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이같이 호소한 건 정치 이념에서 비롯된 폭력이 미국을 좀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일지 모르겠다. 그간 미국에선 대상이 대통령이 아니었을 뿐 정치 폭력 사건이 빈발했다.
개브리엘 기퍼즈 전 연방 하원의원(민주)은 2011년 1월 유권자들과 만나던 중 무장괴한이 쏜 총탄을 머리에 맞고 중상을 입었다. 현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인 스티브 스컬리스 의원은 2017년 동료 의원과 야구 연습을 하다가 총격을 당했다. 2022년엔 괴한이 낸시 펠로시 당시 하원의장(민주) 집에 침입해 그의 남편을 둔기로 가격했다. 2021년 1월6일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의회 의사당에 난입한 것도 유명한 사건이다.
정치 폭력의 피해자가 일반 시민이라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도 부지기수다. 지난해 8월 로이터통신 보도를 보면 오하이오주에 사는 한 공화당 지지자는 이웃이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 같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말다툼하다가 결국 그를 총기로 살해했다.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상대방에게 화가 날 수는 있다. 그러나 분노를 폭력적 행위로 표출하는 것은 차원이 전혀 다른 얘기다. 로이터는 분노가 실제 폭력으로 거리낌 없이 격화하기 시작한 시기가 2021년 의회 난입 사태와 무관하지 않다고 봤다. 로이터는 2021년 의회 난입 사태 이후 약 2년간 발생한 정치 폭력 사건이 최소 213건이며 최소 39명이 사망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 중에서도 살인 등 중범죄 18건을 분석한 결과 가해자 13명이 보수 우익 성향이었고, 좌익 성향은 1명에 그쳤다. 나머지 4명은 미국 정당과 관계가 없었다.
메릴랜드대 범죄학자 게리 라프리 교수도 1960~2020년 정치 폭력 사건을 분석해 로이터 기자들과 비슷한 결과를 얻었다. 그에 따르면 정치 폭력 사건은 1960년대 후반부터 10년간 급증하다가 1980년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고 1990년대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2016년 이후 또다시 뚜렷한 증가세를 보였다. 2016년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처음 대선에 도전, 집권한 해다.
물론 트럼프 전 대통령의 선동적인 발언이 정치 폭력 증가로 이어졌다는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두 현상이 무관하다고 주장하기도 어렵다는 게 미국 언론인들의 인식인 것으로 보인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프렌치는 이번 총격 사건 이후 “트럼프가 제창한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운동의 신봉자들이 트럼프 반대자들을 위협하고 있다”며 “미국인들은 긴장이 고조되고 있음을 뼛속 깊이 느낄 수 있다. 과열된 정치적 발언이 우리를 서로 적대하게 만든다”고 썼다.
미 정치인들은 총격 사건이 갈등과 대립을 반성하고 통합으로 나아가는 전환점이 되길 소망한다. 익명의 시민들에게 여러 차례 협박당했던 제러미 모스 상원의원(민주)은 “정치 스펙트럼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트럼프를 비껴간 총알이 우리를 구원했다’고 말하게 되길 바란다”고 했다. 이 염원은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닿지 못한 듯하다. 그는 지난 18일 공화당 전당대회 연설에서 펠로시 전 하원의장이 “정신이 나갔다”고 비난했고 바이든 정부를 공격했다.
미국의 저명한 칼럼니스트가 트럼프 1기 행정부를 러시안룰렛(목숨 건 내기)에 비유한 적이 있다. 미국이 한 차례 러시안룰렛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두 번째 시도(트럼프 2기)에서도 무사하리라는 것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해 지지자를 선동하고 정적을 맹렬히 비난하며 민주주의 근간을 흔들려고 시도한다면 미국의 정치 폭력은 지금보다 더 크고 무서운 들불이 될지도 모른다.
최희진 국제부장 dai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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