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히지 않는 자유를 향해 달렸다…동시대 문제작 ‘블라인드 러너’ [고승희의 리와인드]
이란 ‘히잡 시위’와 난민 문제 엮어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달렸다. 말을 하는 대신 달렸고, 화를 내는 대신 달렸다. 울분을 삼키고 달렸다. 오로지 자유를 향해, 억압된 현실을 넘어, 잡히지 않는 희망을 찾아 달렸다. 지옥 같은 터널 너머 한 줄기 빛을 향해 달렸다. 그 곳이 또 다른 터널일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달려야 했다.
“‘달린다’는 것은 자유의 의미이고, 자유를 속박하는 것에 대한 저항이에요.”
이란 출신으로 동시대 가장 주목받는 연출가 중 한 명인 아미르 레자 쿠헤스타니의 연극 ‘블라인드 러너’(21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가 한국 관객과 만났다. 동시대 예술을 조망하는 세종문화회관의 여름 공연 축제 ‘싱크넥스트24’를 통해서다.
이 연극은 지난해 벨기에 쿤스테 페스티벌에서 초연된 작품이다. 2022년 ‘히잡 시위’로 불리는 ‘마흐사 아미니 시위’의 시발점이 된 마흐사 아미니의 사망사건을 다룬 기자 닐루파 하메디와 남편의 실화를 모티프로 창작됐다.
아시아 초연작인 ‘블라인드 러너’를 들고 한국을 찾은 쿠헤스타니는 “실화에서 진화해 연극을 만들었고 닐루파 하메니에게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이지만 그의 전기라고는 할 수 없다”며 “팩트(사실)와 스토리(허구)의 경계가 얕고 불투명하며 모호한 작품이다”라고 설명했다. 이 연극에 ‘다큐멘터리 연극’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이기도 하다.
쿠헤스타니 연출가의 작품엔 그의 모국인 이란의 국가적 특수성과 첨예한 사안들을 바라보는 연출가이자 극작가인 쿠헤스타니의 시선이 담긴다. 그는 ‘유리 위에서 춤추다(Dance on Glasses)’(2001)로 국제 무대에서 주목받았고, 시간과 기억에 관한 3부작 ‘타임로스(Timeloss)’, ‘청각(Hearing)’, ‘서머리스(Summerless)’로 연출가로의 작품 세계를 공고히 했다. 중동 난민의 여정을 그린 ‘구름 한가운데’(2005)는 손원정 연출가를 통해 극단 코끼리만보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블라인드 러너’ 역시 1979년 이슬람 혁명, 2009년 이란 녹색 운동, 2022년 이란 히잡 시위로 이어지는 엄혹한 시대를 살아가는 이란인들의 투쟁의 역사가 담겨있다. ‘히잡 시위’는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된 22세 여성 마흐사 아미니가 조사 중 의문사한 사건이 계기가 돼 이란 전역으로 확산됐다.
연극은 독특한 방식으로 시작된다. 부부인 두 남녀의 등장. 남자는 영어로, 여자는 페르시아어로 화이트보드에 한 문장씩 동시에 적고 두 문장은 무대 한가운데 영상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된다. ‘이것은 트루 스토리를 기반으로 한다’, ‘이것은 팩트(사실)를 기반으로 한다’, ‘이것은 허구다’ 등으로 사실과 허구를 오가는 말장난을 통해 연극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막이 오르면 무대 위의 두 남녀의 대화가 시작된다. 이들은 부부다. 페르시아어로 주고 받는 짧고 간결한 대화들. 지금 아내는 투옥 중이다. ‘히잡 시위’로 사망한 아미니 사건을 다루다 잡혀갔다는 설정이다.
연극이 그리는 이란은 누구에게도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종교, 사상, 의식주, 언론의 자유가 모조리 거세된 전체주의 사회다. 억압받는 사회에서도 삶의 시계는 움직인다. 누군가는 투쟁하고 누군가는 폭로하나, 누군가는 눈을 감기도 하다. 시대 속에서 모두가 ‘전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남편(아이나즈 아자르우슈)은 아내(모하마드 레자 후세인자데)가 원망스럽다. 국가의 부패, 타락한 정권으로 인해 빈곤한 국민, 숨 쉬는 것 외엔 모든 것을 억압하는 정부를 향한 저항이 가정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하냐고 항변했다. “꼭 그렇게 해야만 했냐”고 되묻는다. 남편과 아내의 대화는 지난하나 마치 사이퍼(래퍼들의 즉흥 공연) 같다. 페르시아어의 매력적인 운율에 짧게 치고 받아 긴장감 넘치는 대사들이 기묘한 랩 배틀처럼 다가온다.
아내의 제안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달라진다. 시위에서 눈을 잃은 시각 장애인 여성 파리싸와 파리에서 달리기 대회에 출전하라는 것이다.
이 극에서 등장해야 할 인물은 셋이나, 무대는 두 사람 뿐이다. 아내와 시각 장애인 여성을 한 명의 배우가 연기하도록 설정했다. 쿠헤스타니는 “배우가 눈을 뜨면 아내 역이 되고, 눈을 감으면 시각 장애인 여성이 된다”며 “두 인물이 같은 명분으로 운동을 했기 때문에 하나의 목소리를 낸다고 판단해 1인 2역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블라인드 러너‘를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무대 내내 흐르는 미묘한 감정들이다. 아내와 남편 사이의 대화에선 엇갈린 관계의 긴장감이 흐르고, 시각 장애인 여성과 남편에겐 이성의 감정이 개입한다.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짧은 대사와 대사 사이의 휴지가 이 작품을 특별하게 매만진다. 쿠헤스타니가 탁월한 연출가인 이유다.
그는 “이 작품은 애초 ‘천일야화’ 같은 형식이었다. 처음엔 다섯 페이지의 스크립트로 시작해 배우가 하는 말과 분위기를 보며 대사를 쓰고 또 쓰며 천일야화를 만들어가듯 구성했다”며 “남녀간의 대화에선 대화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감정들이 있고, 그 미묘한 감정이 끼어들 수 있게끔 연출을 했다”고 말했다. 이는 도리어 건조하고 딱딱한 대화를 통해 관객들이 스스로 해석하고 감정을 확인할 수 있는 방식이 됐다. 실황을 카메라에 담아 극단적 클로즈업으로 보여준 연출 기법은 관객이 이야기의 맥락과 흐름을 보다 잘 찾아갈 수 있는 장치였다.
쿠헤스타니가 이 작품에서 ‘달리기’를 가져온 것은 도쿄 패럴림픽에서 시각장애인 마라톤 선수가 가이드 러너로 함께 달리는 사진을 보면서다. “개인으로서 투쟁하는 자유는 공동의 성격을 지닐 때 비로소 그 가치가 완성된다”는 각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역시 달리기를 즐기다 다리 근육을 다친 경험이 있다.
시각 장애인 여성과 함께 뛰고 또 뛰며 남편은 달라진다. 남편은 “어떤 사람들은 생각을 비우기 위해 달리고, 어떤 사람들은 생각을 하기 위해 달린다”며 “나는 후자에 해당한다”고 했다. 이전엔 이해할 수 없었던 아내의 투쟁과 저항은 이제 남편의 몫이 된다. 그의 변화를 일으킨 것은 파리싸와의 미묘한 감정 때문이다.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의 다양한 얼굴이다.
쿠헤스타니는 “남편은 아내에게 당신의 정치적 신념이나 관념 때문에 왜 우리 관계가 이렇게 위험에 빠져야 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질문을 던져왔다”며 “그것이 진화해 결국엔 여성의 자유가 보장돼야 남성의 자유도 보장이 되고, 그 답에 이르기 위해선 사회 전체가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여정을 담은 것이 이 작품의 핵심”이라고 했다.
이란 사회의 정치적 억압과 갈등은 세계인의 문제로 나아간다. 평범한 삶을 살아오던 사람이 ‘국가’로 인해 안전을 위협받고, 국가로 인해 목숨을 걸 수 밖에 없는 이야기를 그린다. 난민 문제로 이야기를 끌고가는 것이다. 독재 치하를 벗어나기 위해 나라를 떠날 수 밖에 없는 사람 중 한 명이 파리싸인 것이다.
남편과 파리싸는 다시 달린다.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해저터널에서다. 프랑스를 넘어 영국 국경에 도달하는 길이다. 장장 38㎞에 달하는 터널은 5시간 35분 동안 건너야 한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시속 160㎞로 달리는 아침 첫 기차에 치이고 만다. 목숨을 걸고 달리는 자유를 향한 길에 찬란한 내일이 보장된 것은 아니다.
파리싸는 이렇게 말한다. “영국에선 시위로 잃은 나의 눈을 보고도 나를 조국으로 돌려보낼까,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하다.” 연극은 커다란 경적 소리를 내며 끝을 맺는다. 결말 역시 모호하다. 누군가는 해피엔딩이라고, 누군가는 해피엔딩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쿠헤스타니가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난민 문제가 그들을 해피엔딩으로도 언해피엔딩으로도 이끈다.
그는 “난민 문제는 난민 자체가 만든 것이 아니라 난민이 발생할 수밖에 없도록 한 모든 국가 체제의 책임”이라며 “난민을 만드는 나라가 자신의 조국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닫고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고 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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