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철의 서울지리지] 종로 집값이 1년새 2배 … 조선시대에도 서울은 부동산 불패

배한철 기자(hcbae@mk.co.kr) 2024. 7. 21.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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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한양의 주택 대란
먹고살기 위해 한양으로
양대 전란 겪은 후 지방민 몰려들며
택지 부족으로 최악의 주택난 발생
남대문·동대문 밖으로 분산 수용
눈치 빠른 자들은 투기
65냥 집을 1년만에 140냥에 팔고
그집이 나중에는 450냥으로 뛰어
일부는 중개업으로 짭짤한 수입도
천민들도 비단옷 입고…
사회 안정되며 신흥 부자들 등장
상인·역관이 고래등 같은 집 신축
사람 떠난 지방은 공동화 걱정까지
현대 한국사회의 현상과 판박이

◆ 매경 포커스 ◆

창덕궁 앞 돈화문로 일대의 시가(1931년). 기와집과 초가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미국 의회도서관(무라카미 덴코 촬영)

"종친이나 재상의 집안은 물론, 재산이 좀 있는 일반 선비도 가옥이 화려하고 복식이 찬란하다. …여항(閭巷·여염)의 백성이 부러워하며 본받아서 앞다퉈 사치와 화려함을 숭상한다. 광대나 천민도 비단옷을 입고 맛있는 쌀밥에 고기반찬을 배불리 먹으며 금지할 줄 모르니…."

'승정원일기' 1744년(영조 20) 음력(이하 음력) 4월 2일 기사의 내용이다. 조선 후기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전후 극복이 마무리되고 경제가 안정화 국면에 접어들자 사회 전반에서 사치 풍조가 만연했다. 옷, 장신구, 음식 소비에 돈을 물 쓰듯 했지만 '승정원일기' 언급처럼 과시성 소비의 정점은 주택에 있었다.

법전인 '경국대전'은 신분별 집터(家垈·가대) 크기를 규정했다. 대군·공주는 30부(負), 왕자·옹주 25부, 1·2품 15부, 3·4품 10부, 5·6품 8부, 7품 이하 4부, 서인 2부로 제한했다. 1부는 40평(132㎡)이다. 건물도 상한선을 뒀다. 1431년(세종 13) 건물(家舍·가사) 면적 규제를 보면, 대군 60칸(間·길이나 넓이를 재는 단위), 군·공주 50칸, 옹주·종친·2품 이상 40칸, 3품 이하 30칸, 서인 10칸 이하다. 길이 1칸은 8척(尺)이다. 1척이 30.3㎝이니 길이 1칸은 2.4m이며, 면적 1칸은 5.8㎡(2.4×2.4)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조선후기 가옥 도면'의 서울 주택들은 이런 기준을 넘는 호화 저택이다. 심익현(1641~1683)은 효종의 2녀 숙명공주(1640~1699)와 결혼해 청평위에 봉해졌다. 인경궁(仁慶宮·서촌에 있던 궁궐) 터에 지은 그의 집은 대궐처럼 으리으리했다. '청평위궁 도면'을 보면, 심익현 가옥의 집터는 52부다. 52부는 2080평(6876㎡)으로 실로 엄청난 규모다. 부인 숙명공주에게 허용된 30부를 크게 상회한다. 건물도 165.5칸(290평·959.9㎡)으로, 법을 3배 이상 초과한다. '효종실록' 1654년(효종 5) 6월 3일 기사에 의하면, 좌의정 김육(1580~1658)이 "어찌하여 궁가를 이다지도 과도하게 만듭니까"라고 하자 효종은 "소문이 잘못된 것"이라고 변명했다.

일반 백성들도 고래 등 같은 집을 짓는 데 혈안이었다. '소공동 홍고양 가옥 도면'은 집터 51부, 건물 172칸이다. 홍고양(洪高陽)은 실록 등에 보이지 않는다. 소공동이면 중인계층 밀집 지역이어서 홍고양도 역관이거나 무역을 통해 돈을 번 상인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 역관 출신의 김한태(1762~1823)는 소금 거래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김한태는 예술에도 조예가 깊어 단원 김홍도 등 화가들을 후원했다. 김한태는 사치가 심했고 집은 거대했다. 이조원(1758~1832)의 '옥호집'은 "서울의 큰 장사치, 그의 이름은 김한태. 우람한 저택 수백 칸 저잣거리에 우뚝 솟았네. 그래도 부족하다 여기는지 세 배로 증축하는데…"라고 했다.

조선 후기 한양은 제한된 공간에 인구가 몰리고 대형 주택 선호 현상이 겹치며 최악의 주택난이 발생했다. 택지 부족은 사실 조선 전기에 시작됐다.

숭례문 안팎의 조밀한 민가(1905년). 서울은 조선 후기 전국에서 인구가 몰려들면서 땅값 상승, 주택난이 초래됐다. 어린이들이 서 있는 쪽이 남산방향이다. 호주 빅토리아국립도서관(조지 로스 촬영)

한양은 처음부터 계획도시로 건설됐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재위 1392~1398)는 궁궐과 종묘, 사직 그리고 관청, 시전(市廛) 등 공공용지를 우선 배정하고, 나머지 공지를 왕족 이하 서민에 이르기까지 품계별로 분급했다. 신청자가 도성 내 거주를 희망하는 장소를 선정해 청원서를 제출하면 한성부에서 심사후 입안(立案·인증서)을 발급했다. 토지사용권을 무상으로 부여하되, 가옥세를 징수했다.

도성 면적이 한정돼 있는 현실에서 이주자가 늘면서 인구밀도가 높아졌다. 실록의 조선 전기 한성부 호수변동 기록에 의하면, 1409년(태종 9)은 1만1056호, 1435년(세종 17)은 2만1891호다. 호수가 불과 26년 만에 두 배나 늘어난 것이다. '세종실록' 1435년(세종 17) 9월 2일 기사는 "도성에 인가가 빽빽하여 어린아이가 겨우 두서너 집 문만 지나도 길을 잃어버린다"고 했다. 조정에서는 도성 밖에 방(坊)을 신설해 인구를 분산시키는 정책을 시행했고, 그 결과 동대문, 남대문, 서소문 밖에 밀집지가 등장했다.

그럼에도 조선 중기 이후 서울 과밀화는 심각한 국가 문제로까지 대두된다. 관료가 아닌 일반 백성들도 생계를 위해 서울에 올라와 살기 시작해 경강과 도성 주위에 사람들이 집중됐다. 지방은 공동화 우려가 제기됐다. '승정원일기' 1724년(영조 즉위년) 10월 18일 기사는 "지금 지방에서 겨우겨우 살아가는 자들은 양반이고 평민은 줄줄이 떠나서 남은 사람이 매우 적다"고 했다. 양란 이후 서울을 방어하는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이 창설되고 병력을 지방민에서 충원하자 서울의 인구 확장을 부채질했다. 실록의 한성부 호구조사에 따르면, 1648년(인조 26) 9만5564명이던 서울 인구는 1678년(숙종 4) 16만7406명, 1753년(영조 29) 17만4203명, 1798년(정조 22) 19만3783명으로 가파르게 늘다가 1807년(순조 7)에는 20만4886명까지 증가했다. 학계는 당시 통계 기법 낙후 등을 감안할 때 17세기 후반 20만명, 18세기 전반 26만명, 18세기 후반 31만명, 19세기 33만~34만명 등으로 추계한다.

인구 포화는 땅값 상승과 주택 대란을 초래했다. 한양의 가옥 가격 변동 분석 연구('조선후기 서울 주택가격 변동과 의미'-유현재·김현우)에 의하면, 서울 가옥(기와집+초가) 1칸의 평균(중위값) 가격은 1800년대 초 22.14냥에서 1800년대 말 91.33냥으로 4.1배나 상승했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17세기 초반~19세기 말 가옥 문기' 중 가격 정보가 표기된 268건의 문서를 분석한 결과다.

이 중 초가가 같은 기간 13.03냥에서 97.19냥으로 무려 7.5배나 급등했다. 신분이 낮은 계층의 서울 이주가 많아지며 주택 수요가 초가에 집중되어서였다. 한성부 내에서도 5부(部)마다 격차가 커 중부의 집값이 동부, 서부, 남부보다 2배 이상 높았다.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2024년 현재의 서울 도심. 수도권 편중과 서울 강남 집중 현상은 더욱 극심해지고 있다. 배한철 기자

조선시대 강남이라 할 수 있는 중부는 투기 행위도 극성이었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부동산 매매 문서' 중 17~19세기 한성부 건물·집터 매매는 76건이다. 이 가운데 중부 장통방 흑립전계(종로2가) 가옥(기와집 17칸, 마당 3칸)의 가격 변화는 중심가인 종루 시전(市廛) 주변의 집값 상승 추세를 잘 보여준다. 이 주택은 1730년(영조 6) 첫 거래가 일어난 뒤 1802년(순조 2)까지 72년간 총 12차례 거래됐다. 처음 정은자(丁銀子·은화) 60냥에 매도됐고, 2년 뒤인 1732년 5냥 오른 정은자 65냥에 다시 팔렸다. 이때 집을 구입한 사람은 김진택이라는 인물이다. 김진택은 다시 1년 뒤 집을 조금 개조해 두 배 이상 비싼 정은자 140냥에 매도했다. 1년 새 집값이 두 배 넘게 폭등한 것이다. 이 가옥은 최종적으로는 전문(錢文·동전) 450냥에 거래됐다. 구윤명(1711~1797)의 '전율통보'는 "정은자 1냥은 동전 2냥"이라고 했다.

중부에 인접한 동부 창선방(종로 5~6가)의 가옥(기와집 21.5칸, 마당 28.5칸)도 계속 올랐다. 이 집은 1774년(영조 50) 동전 350냥에 거래됐고 1797년(정조 21) 매매가가 500냥으로 상승했다. 1832년(순조 32) 800냥, 1844년(헌종 10) 900냥에 매매되다가 1852년(철종 3) 1000냥을 넘어섰고 1859년(철종 10)에는 1500냥까지 상승했다.

임차제가 이 시기 처음 탄생한다. 조정에서 주택 부족 해결 방안으로 임차료를 지불하고 집을 빌리도록 권장하자 17세기 이후 세입(貰入)이 보편화된다. 세입자는 지방 출신 고위 관료에서 군병까지 다양했으며 1년 단위로 세를 지급했다. 공인중개사(집주름)도 존재했다. 수입이 좋아 다양한 사람들이 중개업에 뛰어들었다. '영조실록' 1753년(영조 29) 7월 5일 기사에 의하면, 윤성동은 도위(都尉·왕의 사위)의 후손으로 사족이지만 집주름을 생업으로 삼았다.

2024년 현재, 수도권 편중과 강남 집중 현상은 더욱 극심해진다. 김포, 과천, 광명, 구리, 하남 등 주변 도시들은 서로 서울로 편입되려고 한다. 이러다간 대한민국은 사라지고 서울민국이 될는지도….

도시는 멈춘 듯이 보여도 생명체처럼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현대의 모습 속에 켜켜이 쌓인 역사를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서울지리지'는 매력적인 도시, 서울의 모든 과거를 땅속 유물을 건져내듯 들춰봅니다.

▷▷참고문헌

1.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옥호집(이조원), 전율통보(구윤명)

2. 조선후기 서울 주택가격 변동과 의미. 유현재·김현우. 조선시대사학보 제95권. 조선시대사학회. 2020

3. 조선 후기 한성부 상류주택의 규모와 영역별 실구성에 관한 연구. 홍승재·강인선. 한국주거학회 논문집 제22권. 2011

4. 조선시대 서울의 사회변화.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2014

5. 조선후기 한성부 토지·가옥 매매문서 1(중부·동부 편). 서울역사박물관. 2023

[배한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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