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판석표 연출의 힘…‘대박’나려고 만든 드라마 ‘작품’이 되다
“그냥 죽여줄 것 같았어요.”
지난 14일 서울 마포의 한 콘텐츠 제작사에서 만난 안판석 감독은 의외의 말을 꺼냈다. 지난달 30일 종영한 드라마 ‘졸업’(tvN)은 대치동 학원 선생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며 문학이 실종된 사회를 투영하고, 인간의 세속적 욕망을 비췄다고 평가받았다. 정작 연출을 한 안 감독은 “결과적으로 평소 내 생각이 스며드는 것일 뿐, 처음부터 메시지를 정하고 그것을 보여주려고 드라마를 만들진 않는다”고 했다. ‘안판석’ 하면 작가주의 감독, 작품성 우선주의 감독 아니었나. “저도 대중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감독이에요.(웃음) 지금껏 제가 선보인 드라마는 모두 그때그때 ‘대박’날 것 같아서 만들었어요.(웃음) ‘졸업’은 어떻게든 성공하고 싶어서 머리 쓰고 허덕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재미있을 것 같았죠.”
1987년 문화방송(MBC) 입사 이후 37년 동안 그가 만든 드라마 대부분 장르 불문 ‘죽여주기’는 했다. ‘아줌마’(2000)는 주부의 홀로서기를 다루면서 당시 기준에서는 도전적으로 교수 남편을 통해 지식인들의 허례허식을 비판했고, ‘하얀거탑’(2007)은 드라마에서 처음으로 병원 내 권력 다툼에 주목하며 인간의 욕망을 정면으로 들여다봤다. ‘밀회’(2014)처럼 연상연하 커플의 멜로를 보여주면서도 예술계의 권위의식과 이중성을 짚는 등 작품마다 한국 사회의 곪은 문제들을 날카롭고 품위 있게 찌르며 재미와 의미를 모두 뽑아냈다. 그 과정에서 그가 인간의 삶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안판석표’ 공통 질문이 만들어졌다. 시청자들이 드라마를 통해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 하는 의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그는 “내가 생각하는 사회는 복마전”이라며 “삶은 과정의 반복이고 그래서 고통스럽지만, 그럼에도 인생은 과정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의 드라마는 주인공이 여러 장애물을 뛰어넘고 나아가는 어느 시점에서 멈추는 경우가 많다. ‘하얀거탑’ 장준혁(김명민), ‘밀회’ 오혜원(김희애)처럼 인물들이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완전한 악인도 선인도 없다. 우리는 누구나 욕망을 갖고 있고 어떤 사건을 겪으며 미처 생각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졸업’에서도 학생들의 성적을 끌어올리는 데 혈안이었던 서혜진(정려원)이 제자이자 후배 선생인 이준호(위하준)를 만나면서 비로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안 감독은 “인간은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인간의 본질은 어떤 예민한 분기점이 있을 때 드러난다. 그러면서 반성적 자아가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 속에서 진정한 나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졸업’이란 제목은 “진짜 나 자신을 알게 된 뒤 잘못된 인생을 접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반성적 자아로 과정을 바라보는 것. 안 감독이 37년간 ‘죽여주는 이야기’를 만들어온 비결이기도 하다. 안 감독의 작품은 인물들이 저마다 사연을 갖고 차근차근 이야기를 쌓아가면서 “이게 말이 돼?”라는 반문 없이 빠져들게 한다. “모든 신은 다 괜찮아야 한다” “드라마는 개연성이 중요하다” “드라마는 인간을 탐구해야 한다” 등을 염두에 두고 대사 한마디, 인물 한명까지 존재 이유를 명확하게 부여하려고 반복해서 애쓴 덕분이다. ‘졸업’에서 이준호와 서혜진이 사귀기로 한 다음날 학원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순간의 감정을 뒷모습으로 보여주는 연출로 시청자들이 행간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는 틈을 주기도 한다. 안 감독은 “우리는 일상에서 누군가의 뒷모습에서도 어떤 감정을 느끼지 않나. 어떤 순간에도 누군가의 인생 속 한 단면을 보듯, 말이 되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졸업’을 하면서는 “한 인간을 알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생각에, 줄거리와 등장인물을 미리 정해놓지 않고 한회 한회 만들어갔다고 한다. “‘학원 강사 이야기를 한다. 주인공이 어떤 문제로 학교에 찾아가고 사건이 터진다. 남자는 옛날에 가르쳤던 제자인데 좋은 회사를 그만두고 강사가 되려고 한다’는 설정만 갖고 출발해 1부를 완성하고 나면 다시 2부를 생각하는 식으로 문학의 문맥으로 한발 한발 나아갔다.” 과정은 고통스러웠지만 ‘졸업’ 속 많은 인물들이 저마다 욕망을 드러내며 한명 한명 생생한 인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인권이 있는 현장’이었기에 매 장면 시간에 쫓기지 않고 집중해서 담아낼 수 있었던 듯했다. 안 감독은 모든 장면을 어떤 구도로 담을 것인지 치밀하게 구상해 와서 현장에서는 꼭 필요한 촬영만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혹시 몰라서~” 한 장면을 전신, 상반신, 클로즈업 등 여러 컷 촬영해두는 잘못된 방식을 깼다. 드라마에서 주 52시간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전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밀회’ 때에도 그랬다. ‘밥 잘 사주는…’ 주연배우 정해인은 “드라마 촬영하면서 하루 7~8시간 자본 적은 처음”이라고 놀라기도 했다. 안 감독은 “‘생각하는 일’이 직업인데 잠도 자고 밥도 먹고 수다도 떨고 해야 작품이 나올 수 있다. 그저 모든 사람이 늘 보내는 일상처럼 건강하게 지나가다가 드라마가 나오길 바랐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배우들이 함께 작업하고 싶은 감독으로 꼽는데, “배우들이 내 작업 방식을 알고 참여해도 막상 촬영을 시작하면 ‘내가 잘 나오고 있는 게 맞는 걸까’ 불안해져서 내게 슬쩍 물어보곤 한다”며 웃었다.
그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나아가고 있는 배우들에게도 많은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란다. 작품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연기 잘하는 배우들을 대거 기용하며 그들이 빛날 수 있는 판을 깔아주기도 한다. 길해연, 서정연, 김정영, 이화룡, 백지원 등 현재 한국 드라마의 수준을 높여주는 배우들 모두 안 감독의 작품에서 얼굴을 알렸다. ‘졸업’에서도 학교 선생 표상섭 역할의 김송일 등 많은 배우들이 주목받았다. ‘졸업’에서 고등학생 이시우 역으로 데뷔한 차강윤 등을 차기작 ‘협상의 기술’에서 이제훈과 한 팀으로 나오는 주요 배역에 발탁하기도 했다. 안 감독은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에게 많은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며 “30년 넘게 연출하면서 실력 있는 배우들을 볼 줄 아는 눈을 갖게 된 건 자산”이라고 했다. 그는 “내가 기회를 준 게 아니라, 그들은 원래 완성된 배우들이고, 내가 어마어마한 배우들을 만나 오히려 도움을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안 감독은 건강 문제 등 여러 이유로 한동안 작업을 쉬었다. ‘졸업’은 ‘봄밤’(2019) 이후 5년 만에 나왔다. 드라마와 떨어져 있던 시간이 아쉬웠는지 지난 1월 ‘졸업’ 촬영이 끝나자마자 일주일 쉬고 차기작 ‘협상의 기술’ 촬영에 들어갔다. 그는 대본을 읽으면 그림이 그려지고, 인물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일이 재미있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 소설가가 되고 싶어서 여러 문학을 접했고 늘 문학을 생각해온 것이 연출가로서 필요한 근육을 단련시킨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문학은 사고력을 증진시키는 ‘드라마의 기초’라고 했다.
문학의 중요성은 ‘졸업’에서도 강조되는 대목이다. 학원 강사와 인문학도가 모여 “학교나 학원에서도 문학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공부 그 자체로서의 공부가 인류를 이만큼 성장시켰다”면서 문학을 존중하고 예찬한다. 플랫폼이 다양해지면서 서사와 개연성이 사라지고 소셜미디어(SNS) ‘짤’로 유행할 법한 장면들을 모아놓은 드라마가 쏟아지는 가운데, 인간을 탐구하며 삶의 과정을 곱씹게 하는 ‘안판석표 드라마’는 드라마 업계에서 문학 같은 존재가 아닐까. “25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시학’에서도 스토리텔링(이야기 전개)의 중요성을 강조해요. 드라마에서 중요한 건 이야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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