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편 절멸하는 게 '합리적'이란 착각 [전쟁과 문학]
홀로코스트 재판과 철학적 사유
유대인 학살 주도했던 아이히만
아르헨티나로 도망가 은둔 생활
체포된 이후 열린 세기의 재판
“상관 명령이었을 뿐” 무죄 주장
아이히만의 사유하지 않은 죄
우리가 팬데믹을 겪으면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 '격리' '방역' '소독' '멸균' '정화' '검출' 등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말일까. 그렇지 않다. 많은 이들이 이 단어를 사용하면 위험으로부터 멀어진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바이러스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반대편의 뿌리를 뽑으면 더 합리적인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관념도 망상이다. 나치 독일은 이 생각이 '틀렸음'을 입증했다.
1942년 1월 20일, 독일 베를린 근교 반제별장에서 나치 수뇌부의 비밀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나치 수뇌부는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을 결의했다. 최종 해결이란 '절멸絶滅(완전히 없앰)'을 의미했다.
나치가 설치한 수용소들은 효율적인 학살을 집행할 최적의 장소였다. 소련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각종 독가스를 실험한 독일군은 1942년부터 전면적으로 유대인 학살에 나섰다. 유대인들을 분류해 수용소로 신속하게 이송하는 작업은 효율적인 공장 운영 작업과 흡사했다.
독일군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년)은 '해결 대상'인 유대인을 이송하는 책임을 맡았다. 전쟁 시작 전 초급장교였던 아이히만은 오스트리아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색출하고 추방하는 과정에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고속 승진한 아이히만은 '최종 해결'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자신의 임무에 완전히 몰입한 그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전쟁으로 군수품을 운송할 철도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아이히만은 2년간 500만여명에 이르는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옮겼다.
1945년 5월 전쟁이 끝나자 뉘른베르크에서 전범 재판이 열렸다. 당시 중령이었던 아이히만은 공군 이등병으로 신분을 속인 채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있었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아이히만의 이름이 언급되자 연합군 정보부는 탐문을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아이히만은 포로수용소를 탈출했다.
1950년, 아이히만은 나치 비밀조직의 도움을 받아 이탈리아를 거쳐 아르헨티나로 도주했다. 대표적인 친독親獨 국가인 아르헨티나에는 나치 이념을 신봉하는 독일계 이주민들이 많았다. 그들의 비호 아래 아이히만은 신분을 세탁했다.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아이히만은 오스트리아에 머물던 가족들까지 불러들였다. 아이히만의 평온한 삶은 1960년까지 이어졌다.
1957년, 독일 헤센주의 검찰총장 프리츠 바우어는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중요한 정보를 넘겼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거주하는 '실비아 헤르만'이라는 여성이 제보한 정보였다.
실비아는 자신의 남자친구 '니콜라스 아이히만'을 의심했다. 실비아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니콜라스는 유대인 학살을 주도한 자기 아버지의 업적을 자랑스럽게 떠벌렸다. 프리츠 바우어는 실비아가 제보한 정보를 서독이 아닌 이스라엘 정보부에 넘겼다. 나치 잔당들에게 정보가 누설될 것을 우려해서였다.
이듬해 모사드는 아르헨티나로 요원들을 파견했으나 그들은 클레멘트로 개명하고 외모를 바꾼 아이히만을 알아보지 못했다. 클레멘트가 아이히만이라는 사실을 확신한 프리츠 바우어는 계속 정보기관 '모사드'를 설득했다. 마침내 모사드는 아이히만 체포 작전에 나섰다. 체포 임무를 맡은 모사드 요원들은 대부분 홀로코스트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즉결 처형을 원했다.
하지만 이스라엘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1886~1973년)은 아이히만을 생포하라고 요원들을 거듭 설득했다. 벤구리온 총리는 아이히만을 이스라엘 법정에 세워 홀로코스트의 진실을 세계에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1960년 5월 11일, 모사드 요원들은 아이히만 검거에 성공했다. 요원들은 아르헨티나 독립 150주년 기념행사에 초청된 이스라엘 방문단이 타고 오는 전용기에 아이히만을 몰래 옮길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정부의 요청으로 5월 11일로 예정된 이스라엘 방문단의 입국이 5월 19일로 늦춰졌다. 모사드 요원들은 은신처에서 아이히만과 열흘간 동거하면서 출국일을 기다렸다. 5월 20일, 항공사 승무원으로 위장한 모사드 요원들은 마취시킨 아이히만을 이스라엘로 압송하는 데 성공했다. 크리스 와이츠 감독은 자신의 영화 「오퍼레이션 피날레(2018년)」에 아이히만 검거 작전의 과정을 사실적으로 재현했다.
1961년 4월 11일, 이스라엘에서는 세기의 재판이 열렸다. 폴 앤드루 윌리엄스 감독의 「아이히만 쇼」는 이 재판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다룬 영화다. 영화에서 영국 BBC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방송국 PD들은 아이히만의 얼굴을 연신 클로즈업했다. PD들은 화면을 보면서 경악했다. 재판 내내 아이히만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수천구의 유대인 시신을 불도저로 매장하는 화면을 보면서도 그는 무덤덤했다.
아이히만은 태연하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는 전쟁 중 자신이 정책을 결정하거나 목표를 설정할 권한이 없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단지 상관의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1961년 12월 11일, 법정은 아이히만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 사형을 선고했다. 당시 법정에 앉아 재판을 지켜본 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년)는 아이히만이 매우 정상적인 상태라고 생각했다. 아이히만의 정신을 감정한 정신과 의사들의 소견도 같았다.
아이히만을 악마로 묘사하는 언론의 보도와는 달리 그와 상담한 의사들은 모두 아이히만이 긍정적이고 온화한 성품을 가졌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한나 아렌트는 이 재판에서 드러난 아이히만의 모습을 '사유하지 않는 인간'의 전형이라고 분석하면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유명한 화두를 남겼다.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폴란드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1925~2017년)은 「현대성과 홀로코스트(1989년)」에서 한나 아렌트의 사유를 구체적으로 확장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홀로코스트는 독일인의 악마성에서 비롯된 비극이 아니라 합리성을 극단적으로 추구한 결과라고 역설했다.
홀로코스트는 현대적 합리성을 바탕으로 유대인들의 인격을 제거했기에 가능했다. 당시 독일인들은 유대인을 절멸하면 더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살충제를 뿌려 벌레를 제거하면 환경이 깨끗해진다는 생각과 흡사한 믿음이었다.
그러나 벌레는 결코 살충제로 박멸할 수 없다. 팬데믹을 겪으면서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 '격리' '방역' '소독' '멸균' '정화' '검출'들은 어떠한가. 현대적이고 세련된 이 단어들을 사용하면서 사람들은 위험으로부터 멀어진다고 착각한다. 나치와 아이히만은 퇴출시켜야 할 벌레나 바이러스의 자리에 단지 유대인을 배치했을 뿐이다. 섬뜩하고도 서늘한 진실이다.
이정현 평론가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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