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 10년, 정우성의 마지막 인사
“잠을 설쳤어요. 유엔난민기구(UNHCR) 친선대사로서 마지막 인터뷰를 한다고 했는데, 주말 내내 마음이 편안하지는 않았나봐요.”
2024년 7월15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정우성 전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11년 전이었던 2014년에도 그랬다. 유엔난민기구 명예사절로서 네팔에 사는 부탄 난민들을 만나러 가기 전날 밤, 그는 밤을 꼬박 새웠다고 했다. ‘유엔 이름을 내건 국제기구와 좋은 일 한답시고 여기저기 자랑하고만 싶은 건 아니야?’ ‘명예사절이라는 이름값에 우쭐한 것은 아니야?’ ‘잘할 수 있을까?’ 돌덩이들을 머리에 잔뜩 이고 비행기에 올랐던 그는 그길로 꼬박 10년을 유엔난민기구와 함께했다. 2015년 세계난민의 날(6월20일)을 앞두고 유엔난민기구의 제안을 받아 친선대사(Goodwill Ambassador)로 임명된 뒤로는 9년이 됐다.
이 기간 거의 매년 세계 곳곳의 난민촌과 분쟁 지역을 방문하고 한국 사회에 소식을 전하는 임무를 수행했던 친선대사 정우성이 7월3일 사임의 뜻을 밝히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긴장한 표정의 정 전 대사는 인터뷰가 시작되자 다시 두 눈을 반짝이며 자기 생각과 마음을 담을 단어들을 그러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인터뷰하면서 아주 먼 과거를 응시했다가, 재빠르게 미래를 내다보기도 하면서 다양한 시간과 공간을 오갔다. 생각의 시차가 생길 법했지만 조금의 주저함이 없었다. 친선대사 정우성의 10년을 <한겨레21>과 한 마지막 인터뷰로 돌아봤다. ―편집자 주
—9년 전, 유엔난민기구의 친선대사직 제안을 수락할 때는 어떤 마음이었나요?
“세월호 참사나 여러 사회적 문제들을 보면서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동기가 계속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이런 제안이 왔을 때, ‘준비가 돼 있나’ 스스로 물으면서 도망갈 이유를 찾지 말고 일단 부딪혀보자는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그게 무엇이 됐든지 시작하면 오래 해야 한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난민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이해를 높이는 것’을 본인의 역할이라고 말씀해오셨는데, 10년의 활동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정우성이라는 배우가 해마다 세계 곳곳의 난민 캠프를 다녀오고, 난민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의 인식이나 이해가 뚜렷해진 것 같아요. 막연했던 난민이 어떤 뚜렷한 색깔로 우리 사회에 다가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영향이 사람들에게 긍정적이었는지는 제가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닌 것 같아요.”
“내가 본 것을 당신도 볼 수 있다면”
—친선대사 활동을 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을 꼽는다면요?
“(친선대사가 되기 직전) 2015년 남수단을 방문했을 때입니다. 뜨거운 아프리카 벌판에 새하얀 텐트들이 가지런히 놓인 풍경을 밖에서 볼 때는 정돈돼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안정감까지 들었죠. 텐트의 하얀색이 주는 시원함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텐트 안에 딱 처음 들어갔을 때, 그 열기와 악취를 잊을 수 없습니다. ‘와, 여기서 사람들이 대체 어떻게 살 수 있지?’ 싶었어요. 밖에서 보이는 정연함과 그 안의 참혹한 현실이 극명하게 대비됐기 때문일까요. 그 아이러니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긴장감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친선대사로 활동하는 해가 거듭되고, 언론 인터뷰를 할수록 긴장감이 점점 더 커졌습니다. 난민에 대한 저의 생각이 ‘객관적으로 바른 생각이야’라고 교조적인 입장에서 말하면 안 되잖아요. 제가 언행으로 이 사회에 어떤 강요를 해도 안 되고요. 그냥 제가 본 사실과 난민들이 처한 어려움을 어떠한 각색이나 연민을 보태지 않고 전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접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공감해서 난민을 위한 행동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게 제 임무라고 생각했어요.”
—쓰신 책 제목 <내가 본 것을 당신도 볼 수 있다면>(2019, 원더박스)과 같이 활동하려 했지만, 쉽지만은 않았던 거죠?
“책 제목은 그 자체가 가정문으로, 바람이잖아요. 굉장히 어려운 일이죠. 각자의 삶이 다르고 관점이 다른데 어떻게 제가 본 것을 여러분이 꼭 같이 볼 수 있게 하겠어요. 엄청난 이상일 뿐이죠. 제 개인적인 이상이나 지향점이기도 하고요.”
—10년의 활동이 정우성 개인의 선행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됐습니까?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 활동은 선행이 아니었습니다. 이 일을 선행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선행은 개인이 살면서 어떤 작은 여유를 나눠줄 수 있는 행동을 이야기하는 거죠. 해도 되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 하지만 난민 문제는 우리가 모두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반드시 들여다봐야 할 문제입니다. 난민 문제는 결국 분쟁과 폭력, 전쟁이 원인이잖아요. 난민을 통해서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지, 얼마나 인간의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지를 볼 수 있고, 나아가 평화의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난민’과 ‘평화’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2018년 6월, 제주도에 온 예멘 난민들을 두고 ‘난민 신청자를 강제 송환하면 안 된다’고 한 유엔난민기구의 입장문을 공유했다가 비판 여론에 맞닥뜨렸죠?
“당시 우리 사회가 매우 놀랐었는데요. 유엔난민기구도 놀랐고, 저 역시도 놀랐습니다. ‘왜 갑자기 난민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반응과 오해들이 불쑥 튀어나오지?’ 고민이 됐죠. 예멘 난민들이 대한민국에 들어오면 마치 커다란 정치적인 불안과 종교적인 위기가 생길 거라는 대중의 불안을 보면서 저도 혼돈에 휩싸였어요.”
난민 숫자 10년 만에 3배 증가
—멀리 있는 난민들에 대해서는 온정적인 목소리를 냈지만, 막상 우리 사회에 다가온 난민들은 경계하는 우리 사회를 보면서 위기의식을 느끼지는 않았나요?
“당혹감이 있었지만, 위기의식까지 느끼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2017년쯤 이미 난민 문제의 무게감을 더 크게 느끼고 있었어요. 심각성을 깨달은 거죠. 초반 3년(2015~2017년) 동안은 친선대사 일을 하면서 세계에 대한 제 이해가 커질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생각했어요. 임무지(난민 캠프 등)를 방문할 때마다 어떤 분쟁이 왜 있었는지 찾아보고, 인류사도 공부하고 사고를 확장할 수 있어서 좋다고도 생각했거든요. 역사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고요. 그런데 3년이 지나면서 세계가 똑바른 방향으로 계속 앞으로 가지 않을 수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어요. 제가 2015년 처음 활동을 시작할 때 전세계의 난민 수가 4천만 명 정도로 추산됐는데, 2024년 현재에는 1억1400만 명에 이르거든요. 역사의 진보에 대한 의문이 자꾸 들고, 점점 마음도 무거워졌습니다. 그래서 2018년 한국 사회가 예멘 난민 문제로 혼란을 겪을 때, 저 자신은 당황하긴 했지만 담담하게 (비판을) 받아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가 예멘 난민에게서 느꼈던 불안의 실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난민들이 겪는 아픔과 고통에 대해서 가까이 들여다볼 용기의 부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국 사회를 보면 제주 4·3사건, 세월호 등 여러 사회적 참사에 대해 그 원인과 피해를 정확히 파악하고 해결한 적이 사실상 없잖아요. 우리 시민들이 타인의 고통에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인데요. 다른 사람의 아픔을 공감할 때, 그 과정에서 더 큰 아픔에 빠져드는 것을 막기 위한 방어기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봤어요. 또, 난민을 불안하게 느끼는 사람들 또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도 생각했고요.”
—이언주 의원이 바른미래당 소속이던 2019년 “정우성에게 난민이나 이주노동자는 현실의 문제가 아니라 추상적인 문제일 뿐”이라고 발언한 적이 있습니다.
“이 의원께서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난민 문제는 우리 현실에서 먼 거리의 이야기인데 눈앞의 현실에 닥친 문제를 우선 풀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취지에서 말씀하셨을 것 같아요. 맞는 말씀입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우리의 이익이 우선시돼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죠. 하지만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난민 문제의 어려움을 논의할 때 국격이 커진 만큼 책임을 져야 하는 거거든요. 제 얘기도 맞는 겁니다. 다만, 이 둘은 공존해야 하지 어느 게 우선시돼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예멘 난민이 논란이 된 지 6년이 지났는데,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단호하게) 문제가 없다는 게 입증된 거죠. 이들이 제주도를 떠나서 내륙으로 들어와 생활했지만 일각에서 우려했던 범죄 등은 보고되지 않았습니다. 예멘 난민들이 처음 우리 사회에 들어왔을 때 성범죄가 늘어나고 종교 갈등이 생길 거라는 등 불안의 목소리가 많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난민 문제를 정쟁으로 끌고 가는 사람들
—결국 정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보수 진영에선 공격의 빌미로 삼으려 했고, 집권 세력이었던 민주 진영은 난민 문제가 공론화되는 상황 자체를 불편해했던 것 같아요. 비슷하게 느꼈었나요?
“느꼈었죠. 어떤 비겁함도 느꼈고요. 정치인이 정쟁으로 끌고 간 것 같아요. 난민 문제는 인도주의적이고 보편적인 인권의 관점에서 이야기돼야 하는데요. 그 사안을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말을 맞추고 하면서 유엔난민기구의 역할이 공격받기도 했어요. 지역사회에 있는 소외 계층 사람들에게 난민이 반가운 손님이 아닌 것은 사실이죠. 하지만 극우 정치 진영에서 경제적 불평등과 같은 문제의 원인을 난민과 이민자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과연 누구에게 이득이 될지 의문입니다.”
—당시 주무 부처(법무부)의 대응은 어떻게 보셨나요? 한국의 난민 정책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당시 법무부는 시민사회의 불안한 목소리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는 여러분의 불안을 책임지고, 우려하는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대한민국 위상에 맞는 대처를 해나가겠다’고 명징하게 발표하고 안정시켜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한국의 난민법과 난민 정책 자체는 글로벌 스탠다드(국제기준)에 맞게 만들어져 있는데 실행이 잘 안 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고 봅니다.”
—결국 그 공백은 우리 시민사회와 난민인권단체들이 대신 채웠지요?
“그들이 하는 일의 가치는 정말 큽니다. 어떤 한 가족이 낯선 사회에 적응할 때 맞닥뜨릴 수 있는 실질적인 어려움을, 잘 아는 조력자가 도와주면 적응 시간을 많이 줄일 수 있죠. 그건 정말 큰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난민인권단체들이 그 역할을 해주시고 계신 것 같아요. 난민 관련 행사에서 뵙고 인사 나누면 저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주시는데, 오히려 감사를 받아야 할 사람은 그분들이 아닌가 합니다.”
—세계적으로 난민의 수는 빠르게 늘고 있고 한국 사회에서 난민에 대한 오해는 아직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할 일이 많이 남았는데 친선대사를 그만두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가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 친선대사 일을 하면서 피할 수 없는 결과이긴 합니다만, 난민기구의 이미지가 너무 굳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고민이 들었습니다. 저는 친선대사로서의 제 활동이 정치적 색깔 없이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 인식됐으면 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제가 이 일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와 같은 다른 의미들이 얹혀지니까 저에게도 안 좋고, 기구에도 좋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끊임없이 기구와 제게 정치적인 공격이 가해지기도 했고요.”
—앤젤리나 졸리는 2022년 12월 “전쟁과 박해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희생시키며 강대국들의 이익과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다”며 유엔난민기구를 비판하고 특사(Special Envoy)직을 내려놨습니다. 혹시 이러한 비판도 사임의 이유에 포함되나요?
“아마 졸리는 친선대사가 아니라 ‘특사’로서 기구 안 고위 인사들과 소통이 더 많았고 저보다 현장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 목소리를 낸 것 같아요. 저는 기구의 정책을 결정하는 핵심 멤버는 아니어서 그런 이유로 그만둔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유엔난민기구, 당당한 목소리 내길
—유엔난민기구와 함께 일하면서 느낀 점이나 개선을 위한 제언을 줄 수 있을까요?
“유엔난민기구도 국제기구이다보니, 어떤 정책을 결정할 때 정치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구나 생각했습니다. 때로는 조직이 지나치게 조심스럽다거나 관료적이라는 느낌도 받았고요. 해가 갈수록 규모가 커지는 난민을 지원하려면 자원이 부족하고, 어려움이 있다는 건 알겠습니다. 활동하는 국가에서 고려해야 할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도요. 하지만 유엔난민기구는 각 국가의 정치적인 상황이나 입장과는 상관없이 기구의 본분을 지키는 당당한 목소리를 좀더 자신 있게 내주면 좋겠습니다.”
—친선대사 후임자는 혹시 구하셨나요?
“그 부분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잘 찾길 바랍니다. 분명히 있을 거예요. 이제 조금은 젊은 새로운 얼굴을요. 현장에 직접 방문하는 일정이 녹록한 일은 아니지만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저희는 기성세대가 됐고, 또 젊은 세대들이 등장하고 있으니까요. 젊은이들과 더 잘 소통할 수 있는, 저와 같은 이해를 가진 누군가가 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정우성 하면 ‘좋은 어른’이 되고 싶은 꿈을 갖고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선의를 갖고 행동하는 것들이 전달이 안 될 때도 잦잖아요. 왜곡되거나 오해를 사기도 하고요.
“좋은 어른이 되는 건 정말 어려운 꿈인 것 같아요.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좋은 어른들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환경과 조건, 견제와 시기 등이 있는 것도 사실이에요. 어느 순간 우리 사회에서 좋은 어른들이 점점 사라지잖아요. 특정 이해를 함께하는 무리 때문에 좋은 어른들이 배제되기도 하고요. 돌이켜 보면, 저는 그냥 주변으로부터 ‘좋은 어른’이라는 평가를 받고 싶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제 스스로 생각하기에 좋은 어른이기만 하면 됐던 거죠. 그래서 주변에서 친선대사 활동을 보고 ‘좋은 사람이네요’라고 말씀해주셔도 부담스러운 게 사실입니다.”
“좋은 어른이 되는 건 어려운 꿈”
—무척 수고로울 것 같은데, 계속해서 그런 수고로움을 선택하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글쎄요. 어떤 이유가 딱 있어서 선택하는 건 아니에요. 선택한 뒤에 그 선택의 이유를 찾아갈 수도 있는 거죠. 현재 우리 사회에선 어떤 직급·위치에 올라가기 위해 저마다 이유를 만들고 있는데, 그 이유가 너무 사소하다는 생각을 해요. 경험을 내가 소유하고, 그 경험을 토대로 미래에 더 큰 이익을 챙길 수 있는 자양분으로 써야겠다는 목적과 이유들은 소유욕에서 비롯됩니다. 하지만 사심과 공심, 직무와 직책 모든 것이 개인을 위해 존재하고 소유될 수는 없는 거예요. 그렇게 사적인 이유만 선택되고 지켜진다면, 공적인 가치나 공익적 직업이 갖는 중요한 의미들이 사라질 수 있겠다는 걱정을 하고 있어요. 저는 소유보다 존재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친선대사로서 과거에 존재했지만, 그 경험조차도 제가 소유한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의 계획은요?
“다시 배우로 돌아가서 배우로 존재하겠죠. 친선대사를 그만두지만, 제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우리 사회의 소수자 문제나 나눠야 할 이야기가 아직 많잖아요. 더 관심 갖고 지켜보려고 해요. 유엔난민기구와 난민 관련 후원도 계속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또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잖아요. 그럴 때마다 사회 구성원 가운데 한명으로서 작은 힘이라도 보태지 않을까, 그런 활동을 계속하지 않을까 싶어요.”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로서 마지막으로 한마디 한다면?
“‘난민’은 특정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신분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인데, 우리 사회는 그 단어의 의미를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난민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직시할 수 있는 시선을 가진 사회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유엔난민기구(UNHCR)란
1950년 유엔총회 의결로 설립된 유엔난민기구는 이듬해 1월1일부터 업무를 시작했다. 주된 업무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수백만 명을 돕는 일이었다. 애초에는 3년 한시적 기구로 설립됐는데, 지속해서 새로운 난민이 발생하면서 활동 기간이 연장되다가 2003년 상설기구가 됐다. 한국은 1992년 유엔 난민협약 가입국이 됐고, 1994년부터 난민 신청을 받았다. 2013년엔 아시아 국가 최초로 자체적인 난민법을 제정했다.
유엔난민기구는 국제사회가 협력하고 책임을 분담하면 난민 문제를 충분히 관리할 수 있으며, 난민 수용 국가가 적절한 정책으로 지원한다면 난민은 해당 국가의 경제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난민은 기술과 전문성을 계발하고, 미래에 고국으로 돌아가 국가 재건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유엔난민기구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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