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장고 미술관, 도시의 이력과 일상을 품다 [배정한의 토포필리아]
배정한 |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공원의 위로’ 저자
내가 편집주간으로 참여하고 있는 월간 ‘환경과조경’에는 최근 완공작을 소개하는 꼭지가 있다. 그런데 해외 작품을 실을 때면 늘 마음이 개운하지 않다. 눈과 발로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 지면을 편집하는 건 꼭 실전 없이 책으로 연애를 배우는 것과 비슷한 느낌. 어쩌다 해외 출장이나 여행을 가게 되면 가보지 않고 실었던 장소에 잠깐이라도 들려보려고 애를 쓰는 이유다.
얼마 전 ‘건축의 도시’ 로테르담을 스치듯 지나갈 기회가 생겼다. 네덜란드 로테르담은 2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군의 대규모 폭격으로 도시 대부분이 잿더미로 변했다. 이런 비극은 역으로 도시의 건축사적 반전의 계기가 되었다. 도시를 백지 위에 새로 그릴 수 있었던 것. 현대 건축과 조경의 실험실이자 전시장이라 불리게 된 젊은 도시 로테르담은 전 세계와 연결된 항구 도시의 활력을 내뿜고 있다.
10년 만의 방문이라 밀린 숙제가 많았지만 주어진 시간은 딱 반나절. ‘역 유(U)자’ 말발굽 형태로 전통시장과 아파트를 결합해 로테르담의 새 랜드마크로 발돋움한 마켓홀에 들러 네덜란드의 길거리 음식인 하링(청어 절임) 샌드위치로 끼니를 해결했다. 남은 시간은 ‘개방형 수장고’ 미술관이라는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는 데포 보이만스 판뵈닝언(Depot Boijmans Van Beunigen, 데포) 한곳에 집중하기로 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소장품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정교하게 보존하는 공간인 수장고는 미지의 영역이다. 일반 관람객은 그 존재조차 모른다. 하지만 최근 소유에서 공유로, 수집에서 활용으로 수장의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수장고에 연구와 전시 기능을 결합해 대중에게 공개하는 개방형 수장고가 늘어나고 있다. 국내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 청주와 국립민속박물관 파주가 이런 계열이다. 2021년 문을 연 ‘데포’는 아예 건물 자체가 거대한 수장고 역할을 하는 미술관이다.
공원 한쪽 끝에 자리한 ‘데포’에 들어가면 높이 35미터 중앙 홀을 가운데 두고 배치한 대형 유리 진열장 13개와 그 사이를 오르내릴 수 있는 십자형 계단이 관객의 발길을 이끈다. 전시실 겸 창고인 건물을 공원 산책하듯 거닐며 특별한 방식으로 소장품을 경험할 수 있다. 특히 흥미로운 건 일반적인 미술관 전시에서는 보기 어려운 작품의 뒷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 예를 들어 브뤼헐의 캔버스 뒷면에 찍힌 스탬프는 옛 소유자가 누구였는지, 어느 도시를 옮겨 다니다 지금 여기에 이르렀는지 알려준다. 렘브란트의 그림 뒷면에 덕지덕지 붙은 스티커들은 작품의 전시 이력과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준다. 바닥을 뚫고 나온 얼굴로만 익숙한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품에서 나머지 몸뚱이는 어떻게 생겼는지도 볼 수 있다.
사실 내가 ‘데포’에 꼭 가보고 싶었던 건 잡지 지면에 이 건물을 소개하면서 형태와 외관에 강한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묵한 사발을 닮은 직설적 형태와 1644장의 거울 패널을 붙인 입면은 대놓고 튀어보자는 식의 ‘관종형’ 건축이라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직접 보니 전혀 달랐다. 지면과 건물이 맞닿는 면적을 최소화한 항아리 형태여서 대형 건물임에도 시각적 위압감이 없었다. 거울은 건축의 육중한 존재감을 지우고 주변의 도시 맥락과 풍경을 품는 지혜로운 장치였다. 자작나무 75그루가 늘어선 40미터 상공의 정원에서는 로테르담의 경관과 도시 이력을 한눈에 조감할 수 있었다.
‘데포’의 거울 입면은 도시의 다양한 풍경을 그대로 담아낸다. 방향마다 전부 다른 풍경이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과 구름, 나무와 들풀로 풍성한 공원, 도시의 역동적 스카이라인과 그 이면의 비극적 도시사를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편집해 품어낸다. 걷는 방향과 시선의 각도에 따라 거울에 반사되는 도시 경관이 계속 달라진다. 건축의 존재는 사라진다.
더욱 흥미로운 건 ‘데포’ 주변을 걷거나 앉아서 쉬는 사람들의 행동이다. 매일 이곳을 지나 등교하는 고등학생, 인근 회사의 직장인, 한가하게 산책을 즐기는 동네 주민, 갈 곳 없는 노인, 공원 벤치에 앉아 맥주를 들이켜는 커플, 작심하고 온 이방의 관광객 모두가 꼭 약속한 것처럼 똑같은 행동을 한다. ‘셀카’ 놀이. 그들은 건물에 비친 경쾌한 도시의 일상, 그 속에 숨겨진 자신의 모습에 즐거워하며 스마트폰을 꺼낸다. 미술품의 이면과 속살을 보여주며 동시에 도시의 이력과 일상을 전시하는 수장고 앞에서 나 또한 거울에 비친 나를 원 없이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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