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디단 여름 옥수수 [서울 말고]

한겨레 2024. 7. 21.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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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샀다.

이른 봄날, 포트에 옥수수 씨앗을 심어서 한 달 동안 모종을 키워내고, 밭에 심은 뒤엔 매일 오늘의 날씨를 확인하며 늦지 않게 물을 주고, 제초제와 화학 약품의 유혹을 이겨내며 무릎까지 자라는 풀들을 예초기로 쳐내는 농부의 일상.

그러고 나면 매일 저녁 농부의 밥상엔 작고 알이 덜 찬 볼품없는 옥수수가 올라와 있는 여름의 나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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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을 유혹하는 책의 집을 꿈꾸던 땅에는 꿩이 둥지를 틀었고 책방지기는 겸임으로 농부가 되었다. 필자 제공

백창화 | 괴산 숲속작은책방 대표

땅을 샀다. 수년 전 일이다. 시골 책방 문을 열고 느닷없이 전국에 소문이 퍼져 작은 집 마당이 터져 나갈 정도로 사람들이 찾아오던 시절이었다. 전원주택 거실에서 시작한 책방이 안방으로까지 확장되었고 한 개 뿐인 화장실 앞에선 줄을 서야 했다. 스무 명 이상은 곤란하다고 손사래를 해도 45인승 관광버스를 타고 단체 손님들이 밀어닥쳤다.

꿈을 꾸었다. 살림집 한 켠에 옹색하게 세 들어 있는 책방이 아니라 넓은 땅을 사서 우리가 그리던 책의 집을 짓는 꿈. 버지니아 울프의 정원처럼 장미와 백일홍과 클레마티스가 향기를 흩뿌리고, 안으로 들어오면 책이 달려와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독자들을 유혹하는 아름다운 책의 집. 밀려오는 손님들을 넉넉히 맞이할 수 있는 시골 큰 책방의 꿈은 달콤했다.

그러나 시골 땅을 사본 적 없는 무지한 도시 사람이 홀린 듯 구입한 땅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았다. 힘과 품과 돈이 많이 드는 어려운 땅을 끌어안고 끙끙대는 동안 팬데믹이라는 재앙이 닥쳐 왔고 문도 열기 전 책방 앞에 줄을 서던 독자들의 ‘오픈런’ 행렬은 사라졌다. 역병의 시대는 지났지만 독서 생태계는 위축되었고 그사이 늙어버린 우리 부부는 땅에 꿈의 집을 짓는 대신 옥수수와 고구마를 심었다. 책방 사장님은 겸임으로 농부가 되었고 책방지기의 꿈이 사라진 잡목 숲에는 꿩이 둥지를 틀었다.

낮에는 책방을 열고 밤이면 온라인으로 농사를 배우며 땅을 일구기 5년. 수확 시기를 몰라 알이 덜 찬 옥수수를 베어 오기도 하고, 작황이 좋다며 흐뭇해하던 한 해는 멧돼지에게 모두 헌납하기도 하고, 어느 해는 병충해가 들어 절반 이상을 버렸다. 농부가 할 수 있는 이런저런 경험들을 한번씩 겪고 나니 초기에는 식구와 지인끼리만 나눠 먹던 옥수수를 제값에 판매해도 될만한 상품으로 수확해내기에 이르렀다.

대학교수가 연구 개발한 품종이라고 ‘대학찰옥수수’라는 이름이 붙었다. 괴산의 대표 여름작물이다. 필자 제공

그러나 제값이란 과연 얼마인가. 이른 봄날, 포트에 옥수수 씨앗을 심어서 한 달 동안 모종을 키워내고, 밭에 심은 뒤엔 매일 오늘의 날씨를 확인하며 늦지 않게 물을 주고, 제초제와 화학 약품의 유혹을 이겨내며 무릎까지 자라는 풀들을 예초기로 쳐내는 농부의 일상. 매일 밭에 나갔다 돌아오는 남편의 작업복은 들고 짜내면 물이 줄줄 흘렀고 깊게 밴 땀 냄새는 세탁기에 돌려도 지워지질 않았다. 그 냄새의 제값은 얼마일까.

부실한 몸과 더위를 핑계로 밭에는 걸음도 하지 않는 게으른 농부의 아내는 마케팅이라도 맡아 면을 세워야 한다. 열심히 시장 가격을 알아봐 값을 매기고 광고를 돌리고 주문을 받는다. 그래봐야 미숙한 농부의 수확물에 큰 기대가 없이 우정의 구매를 해주는 지인들이 대상이다. 농사를 못 지어서인지, 약을 안 써서인지, 올해 유독 작고 날씬한 옥수수를 상자에 담다 보니 혹여라도 부실한 옥수수가 왔다고 고객들이 실망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고 나면 매일 저녁 농부의 밥상엔 작고 알이 덜 찬 볼품없는 옥수수가 올라와 있는 여름의 나날들.

대학교수가 연구 개발한 품종이라고 ‘대학찰옥수수’라는 이름이 붙었다. 괴산의 대표 여름작물이다. 필자 제공

4월부터 7월까지 약 넉 달. 물론 수확철을 제외하고는 하루종일 매달리는 일은 아니고 아침저녁 두세 시간 노동으로 족하니 이 농업은 부업인 걸까. 그러나 부업 때문에 농부는 무릎이 나가 작년에는 잠시 병원에 입원도 했다. 비룟값 종잣값을 포함한 모든 물가는 올라가는데 옥수수 값은 제자리니 자급자족의 기쁨과 재미로 한다기에는 힘과 품이 심하게 들고, 직업으로 하기에는 생계가 되지 않는 ‘소농’의 일. 노심초사하며 고객에게 보낼 택배 상자에 옥수수 서른개를 담고 있는 시골 책방지기가 지금 당장 바라는 건 하나다. ‘둘이서 먹다 하나가 쓰러져버려도 모를, 다디달고 다디단’ 여름 옥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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