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철의 까칠하게 세상읽기] 축구나 정치나 `도긴개긴`
최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선임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대한축구협회가 지난 7일 대표팀 사령탑으로 프로축구 울산HD 홍명보 감독을 선임했지만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특히 축구협회는 외국인 감독을 알아본다며 5개월을 허비하다 홍 감독을 갑작스럽게 선임했다. 홍 감독 역시 대표팀 감독에 거부 의사를 밝혔다가 입장을 갑자기 바꾼 점이 팬들의 거부감을 일으키고 있다.
이 과정을 살펴보면, 세계 축구와 팬들의 눈높이가 바뀐 것을 한국축구협회만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요즘 전당대회를 치루고 있는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두 거대 정당 역시 변화된 유권자의 인식을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지난 2002년은 뜨거운 혁신의 한 해였다. 그해 6월에는 월드컵 대회가, 12월에는 대통령 선거가 열렸다. 당시 대표축구팀은 거스 히딩크 감독의 리더십 아래 '월드컵 4강'이라는 신화를 만들었다. 히딩크 감독은 한국 축구 고질병인 인맥축구와 위계축구를 헐어낸 이방인이었다. 월드컵 신화의 주역 상당수가 명지대(박지성), 건국대(이영표), 아주대(안정환), 광운대(설기현), 동아대(김태영), 경희대(이운재) 등 소위 축구명문대학 출신이 아니었다. 히딩크는 선수들에게 최고참 홍명보를 "명보 형" 대신 "명보"로 부르게 하면서 위계를 무너뜨렸다.
이후 한국 축구가 조금씩 변화해왔다. 고교 유망주들이 명문대 간판보다 국내외 프로팀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과거처럼 명문대를 졸업하지 않아도 당당히 국가대표가 되고, 주장이 되는 시대가 되었다.기성용, 손흥민, 황희찬, 이강인 등은 명문대 출신이 아니어도, 고졸이어도 당당하게 능력을 인정받았다.
케이블TV와 인터넷의 발달로 영국 프리미어리그, 스페인 라리가 등의 경기가 중계되면서 국민의 눈높이도 높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축구협회가 홍 감독을 우격다짐으로 선임한 것에 대한 반발은 당연하다. 더구나 정몽규 축구협회장, 이임생 기술총괄이사, 홍 감독 모두 같은 고려대 출신이기에 동문끼리 짬짜미 아니냐는 의혹마저 불러왔다.
2002년에는 정치에서도 커다란 변혁이 일어났다. 민주당 내에서도 비주류로 꼽히던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특히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언더독(underdog) 노무현 후보의 급부상은 드라마틱했다. 이때만큼 유권자의 정치 효능감(political efficacy)이 높았던 시기가 없었다. 정치 효능감은 선거 참여가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꾼다는 인식을 일컫는다.
그러나 20여년이 지나면서 정치는 과거로 회귀가 이뤄졌다. 정치인들의 이해득실이 우선 고려되면서 '정치 냉소주의'도 팽배해지고 있다.
이번 국민의힘 전당대회는 역대급으로 치졸한 말다툼만을 이어가고 있다. 당대표 경선에 나선 후보 중 2명(원희룡, 한동훈)은 검사 출신이고, 1명(나경원)은 판사 출신, 1명(윤상현)은 박사 출신이다. 나름 이 시대의 엘리트인 셈이다. 하지만 전당대회는 미래를 향한 비전과 정책 제시 대신에 과거 허물 물어뜯기로 변질되었다.
대통령과의 관계, 김건희 여사 문자 메시지 공개, 총선 고의 참패 논란, 과거 패스트트랙 관련 공소 취소 소동 등 다양한 논쟁거리만 낳았다. 그 결과, 한 때 대선주자로 꼽혔던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의 설익음과 원희룡 전 국토부장관의 불안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민주당 전당대회는 이재명 대표 1인 체제를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민주당은 앞서 대선에 출마하려면 1년 전에 사퇴해야 한다는 당헌 조항을 상당한 사유가 있을 때에는 당무위원회 의결로 달리 결정할 수 있다고 수정했다. 이는 이재명 의원이 당 대표로 재선된다면 오는 2026년 6월 열리는 전국동시지방선거 공천권까지 행사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한 것이다. 당내 다양한 의견 차단은 물론 이 대표에 반하는 어떠한 목소리도 허용하지 않을 기세다.
2002년의 뜨거웠던 열정은 식었지만 국민들은 당시를 기억하고 있다. 그렇기에 문화체육관광부의 축구협회 감사를 환영하며 차분하게 지켜보고 있다. 축구협회가 자정작업을 할 수 없다면 그 폐쇄성은 외부의 힘에 의해 수술될 수밖에 없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22대 국회는 개원한 지 50여일이 지났지만 거대 두 정당의 지루한 대치만이 계속되고 있다. 여·야가 국민 눈높이와 다른 행보를 반복한다면 국민은 정치 외면을 가속화할 것이다. 결국 정치 대수술 요구가 높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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