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림 자신을 위한 만사(輓詞)…청춘을 자학한 마음은 지옥이었다
- 일본군 학병 참여에 비굴함 느껴
- 무의식 속 상처 치유하려 글쓰기
- 문학·학문 결합한 나림소설 전형
- 日유학 때 수재 친구 2명과 교류
- 진주농대서 연극 선봬 스타 반열
- 천대받던 ‘문·사·철’ 유용론 극찬
문학적 글쓰기는 애도(哀悼) 작업이다. 자신의 만사(輓詞)를 쓰는 일이다. 깊은 무의식에 잠긴 상처를 헤집고 마주하며 치유하는 일이다. 문학적 글쓰기는 자신의 슬픔과 적막감을 위로하고, 해소되지 못한 결핍을 애도하는 노력이다.
나림 이병주는 “한이 많아 소설을 쓴다”고 했다. 사실상 데뷔작 ‘소설 알렉산드리아’는 엑조티즘을 포장지로 한 한 많은 옥중기다. 감옥에 갇혀 황제의 사상을 키운다며 의연한 척하지만 깊은 분노가 숨어있다. 친구 하준규와 박태영을 위해 쓴 ‘지리산’도 그 다이나믹스는 의분(義憤) 즉 한이다. 나림은 자신을 위한 만사를 두 번 썼다. 첫 번째는 마흔 후반에 쓴 ‘관부연락선’이고, 두 번째는 예순을 앞두고 쓴 ‘세우지 않은 비명’이다.
▮원형·전형 그리고 청춘
‘관부연락선’은 나림 소설의 한 원형이다. 에피소드와 인물의 원형이 여럿 등장하고 문제의식의 원형도 드러난다. 각색하지 않은 원시자료(raw data) 같은 신선한 느낌이 있다. 거기에 더해 이 작품은 동서양 고전 명작을 소설 속에 녹여 넣는 나림 식 글쓰기의 전형이기도 하다. 나림은 문학과 학문을 융합하고 재미와 지성을 결합하려 애썼고, ‘관부연락선’은 성공한 케이스다.
나림은 자기 인생이 실패한 이유를 청춘의 부재에서 찾는다. 그의 소설은 자전적인 내용이 많지만 ‘관부연락선’은 유난하다. ‘관부연락선’은 나림 서른 살까지의 수기다. 자신을 요절한 수재로 극화한 청춘 시절의 만사다. 헤밍웨이는 “추상적인 말은 오염되기 쉽다”고 했지만, 영원히 더럽혀지지 않는 단어도 있다. 청춘이 바로 그 단어다. 나림은 자신의 분신인 유태림의 행장을 통해 청춘의 불모성을 토로하고 잘못 산 청춘으로 인한 마음의 지옥을 드러낸다.
특히 학병을 거부하지 못하고 일본군 졸병 노릇을 한 자신을 “제값을 모르고 스스로 팔아먹은 노예 같지도 않은 노예”로 규정하고, 사람도 아니라고 자학한다.
20대 초반 무한 가능성의 시기에, 자기주장에 앞서 비굴과 위선을 배워버린 자신을 끝내 용서하지 못한다. 나림은 ‘경남일보’가 1989년 복간되자 명예 주필 겸 뉴욕지사장에 취임한다. 그리고 ‘관부연락선’을 다시 연재한다. 그때 붙인 제목이 ‘아아! 그들의 청춘’이었다. ‘관부연락선’은 청춘 무곡(舞曲)이자 청춘애가(哀歌)다.
▮‘연극 스타’ 이병주
나림의 유학(留學)은 유학(遊學)이었다. 모름지기 유학은 유학이 되어야 한다. 나림의 지적 편력은 한량없다.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사서 봤고, 가고 싶은 곳 어디든 여행 다녔으며, 상류층 친구들과 고급 취미를 함께 즐겼다. 물론 경제적 여유도 유학(遊學)이 가능한 한 근거였다. 부산에서 은행에 근무하는 소학교 동창생 월급이 출장비까지 합쳐 50원일 때, 학생으로 한 달에 250원을 썼다.
나림은 메이지대 전문부 문학과에서 수학했다. “칸트와 콩트를 구별 못 하면서도 철학을 말하고”,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주의가 실존주의이고, 푼푼이 저축하며 사는 주의가 이상주의다”고 하는 엉뚱함이 그득한 클래스였다. 나림은 3류도 아닌 4류 대학이었다고 자비(自卑)했지만, 아베 도모지와 고바야시 히데오 같은 당대 최고 지성이 교수진이었고 고담준론을 나눌 수 있는 E와 H 같은 익우(益友)가 동학이었다. E와 H는 좋은 집안 배경에 성실한 학문 태도를 가진 수재로, 수재는 수재끼리 알아본다고 첫눈에 친구가 된다.
H는 유명 역사 소설가 후나바시 세이이치의 동생으로 고교 때 마르크스 사상에 빠져 만주까지 가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경력이 있고, E는 수산 재벌의 자제로 항일독립운동 결사인 ‘원주신’을 함께 조사하는 정열과 집념을 가진 의리남이다. 이들은 일본 요정에 앉아 당시 교양주의의 대표인 미키 기요시(三木淸)와 고바야시의 파스칼에 대한 해석을 두고 논쟁한다. 세 학생의 지적 수준은 초일류다. 활달하고 세련된 상류층 여성 이사코와 교제는 연극계를 비롯한 문화계 인사와의 접촉으로 이어지고 나림의 관심 폭은 더욱 확장된다.
쓰키지(築地)극장에서 일본 근대 연극 창시자 기시다 구니오(岸田國士)를 만나고 아리시마 다케오의 아들 모리 마사유키의 연기를 감상한다. 그런 경험은 진주농대 개교 1주년 기념행사 감독을 맡은 나림이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를 공연한 바탕이 된다. 음악은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을 작곡한 친구 이재호가 맡았다. 나림은 화려한 무대, 정교한 연출로 관중을 매료시켰다. “퇴폐를 통해 생의 엄숙함을 제시한 오스카 와일드는 어떤 사상가보다 훌륭한 인류의 교사였다”는 해설과 서곡으로 시작한 연극은 감독 이병주 교수를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
▮무용(無用)이라는 엄청난 실용
나림은 대학 진학 전 교토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 하숙집 근처에 고토(琴)를 잘 타는 아스코(篤子)란 여성이 있었다. 덕분에 일본의 전통 음악을 접한 나림은 아스코에게 한국 전통 음악을 소개하고 싶어 한 해 방학 온전히 가야금과 북 그리고 창을 배웠다. 판소리 명창 이화중선이 도쿄 혼조에 산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기도 했다. 아편 중독자의 처참한 몰골로 누워있는 낙백(落魄)한 ‘춘향가’ 명창에게서 창을 배우지는 못했다.
흥미 있는 대목이 있다. 나림이 유학하던 당시 도쿄 유학생 90%가 법학과였다는 사실이다. 법대생 저마다 실리적 목표가 있었겠으나, 나림은 코스모폴리탄을 자처하는 망명인으로서 좋은 책을 읽으며 학문 세계에만 빠져있고 싶은 문학도였다.
난세엔 학생으로서 유예된 신분과 보류된 시간을 즐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었다. 이른바 무용(無用)의 용(用)이다. 유용은 모생(謀生)이다. 쓸모 있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해 준다. 무용은 기쁨이다. 쓸모없는 것은 우리를 살면서 즐겁게 해 준다. 무용이 가장 유용할 수도 있다. 쓸모없어 보이지만 우리 정신을 윤택하게 해주는 게 인문 클래식이다. 바로 문학과 철학과 역사 문사철(文史哲)이다. 나림은 매월 50권의 정신적 명품을 정독하고, 꼼꼼하게 독서록을 작성했다.
▮원주신
관부연락선은 하나의 상징적 통로다. 도버와 칼레의 여객선이 영국과 유럽의 대륙을 잇는 통로이듯 관부연락선은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를 상징하는 통로다. 1905년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에서 승리하고 기고만장하던 시절 개통된 관부연락선은 영광과 굴욕 두 의미를 다 싣고 왕래했다. 일본에선 한국과 대륙 경영을 꿈꾸는 야심가부터 돈벌이 기회를 찾는 상인, 심지어는 낭인 부랑배까지 영광을 기대하며 부산행 배를 탔고, 한국에선 소수 유학생과 다수 노동자가 굴욕을 느끼며 시모노세키행 배에 올랐다.
나림은 그 배에서 30여 년 전 원주신이란 이름의 청년이 투신한 것을 주목하고 그의 정체 찾기에 나선다. 원주신은 한 사람이 아니라 의병 비밀결사였다. 리더였던 봉화 원주신의 자손이 사쿠라이 노인을 소개하면서 실마리가 풀린다. 사쿠라이는 의병장 이인영 취조에 통역으로 참여했고, 그를 존경하게 되어 기록을 남겨 놓고 있었다. 사쿠라이는 나카에 조민(中江兆民)의 제자다. 나카에 조민은 루소의 저작을 일본에 소개한 자유민권운동의 지도자로 동양의 루소라는 별명을 얻었던 자유분방한 기인이다. 그의 필명 슈스이(秋水)는 제자 고도쿠 슈스이(幸德秋水)에게 전수된다. 고도쿠 슈스이는 반전 평화를 외치고 천황제도를 비판하다 처형된 아나키스트다.
투신한 원주신은 당시 시모노세키에 머물던 송병준을 주살하려다 실패하고 분사한 것이다. 나림은 한일병합에 대해 “송병준 같은 자만 없었더라면” 하는 것과 “일본의 야심만 없었더라면” 하는 것 사이 딜레마가 있었다. 하지만 80%는 한국 탓이라는 자기반성이 앞섰다. 나림은 원주신을 찾는 노력도 했지만, ‘소설 이용구’를 지어 헛것을 좇다가 후회로 생을 마감한 문제적 인물 이용구에게 변명의 기회를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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