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면이 전사했다…천지가 캄캄해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김종대 전 헌법재판관·선일회계법인 고문 2024. 7. 21.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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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역(意譯) 난중일기-이순신 깊이 읽기 <65>정유년(1597년) 10월 13~26일

- 부고 편지에 열이 쓴 글씨 ‘통곡’
-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 하거늘…”
- 막내아들 잃은 비통함 구구절절
- 여러 장수들도 위로하려 찾아와

10월13일[11월21일] 맑음.

아침에 배 조방장(배흥립)과 경상우후(이의득)가 보러 왔다. 한동안 지나서 정찰선이 임준영(任俊英)을 싣고 왔다. 그래서 적의 정세를 들으니 “해남(海南)에 웅거하고 있던 적은 10일 우리 수군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는 다음 날 한 놈도 남김없이 도망갔다”하고 또 “해남의 아전 송언봉과 신용 등은 적에게 붙어서 왜놈들을 꼬드겨 지방 선비들을 많이 죽였다”고 하니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겠다. 그래서 곧 순천부사 우치적, 금갑만호 이정표, 제포만호 주의수, 당포만호 안이명, 조라만호 정공청 및 군관 임계형, 정상명, 봉좌, 태귀생, 박수환 등을 해남으로 보냈다. 늦게 배에서 내려 언덕에 앉아 배 조방장 및 장흥부사 전봉과 이야기하였다. 이날 우수영 우후 이정충이 뒤늦게 도착한 죄를 다스렸다. 우수사(김억추)의 군관 배영수가 와서 보고하기를 “수사의 부친이 바깥 바다에 있다가 살아서 돌아왔다”고 했다. 이날 새벽 꿈에 우의정(이원익)을 만나서 조용히 이야기하다가 깨었다. 낮에 들으니 선전관(宣傳官) 네 사람이 법성포에 내려와 있다고 한다. 저녁 때 김응함으로부터 “누구인지 모르나 어떤 사람이 섬의 산속에 숨어서 소와 말을 잡아 죽인다”고 보고하였다. 곧 황득중, 오수 등을 보내서 수색케 하였다. 이 날 밤 달빛은 흰 비단 폭과 같고 바람은 한 점도 없는데 혼자 뱃전에 앉아 있노라니 심회를 억제키 어려웠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앉았다 누웠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채 하늘을 우러러 탄식만 더할 따름이다.

충남 아산시 현충사 경내에 모셔진 이순신 장군의 아들 이면의 무덤.


10월14일[11월22일] 맑음.

날이 거의 다 샐 녁에 꿈을 꾸니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달리다가 말이 헛디디여 내(川) 가운데로 떨어졌으나 거꾸러지지는 않았다. 막내 아들 면(葂)이 나를 붙들어 잡을 것처럼 하다가 그만 꿈을 깼다. 이 무슨 조짐일까. 늦게 배(裵)조방장과 우후 이의득이 보러 왔다. 배(裵)의 종이 경상도서 와서 적의 정세를 전하였다. 어제 수색나간 황득중 등이 와서 보고하기를 내수사(內需司)의 종 강막지라고 하는 자가 소를 많이 치기 때문에 열두 마리를 끌어간 것이라고 하였다. 저녁에 천안(天安)서 온 사람이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겉봉을 뜯기도 전에 손이 떨리면서 마음이 섬뜩해졌다. 우선 겉봉을 해치니 속봉투 위에 열(䓲, 둘째 아들)의 글씨로 ≪통곡≫이란 두 글자가 쓰여 있어 단번에 면(葂)이 전사한 줄 알았다. 간담이 떨어져 목을 놓아 통곡했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박절한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 당연한 일이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이런 도리에 어긋난 일이 또 어디 있단 말이냐. 천지가 캄캄하여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기로 하늘이 너를 이 세상에 머물러 있지 않게 한 것이냐. 내가 지은 죄가 화(禍)가 되어 네 몸에 미친 것이냐. 이제 내가 이 세상에서 누구를 의지하고 산단 말이냐.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또 너의 어머니도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 목숨을 보전해 연명은 한다마는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아서 울부짖고 통곡할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1년 같구나. 이날 밤 9시경 비가 내렸다.

*** 감옥을 나와 백의종군을 시작할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백의종군에서 풀려 다시 통제사가 되어 명량대승첩을 거두자, 패전한 적의 보복으로 가장 사랑한 막내아들을 잃는다. 반년 만에 어머니를 잃고 자식까지 잃은 그의 비통하고 참담한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 놀라운 것은 이런 기막힌 상황 아래서도 일기 속 그의 감정 흐름은 흐트러지지 않고 질서 있게 발현되고 있음이다.

10월15일[11월23일]

진종일 비 오고 바람 불었다. 누웠다 앉았다 하면서 하루 종일 뒤척였다. 여러 장수들이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위문하러 오니 어떻게 얼굴을 들고 대하랴. 임홍, 임중형, 박신은 적세를 살피기 위해서 작은 배를 타고 흥양, 순천 앞바다로 나갔다.

10월16일[11월24일] 맑음.

우수사와 미조항첨사를 해남으로 보냈다. 해남현감도 보냈다. 내일이 막내아들의 죽은 소식을 들은 지 나흘째 되는 날이다. 아비로 실컷 한 번 울어보지도 못했다. 염한(염干, 소금 만드는 사람) 강막지(姜莫只)의 집으로 갔다. 밤 10쯤 순천부사(우치적), 우후 (이정충), 금갑도(이정표), 제포(주의수) 등이 해남서 돌아왔는데 적의 수급 13개와 적에게 붙어 우리나라 사람을 여럿 죽게 한(13일 일기 참조) 송언봉의 머리를 베어 왔다.

10월17일[11월25일]

날은 맑으나 온종일 큰 바람이 불었다. 새벽에 흰 띠를 두르고 향을 피우고 곡을 했다. 비통함을 어찌 참을 수 있으랴. 우수사가 보러 왔다.

10월18일[11월26일]

날이 맑고 바람도 자는 것 같았다. 우수사는 배를 부릴 수가 없어서 들어오지 못하고 바깥바다(外海)에서 잤다. 강막지(姜莫只)가 보러 왔다. 임계형과 임준영이 보러 왔다. 밤이 이슥한 후 꿈을 꾸었다.

10월19일[11월27일] 맑음.

새벽에 꿈을 꾸었다. 고향집 종 진(辰)이 내려왔고 죽은 아들을 생각하고 목을 놓아 통곡하는 꿈이었다. 백진사(白進士)가 보러 왔다. 임계형(林季亨)이 보러 왔다. 늦게 조방장과 경상우후가 보러 왔다. 김신웅(金信雄)의 아내, 이인세, 정억부를 붙잡아 왔다. 거제 안골포 녹도 웅천 제포 조라포 당포와 우우후가 보러 왔는데 적을 잡았다는 공문을 가져와 바쳤다. 윤건(尹健) 형제가 적에게 붙었던 자 2명을 붙잡아 왔다. 어둘 무렵에 코피를 1되가 넘게 흘렸다. 밤에 앉아서 또 아들을 생각하고 울었다. 그 서러움을 어찌 다 말하랴. 영특한 기질로 태어나서 마침내는 이렇게 죽어 영령이 되고 말았으니 너가 끝내 불효 노릇을 하리라고 내 어찌 알았겠느냐. 비통한 마음에 가슴이 터질 듯하여 억누르기가 정말 어렵구나.

10월20일[11월28일]

날도 맑고 바람도 잤다. 이른 아침에 미조항첨사, 해남현감, 남해현감이 해남의 군량을 운반키 위하여 돌아갔다. 안골만호 우수(禹壽)도 하직을 고하고 갔다. 늦게 김종려, 백진남이 보러 와서 윤지눌의 고약한 짓을 말하였다. 소음도(所音島) 등 13섬에 있는 염장(塩場)의 소금 굽는 것을 감독하는 도감검(都監檢)으로 김종려를 임명하였다. 영속(營屬) 사화의 모친이 배 속에서 죽었다고 하기에 곧 묻어 주도록 군관에게 지시하였다. 남도포, 여도의 두 만호가 다녀갔다.

10월21일[11월29일]

새벽 2시경부터 비가 오다 눈이 오다 했다. 바람이 몹시 차가워 뱃사람들이 추워서 얼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마음을 안정할 수 없었다. 오전 8시경에는 눈보라가 크게 일었다. 정상명이 와서 무안현감 남언상이 들어왔다고 보고했다. 언상은 원래 수군에 속한 관원인데 자기만 살려고 수군으로 오지 않고 몸을 산골에 숨긴 지 달포를 넘기고 적이 물러간 이제야 중벌을 받을까 두려워 비로소 나타난 것이다. 그의 하는 짓이 매우 해괴하다. 늦게 가리포첨사(이응표) 및 배 조방장(배홍립)과 우후(이몽구)가 와서 인사했다. 종일 눈보라가 쳤다. 장흥부사(전봉)가 와서 잤다.

10월22일[11월30일]

아침에 눈이 오고 늦게 갰다. 장흥 부사와 함께 식사를 했다. 오후에 군기시(軍器寺)의 직장 선기룡 등 3명이 유지와 의정부 포고문을 가지고 왔다. 해남현감(유형)이 적에게 붙었던 윤해와 김언경을 결박하여 올려보냈기에 나장들이 있는 곳에 단단히 가두라고 하였다. 무안현감 남언상은 가리포의 전선에 가두었다. 우수사가 황원에서 와서 김득남을 처행했다고 하였다. 진사 백진남이 와서 만나고 돌아갔다.

10월23일[12월1일] 맑음.

늦게 김종려와 정수가 와서 만났다. 배 조방장(배경남)과 우후(이몽구), 우수사우후(이정충)도 왔다. 적량과 영등포가 잇따라 왔다가 저녁에 돌아갔다. 이날 낮에 윤해와 김언경을 처형했다. 대장장이 허막동을 나주로 보내려고 밤 9시경에 종을 시켜 불렀더니 배가 아프다고 했다. 전마들의 편자가 떨어진 것을 고쳐 박았다.

10월24일[12월2일] 맑음.

해남에 있던 왜군을 물리치고 식량 322섬을 뺏어 왔다. 초경에 선전관 하응서(河應瑞)가 유지(有旨)를 가지고 들어왔는데, 그것은 우후 이몽구를 처형하라는 것이었다. 그 편에 들으니, “명나라 수군(계금이 이끌고 온 3000명의 명나라 수군을 말함)이 강화도에 도착했다”고 한다. 밤 10시께 땀이 나서 등을 적셨는데 자정께 그쳤다. 새벽 3시경에 선전관과 금오랑(도사)이 왔다고 한다. 날이 밝았을 때 들어왔는데, 선전관은 권길(權吉)이고, 금오랑은 훈련원 주부(主簿) 홍지수(洪之壽)였다. 무안현감(남언상), 목포만호(방수경), 다경포만호(윤승남)를 잡아갈 일로 여기에 온 것이다.

*** 이몽구는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할 때부터 우후로서 6년 넘께 이순신을 보좌한 장수다. 그러나 칠천량 전투에서 패할 때 여수 본영의 많은 군기와 군량을 처리해 가져오지 않고 자기 몸만 피했다. 이순신은 8월13일 곤장 80대로 이몽구를 처벌했고 조정에선 이날 그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한 것이다.

10월25일[12월3일] 맑음.

몸이 몹시 불편했다. 윤련(尹連)이 부안(扶安)에서 왔다. 종 순화가 아산에서 배를 타고 와 집안의 편지를 전했다. 편지를 받아 보고는 마음이 불편하여 이리저리 뒤척이며 혼자 앉아 있었다. 초경에 선전관 박희무가 유지(有旨)를 가지고 왔는데, “명나라 수군의 배가 정박하기에 적합한 곳을 찾아보고 급히 보고하라”는 것이다. 양희우가 장계를 가지고 서울로 올라갔다가 돌아왔다. 충청우후(원유남)가 편지와 함께 홍시 한 접을 보내왔다.

10월26일[12월4일]

새벽에 비가 뿌렸다. 조방장 등이 와서 만났다. 김종려, 백진남, 정수 등이 보러 왔다. 이날 밤에 땀이 온몸을 적셨다. 구들장을 너무 데웠기 때문이다.

㈔부산여해재단·국제신문 공동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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