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사상가 왕후이 “역사 흐름 속 ‘일대일로’, 개도국 위한 새로운 상호연대 질서”

정원식 기자 2024. 7. 21.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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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대표 사상가 왕후이 칭와대 교수
‘근대중국사상의 흥기’ 한국어판 완역
백원담 성공회대 석좌교수와 대담
“일대일로 중국 내 과잉생산 설비 이전”
“글로벌사우스의 소통과 연대 위한 것”
왕후이 중국 칭화대 교수(왼쪽)와 백원담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지난 18일 서울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대담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지금 세계는 기후위기와 패권 경쟁, 가자지구 전쟁과 우크라이나 전쟁, 대만해협 양안과 남중국해의 긴장 등 여러 위기가 맞물리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다중위기의 시대에 사상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중국 신좌파 지식인이자 중국을 대표하는 사상가로 꼽히는 왕후이 칭화대 교수는 백원담 성공회대 석좌교수와 대담에서 역사의 긴 흐름 속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서방이 중국의 영향력 확대 프로젝트라고 생각하는 일대일로(一带一路) 사업에 대해서는 글로벌사우스(Global South·주로 남반구에 있는 개발도상국들)와의 소통과 연대라는 측면에서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두 학자의 대담은 지난 18일 서울시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이뤄졌다.

다중위기 시대 사상의 역할

백원담=최근 방대한 저작인 <근대중국사상의 흥기>가 중국에서 출간된 지 20년 만에 한국어로 완역됐다.

왕후이=큰 감동을 느낀다. 이 책이 출판됐다는 것은 한국 학계가 중국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아시아가 동일한 사상적 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백원담=책이 어려워서 꼼꼼히 번역하고 역주를 다는 등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노력했다. 학자들 사이에서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많이 읽혔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왕후이=번역은 단순한 언어 변환이 아니라 공동의 창조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저자로서 작은 일을 했을 뿐이지만 번역을 통해 제 책이 다른 세상으로 가서 새 생명을 얻고 자신만의 운명을 개척했다고 생각한다.

백원담=17일 성공회대에서 ‘포스트글로벌 시대 한·중 관계와 사상 회통’이라는 주제로 학술회의가 있었다.

왕후이=포스트글로벌 시대 동아시아 공동의 운명을 논하는 자리였다고 생각한다. 포스트글로벌 시대 아시아와 동아시아, 그리고 전 세계가 다중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함께 토론할 필요가 있다. 중국과 한국만이 아니라 아시아 전체 지식인이 공동체를 만드는 운동을 일으켰으면 한다. 우리 공동의 운명에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백원담=지금 세계 정세가 심상치 않고 한반도와 대만해협 양안에 위기감이 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국가가 못 찾으니 우리가 찾아야 하는데 코로나19를 거치면서 학자들이 함께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다 사라졌다. 세계가 일극적 글로벌 패권 체제로부터 다극적 체제로 전환한다고 하는데, 중국이 이를 주도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중국이 어떤 이념 지형 위에서 이끌어가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왕후이=깊이 공감한다. 코로나19로 인한 단절이 있었고 지역 차원과 글로벌 차원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특히 지식의 변화가 시대의 흐름을 못 따라가고 있다. 과거의 지식으로 지금 시대의 변화를 충분히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마주한 도전은 그 나름의 역사적 맥락을 갖고 있다. 한반도의 긴장, 대만해협 양안의 위기,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은 모두 과거에 있었던 위기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것이다. 코로나19도 마찬가지다. 과거와 다른 것은 위기가 개별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단일위기가 아니라 다중위기다. 공중보건의 위기, 군사적 위기, 경제 위기, 정치 체제의 위기 등이 다중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위기는 좀더 깊이, 폭넓게 다뤄야 한다. 깊이 있게 다뤄야 한다는 것은 우리 시대만 보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긴 흐름 속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확산하며 사람들은 이익과 물질만 생각하게 됐다. 사상과 관념이 여전히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줄었다. 그러나 복합위기 속에서 우리는 더욱 사상과 관념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긴 역사 속에서 보아야 자본주의가 맞닥뜨린 위기와 조건을 분석할 수 있다. 20년 전 <근대중국사상의 흥기>를 쓴 것도 이런 동기에서다. 현재의 문제를 볼 때 현재의 시각에 국한되면 안 된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축적된 사상적 자원을 가지고 바라봐야 한다.

백원담=<근대중국사상의 흥기>는 송나라 때부터 청말민초(청나라 말기·중화민국 초기)까지 약 1000년에 이르는 사상사의 흐름을 살피면서 중국이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설명한다. 현대의 문제를 어떻게 재인식할 것이냐의 관점에서 의미가 크다.

왕후이=중국 송나라 때는 군현제가 성숙하고 시장경제가 시작되고 장거리 무역이 발달했던 시기다. 오래된 공자의 사상 같은 것으로는 그 시대의 변화를 설명해낼 수 없었다. 원리적인 것, 이론적인 것으로써 세상을 분석하고 설명할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천리의 세계관이 탄생해 당시의 세상과 조응했던 것이다. 청대에 이르면 다양한 종교와 민족, 언어가 섞여 왕조가 만들어지면서 많은 문제에 직면했다. 여기에 아편전쟁 등 서방 열강으로부터의 침입도 있었다. 지정학적·경제적 위기는 복합적이었고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아주 심대한 것이었다. 당시 시상가들은 이 위기를 인식하고 토론했다. 그러한 비판적 사고 위에서 개혁과 변혁이 잉태될 수 있었다. 현대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기술이 점점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나는 이것을 과학공리관이라고 지칭하는데, 과학공리관이 천리관을 대체하면서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어가고 있다. 우리가 과거의 역사와 사상을 연구한다고 해서 지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하나의 시사점, 사상적 출발점은 찾을 수 있다.

왕후이 중국 칭화대 교수(왼쪽)가 18일 서울 프란치스코회관에서 백원담 성공회대 교수와 대담을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글로벌사우스와 일대일로

백원담=최근 중국 학계에서 글로벌사우스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왕후이=글로벌사우스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생각해야 한다. 유럽 역사를 보면 19세기에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이라는 이중혁명을 통해 근대성의 토대가 다져진다. 20세기는 19세기와 다르다. 20세기는 자본주의 세계의 주변부에서 많은 운동과 혁명이 일어나면서 시작됐다. 이러한 운동과 혁명은 바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의해 촉발됐다. 20세기 첫 혁명은 1905년의 러시아 혁명이다. 1906년 페르시아(이란)에서 혁명이 있었고, 1908년에는 튀르키예에서 혁명이 있었다. 일본에서도 사회개혁 운동이 일어났고 1915년부터 1919년까지 중국에선 신문화운동이 일어났다. 한국에선 1919년 3·1운동이 있었다. 되돌아보면 20세기 혁명은 아시아에서 시작됐다. 이것이 글로벌사우스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글로벌사우스의 근원과 관련해 반둥회의(1955년 4월 아시아·아프리카 29개국 정상들이 인도네시아 반둥에 모여 식민주의 종식과 비동맹 중립을 선언한 회의)와 비동맹운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반둥회의와 비동맹운동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서로 연대하고자 했다. 이것은 지금 미국이 추구하는 동맹과는 다른 것이다. 비동맹이란 서로 연대하되 동맹하지 않는 것이다. 평등한 토대 위에서 상호 연대가 가능하다. 각자 선택한 성장의 길과 각자가 처한 조건들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미국은 전 세계적 차원에서 디커플링(탈동조화)을 추진하고 있는데, 달러 패권은 포기하지 않고 있다. 또 달러 사용에서의 디커플링은 주장하지 않는다.

백원담=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대해 중국 내 과잉생산 설비를 이전하려는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

왕후이=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 사업들은 대부분 인프라 건설이다. 이러한 대규모 투자는 단기간에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런 투자의 목적은 중국의 성장 경험을 바탕으로 제3세계 국가들이 자체적인 성장의 토대를 구축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아프리카와 남미의 일대일로 프로젝트 현장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들은 ‘지금 추진하는 사업들은 막대한 비용이 투입되는 것으로 20~30년 걸리는 대규모 사업이다. 영리를 추구하는 일반 기업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일대일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나타난 민족해방과 탈식민 운동을 토양으로 하고 있다. 일대일로에 참여하는 국가들은 탈식민과 민족해방의 역사를 갖고 있다. 일대일로는 회랑(corridor)과 다리(bridge)다. 중국의 문화적 맥락에서 이것은 소통과 연대를 의미한다. 산과 강을 건너서, 바다를 넘어서 연결된다는 것은 물질적 연계를 넘어서는 정신적인 연계를 의미한다. 이는 참여국들의 문화적인 자주성과 능동성을 존중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상호연결·연대의 반대편에는 독점이 있다. 금융, 과학기술, 대량살상 무기, 자연자원, 미디어의 독점이 그런 것들이다. 일대일로에 다양한 지역과 국가들이 참여해 이러한 독점을 타파해 나가길 바란다. 일대일로가 추구하는 것은 중국만이 아닌 글로벌사우스가 만드는 새로운 글로벌 질서다.

백원담=중국이 만나는 세계는 우리와 다른 것 같다. 다양한 관계에 대해 열려 있는 것이 중국의 역사적 전통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은 중국이 세계와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가 적은 것 같다.

왕후이=역사를 연구하면서 전 세계 사상계와 대화를 나눠왔다. 칭화대인문사회과학고등연구소와 유엔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는 지난해부터 공동으로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 포럼을 개최해왔는데, 내년에는 캄보디아에서 열릴 예정이다. 불교문화가 아시아에서 새로운 보편성을 찾는 데서 중요한 자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구 사상을 제외한 다른 것들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것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이야말로 서구 중심적 해석이다.

왕후이(汪暉) | 중국 신좌파 이론가로 서구에서 가장 주목받는 중국 사상가 중 한 명이다. 베이징 중국사회과학원에서 루쉰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칭화대 중문과 교수이자 고등인문사회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대표 저작으로 <근대중국사상의 흥기>, <아시아는 세계다>, <단기 20세기> 등이 있다.

백원담 | 중국문화, 아시아 냉전, 동아시아 사상 연구에 관심을 가진 중국 전문가로 성공회대 석좌교수다. 대표 저작으로 <열전 속 냉전, 냉전 속 열전>, <냉전아시아의 문화풍경>, <동아시아 문화선택 한류> 등이 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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