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산책]행주대첩 전부터 행주치마는 있었다
우리말과 관련해 많은 민간 유래담이 전한다. 이들 유래담은 현대어와의 유사성이나 어떤 지명 또는 사물의 이름과 흡사한 점을 근거로 들고 있어 꽤 그럴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를 살피고 언어의 변천을 따지면 그냥 우스갯소리로 흘려들어야 할 것들이 많다.
‘행주치마’의 유래담도 그중 하나다.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행주산성 싸움은 군과 민이 하나가 돼 외적의 침략을 막아낸 위대한 승리였다. 특히 부녀자들이 허리에 앞치마를 두르고 돌을 나르며 적과 맞서 싸운 일은 역사서에도 기록돼 있다. 이를 근거로 “부엌일을 할 때 옷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덧입는 작은 치마”를 가리키는 ‘행주치마’가 ‘행주대첩’에서 유래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하지만 이는 낭설이다. 행주대첩이 벌어진 해는 1593년인데, 그보다 66년 전인 1527년에 최세진이 지은 <훈몽자회>에 이미 ‘행주’의 고어가 적혀 있기 때문이다. ‘행주산성에서 행주치마가 유래한 것이 아니라 행주치마로 인해 행주산성으로 불리게 됐다’는 설 역시 전혀 신빙성이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행주라는 지명은 고려 초기부터 있었다”고 기록돼 있는 까닭이다. 결국 행주산성과 행주치마는 언어학적으로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행주산성에서 부녀자들이 행주치마를 두르고 싸운 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다.
행주치마의 어원에 대해 학계에서는 절에서 음식 공양을 하는 행자들이 두르던 치마, 즉 ‘행자치마’가 ‘행주치마’로 변형된 것으로 본다. “그릇과 밥상 따위를 닦거나 씻는 데 쓰는 천 조각”을 뜻하는 말을 경상도에서 ‘행자’라고 부르고 평안북도에서는 ‘행지’로 부르는 등 발음이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 이러한 견해에 설득력을 더한다. 지명에서 유래했다면 지역 방언이 다양하게 만들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편 행주를 만드는 데 쓰는 천 조각을 뜻하는 말은 ‘헝겊’이다. 낡고 해진 천을 의미하는 ‘헌것’에서 유래한 말로, 옛 문헌엔 ‘헝겇’ ‘헝겁’ 등 다양한 형태가 보이지만 현재는 ‘헝겊’만 표준어로 삼고 있다.
엄민용 <당신은 우리말을 모른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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