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태리타올 등 목욕문화 선도…등밀이기계는 수출도
-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 때밀어 벗기는 한국식 세신문화
- 그 역사는 900년 훌쩍 넘길 듯
- 이태리타올 60년대 부산서 탄생
- 자동기계 부산·경남 명물 취급
- 최근 연제구에 1인 세신샵도 생겨
- 2030 호응… 외국인 손님 찾기도
- 사라지는 목욕문화 새 대안으로
지난 17일 찾은 대구 달서구 ‘국제목욕관리사학원’. 30여 년 경력의 목욕관리사 방주원(63) 원장이 이 학원의 유일한 40대 여성 수강생과 서로의 때를 밀어주고 있었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세신학원은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꿈꾸는 수강생으로 붐볐다. 전문 모델을 불러 강습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서로 모델이 되어줄 수 밖에 없다. “차례를 기다리는 세신 손님으로 목욕탕이 복작복작했죠. 베테랑 세신사들은 한 달에 500만 원 이상 벌었습니다. 당시에는 대기업 월급 못지 않았어요.”
방 원장에 따르면 이 학원을 거쳐간 목욕관리사만 1000명은 족히 넘는다고 한다. 1990년대 중반부터 목욕관리사로 일하던 그는 7년차가 되던 해 학원을 차렸다. 낮에는 학원을 운영하면서 저녁에는 목욕탕에서 손님의 때를 밀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확산하며 대중목욕탕이 문을 닫기 시작하자 수강생 발길도 뚝 끊겼다. 방 원장은 “다른 목욕관리학원은 모두 문을 닫았다. 대구에서 유일하게 남은 우리 학원도 수강생이 두 달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하는 수준”이라고 토로했다.
폐업을 여러 번 고려했었다. 그럼에도 학원 문을 닫지 않는 이유는 세신업계가 살아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임산부 노인 장애인 등 여전히 목욕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최근에는 1인 세신샵이 생겨나면서 20~30대 분들의 문의도 들어오기도 하고요. 목욕관리사라는 직업은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이태리타올’의 고향 부산
부모님 손에 이끌려 등이 빨개지도록 때를 밀렸던 경험이 한 번은 있을 정도로 한국인에게 세신은 친숙한 문화다. 외국에서도 비슷한 문화를 찾아볼 수 있다. 이슬람 목욕문화인 ‘하맘’이 대표적이다. 온탕 대신 뜨거운 증기를 쐬어 피부의 때를 불린 뒤 때수건을 이용해 벗겨내는 식이다.
한국인의 삶에서 세신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가늠하기 어렵다. 이인혜 전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를 방문한 뒤 저술한 선화봉사고려도경에는 ‘고려 사람들이 중국 사람들이 때가 많다며 비웃는다’는 내용이 남아있다. 때를 없애는 문화 자체는 그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현대의 방식과는 다를지 몰라도 우리 민족의 때밀이 역사는 900년을 훌쩍 넘긴 것이다.
세신의 역사에서 1960년대 등장한 ‘이태리타올’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발명은 한국의 세신문화를 발전시킨 하나의 ‘대사건’이었다. 그 탄생에 관해서는 두 가지 주장이 엇갈린다. 한일직물 김원조 대표가 발명했다는 설과, 특허를 출원한 아리랑관광호텔 김필곤 대표가 원조라는 주장이다.
김원조가 발명자라고 주장하는 측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태리타올을 개발한 김원조가 다른 사업으로 부도가 난 뒤 연락이 끊기자, 친척이었던 김필곤이 그가 죽은 것으로 여기고 스스로 이태리타올의 개발자라고 홍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반대 측에서는 김필곤이 이태리타올을 발명해 올린 수익으로 아리랑관광호텔을 지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특허청 KIPRIS에는 김필곤의 이름으로 등록된 이태리타올을 찾을 수 없었지만, 목욕용접찰장갑(1968년 10월 등록)·다중접찰포(1968년 9월 등록)·목욕장갑(1968년 10월 등록)이 그의 이름으로 등록돼 있다. 다만 두 사람 모두 세상을 떠나 어느 이야기가 진실인지 알 수 없다.
발명자가 누구든 간에 이태리타올의 탄생지가 부산이라는 점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다. 그렇다면 부산에서 만들어진 물건에 왜 ‘이태리타올’이란 이름이 붙었을까? 이 역시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비스코스 레이온 원단을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설과 ‘이태리식’ 연사기로 직물을 뽑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다만 인터넷 등에는 한일직물에서 타월을 짜던 기계는 일제 다이마루라는 증언이 남아있어 전자의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이렇게 등장한 이태리타올은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때를 박박 밀어 벗겨내는 한국식 세신문화를 이끌었다. 타올이 시중에 보급된 이후로 “때를 살살 밀자”는 취지의 언론 보도가 눈에 띄게 많아질 정도였다. 지난 2009년에는 한국인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 52가지 디자인(디자인문화재단 선정) 중 하나로 선정됐다. 이 전 학예연구사는 “목욕 값에 비해 서민의 월급은 넉넉지 않았다. 서민들은 본전을 뽑기 위해 최대한 깨끗하게 씻으려 했다”며 “여기에 이태리타올이 가세하며 한국의 때밀이 문화가 자리잡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부산의 명물 ‘자동 등밀이 기계’
등을 맞댈 수 있도록 놓인 동그란 의자. 전원 버튼을 누르면 빙글빙글 돌아가는 때수건. 1980년대 후반께 모습을 드러낸 ‘자동 등밀이 기계’는 세신 비용이 부담스러운 이들이 무료로 때를 밀수 있도록 해준 서민의 아이돌이었다. 종종 기계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다툼이 있을 정도로 목욕인의 사랑을 받았다. 흔히 자동 등밀이 기계는 부산·경남 지역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명물 취급을 받아왔다. 하지만 업계에 따르면 기계가 탄생한 곳은 부산이 맞지만 이 지역에만 보급되었다는 이야기는 잘못된 사실이다.
1988년부터 자동 등밀이 기계를 개발해온 부산 사상구 삼성기계공업사 이강훈(68) 대표는 “1990년대에는 전국에서 주문이 들어와 한 해 1000대 가까이 팔려나갔다”고 설명했다. 삼성기계공업사가 지난 30여 년간 판매한 자동 등밀이 기계만 3만 대 이상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한때는 빗발치는 판매와 A/S 문의를 감당하기 위해 서울과 광주에 각각 사무실을 둘 정도였다.
그 인기는 국내에 그치지 않았다. 보따리 무역상을 통해 일본과 중국에도 팔려나갔다. 이 대표는 “고장이 잘 나지 않아 10~20년은 거뜬히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 회사 제품이 아직까지 현지 목욕탕에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자동 등밀이 기계는 목욕탕 수 감소로 최근에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이 기계를 생산하던 업체들은 삼성기계공업사를 제외하고 모두 주력 분야를 옮기거나 폐업했다. 삼성기계공업사 역시 상황이 낙관적이지는 않다. 이 대표는 “기계를 만드는 업체가 12곳 정도 있었지만 지금은 전부 폐업하고 우리만 남았다”며 “원래 이윤이 많이 남는 제품이 아닌데다 팬데믹 이후 목욕업 불황까지 겹쳐 매출이 절반 수준으로 감소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목욕탕용 특수기계를 개발하겠다는 이 대표의 의지는 굳건하다. 현재도 이곳은 자동 등밀이 기계 외에 물대포 기계·바닥 청소기 등 다양한 기계를 제조하고 있다. 이 대표는 “그 수가 점차 줄긴 하겠지만 대중목욕탕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며 “목욕탕이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새로운 기계를 개발할 생각이다”고 말했다.
▮때밀이에 열광하는 MZ세대?
대중목욕탕이 줄지어 폐업하는 와중에도 꿈틀거리던 세신 수요는 1인 세신샵의 형태로 부활하고 있다. 1인 세신샵 대부분은 여성 전용으로 운영된다. 세신 관리는 약 1시간 동안 이어지는데, 독립된 공간에 준비된 욕조에서 몸을 불리고 나면 세신사가 들어와 때를 밀어주는 식이다. 요금에 따라 마사지·피부관리 등 서비스가 함께 제공된다. 특히 20~30세대의 호응이 뜨겁다.
부산 연제구에서 1인 세신샵 ‘지금이힐링할때’를 운영하는 김나현(34) 대표는 “평소 대중목욕탕에서 세신을 즐겼는데 팬데믹 이후로는 방문하기 꺼려졌다”며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아 1인세신샵을 차리게 됐다”고 말했다. 이곳을 찾는 고객의 80% 이상은 20~30대 여성이다. 세신이 힘든 임산부 고객 등도 상당수를 차지한다.
김 대표에 따르면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외국인 관광객이 찾는다고 한다. 개인적인 방문은 물론 패키지투어의 일환으로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1990년대 일본인 단체 관광객의 발길을 이끌었던 ‘때밀이 관광’의 연장선인 셈이다. 이 전 학예연구사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1인 세신샵의 수가 늘어나고 있는 만큼 앞으로는 1인 세신샵이 목욕 문화의 새로운 대안으로 자리 잡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영상= 김태훈 김진철 김채호 PD
※제작지원 : BNK 금융그룹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