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소리] 너가 아닌, 오직 나를 위해

김동현 미스터동 대표 2024. 7. 2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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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미스터동 대표

얼마 전, 프랑스 브랜드의 값비싼 티셔츠 한 장을 샀습니다. 얇은 티셔츠 한 장에 17만 원이나 줬는데요, 제게는 과소비였습니다. 하지만 ‘아깝다’는 생각보다 ‘드디어 나도 이런 걸 구비하는구나’라며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힘들게 번 돈을 사실상 허망하게 썼는데 말이죠. 요즘에 다들 그렇게 사 입고 다니니,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라고 여겼습니다.

이윽고 저는 그 옷을 입고 동창회에 나갔습니다. 친구들이 ‘티셔츠 하나를 입어도, 비싼 걸 입고 다니는 녀석’으로 저를 보길 내심 바랐습니다. 2008년 그랜저 TV 광고 중 어떻게 지내느냐는 친구의 말에 그랜저로 대답했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뒤에 알았지만, 해당 TV 광고는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하는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더군요.

동창회 막판, 친구들과 거리를 걸었는데요. 마침, 제가 입고 있던 티셔츠의 브랜드 매장이 나왔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어라? 여기에 매장이 있었네!”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친구가 퉁명하게 묻더군요. “저게 뭐야?”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가 어떤 브랜드 옷을 입었는지 몰랐던 거야?’ 이런 생각이 순간 스쳤습니다. 하지만 이내 비싼 옷을 인정받지 못했다는 서운함보다, 내가 무엇인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행복을 택하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종종 주변 사람들의 행동과 의견에 순순히 동조하곤 합니다. 이는 ‘애쉬의 동조 실험’으로 설명된 바 있는데요. 바람잡이 그룹이 ‘A와 B의 키가 같다’고 하면, 설령 그 말이 틀렸을지라도 우리는 ‘A와 B의 키가 같다’고 동조하죠. 이러한 동조는 사회적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는데요. 하지만 자신의 진정한 욕구와 가치를 외면하게 합니다. 옷의 기능이 아니라 남들에게 뒤처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또는 다들 그렇게 하는 것이라며 비싼 티셔츠를 입었던 저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과거, 저는 태국에서 ‘한 달 살기’를 한 적 있습니다. ‘한 달 살기’ 초반에는 SNS에 올릴 만한 예쁘고 화려한 곳을 계속 찾아다녔습니다. 하지만 여행의 중후반으로 넘어가니, 관광이 아니라 생활로 바뀌기 시작했죠. 그러면서 관광객이 아닌 현지인과 어울리는 공간으로 발길이 자연스럽게 옮겨갔는데요. 그때 저는 ‘자유’를 느꼈습니다. ‘해외’라는 장치가 있었지만,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관계의 굴레가 저만의 착각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죠.

교우관계, 가족관계 등을 비롯해 더 나아가 사회적 관계는 내가 설정한 속박이었습니다.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고, 다들 그렇게 하니까 나 역시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휩싸였던 겁니다. 그동안 내가 진정 원해서 예쁘고 화려한 곳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SNS에 자랑하면서 느끼는 상대적 우월감과 유명한 곳을 나도 가봤다는 동조심이었죠.

하지만 여행 기간이 길어지면서, 기존 관계의 강도가 약해졌고 내 안의 진정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이해했죠. 진정으로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남들이 내게 주는 인정이 아니라, 나 자신이 진정으로 느끼는 가치 경험이라고 말이죠. 태국 한 달 살기에서 그렇게 중요한 교훈을 얻었는데, 어느새 그걸 망각하고 비싼 티셔츠에 대한 욕망이 솟구쳤던 모양입니다. 비교와 동조에서 오는 기쁨의 찰나가 영원할 것이라 착각한 거죠.

최근 ‘가치 상실의 시대’라는 말이 나옵니다. 모든 걸 ‘돈’으로 평가하면서 ‘가치’의 개념이 사라졌다는 겁니다. 조금 오래된 자료이지만 2018년 한 조사에 따르면, 청소년 10명 중 5명은 ‘10억 원을 주면 1년 정도 교도소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모르긴 해도, 지금 설문조사를 하면 감옥에 가겠다는 비중이 더 많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조금은 우울한 현실이죠.


작금의 현실은 관계 속에서 피어난 비교와 동조에서 시작됐다고 생각하는데요. 우리는 거대한 움집 속 작은 존재인 꿀벌과 개미 일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거대한 우주 그 자체죠. 까만 우주의 작은 생명체라고 한들, 내가 없으면 우주 자체가 없으니까요. 그러니, ‘수많은 것 중 하나’가 아니라 ‘오직 나를 위해’ 살겠노라 다짐해 봅니다. 여러분과 함께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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