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스텔에서 성폭행·살해 당한 여성, 범인은 옆집 남자였다 [정락인의 사건 속으로]
피해자 씻기고 정액 묻은 시트까지 오려가며 흔적 지워
(시사저널=정락인 객원기자)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한 오피스텔 4층에는 K씨(여·29)가 미혼인 언니와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2005년 7월 언니가 해외로 장기 출장을 떠나자 K씨는 한동안 오피스텔에서 약혼자와 함께 지냈다. 약혼자는 K씨와 시간을 보낸 후 다음 날 새벽 5시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출근했다. K씨는 결혼을 앞두고 있는 상태였다.
결혼 넉 달 앞둔 예비신부의 비극
같은 해 8월11일 부산에서 K씨의 고등학교 동창생인 H씨(여·29)가 올라왔다. K씨는 H씨에게 약혼자를 소개해 주고 저녁을 함께하며 같이 시간을 보냈다. 이날 약혼자는 자신의 집으로 갔고, 오피스텔에는 K씨와 H씨 둘만 남게 됐다. 한동안 K씨의 결혼 얘기로 수다를 떨던 두 사람은 침대에서 함께 잠에 든다.
다음 날 새벽 5시30분쯤 H씨는 알람소리에 눈을 떴다. 부시시한 눈으로 앞을 보니 흉기를 들고 있는 괴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꿈인 줄 알았으나 실제 상황이었다. 이때까지 옆에서 자고 있던 K씨는 이런 상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겁에 질린 H씨는 괴한과 눈이 딱 마주치고 만다. 그때였다. 괴한이 흉기를 휘두르며 H씨에게 달려들었고, 본능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복부를 무려 7차례나 찔린 H씨는 피를 흘리며 실신한다. 괴한은 H씨가 죽었다고 판단하고 이불째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이때 H씨의 비명을 들은 K씨도 잠에서 깨어난다. 방 안에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친구는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고, 자신의 눈앞에는 괴한이 흉기를 들고 서있었다. K씨는 위험을 직감하고 비명을 질렀으나 이내 괴한에게 제압당한다. 괴한은 K씨에게 흉기를 들이대며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K씨는 겁에 잔뜩 질려 있었다. 이런 그를 괴한은 한참 노려보더니 본심을 드러내며 K씨의 옷을 벗게 했다.
그다음에 변태적인 성행위를 요구하며 욕구를 채웠다. 이 과정에서 K씨가 심하게 반항하자 옆구리와 팔 등을 찔렀다. 괴한은 연이어 세 번이나 K씨를 성폭행했다. 완전범죄를 노린 괴한은 K씨를 욕보인 후 욕실로 끌고 가 몸을 씻게 하는 등 주도 면밀하게 움직였다. 자신의 DNA가 남아있을 것을 우려해 흔적을 없애려고 한 행동이다.
결국 괴한은 K씨의 손과 발을 테이프로 결박한 후 노끈으로 목 졸라 살해한다. 괴한은 방을 나서기 전에 자신의 흔적을 지우는 것을 잊지 않았다. 테이프를 이용해 침대에 떨어진 체모를 수거하고, 시트에 자신의 정액이 묻어있자 그 부분을 가위로 오려냈다. 그다음 청소기를 돌린 후 먼지봉투까지 빼서 가져갔을 정도로 치밀했다.
약 3시간 후인 오전 9시30분쯤 H씨가 깨어났다. 다행히 급소를 피해 치명상은 피할 수 있었다. H씨는 침대 위에 있는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흔들었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목에는 끈으로 졸린 흔적이 있었다. H씨는 112에 전화를 걸어 힘겨운 목소리로 "내 친구가 죽고 나는 칼에 찔렸다. 빨리 와달라"고 신고했다. 경찰은 119와 함께 현장으로 출동해 H씨를 병원으로 옮기고 K씨의 시신을 수습했다.
오피스텔 CCTV에 외부인 흔적 없어
경찰은 수사본부를 차리고 용의자 추적에 나섰다. 당시 오피스텔에는 엘리베이터 CCTV가 설치돼 작동하고 있었다. 오피스텔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디지털 잠금장치가 돼있는 현관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만약 범인이 외부인이라면 반드시 현관문을 거쳐야 하고, CCTV에도 찍혀 있어야 했다.
하지만 오피스텔 CCTV에서는 아무런 단서도 나오지 않았다. 사건이 발생한 시간대에 오피스텔에 드나든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사건이 일어난 호실에는 강제로 침입한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잠금장치를 파손하지 않고 열었다는 것은 조작법을 잘 알고 있거나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으로 볼 수 있었다. 경찰은 범인이 오피스텔 내부 구조를 잘 알거나 오피스텔 내부 사람일 것으로 추정했다. 또 피해자 지갑 속에 있던 카드와 현금이 그대로 있고, 도난당한 물품이 없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범인의 목적이 오로지 피해자인 K씨였다고 볼 수 있었다. K씨 시신의 팔과 옆구리 등 몸 곳곳에 상처가 있었는데 이것은 저항하는 과정에서 생긴 흔적으로 판단됐다.
경찰은 범인의 치밀함에 혀를 내둘렀다. 현장에 흉기, 교살한 도구뿐만 아니라 지문은커녕 머리카락 하나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웃집을 탐문했으나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우선 면식범에 의한 범행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에 나섰다. 용의 선상 1순위에 오른 것은 K씨의 약혼자였지만 의심할 만한 점이 없었다. 오피스텔 호실의 주인도 조사했으나 이상한 낌새는 발견하지 못했다.
경찰 수사가 제자리를 맴도는 상황에서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의 부검 결과가 나온다. 피해자가 성폭행을 당했고, 질 안에서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DNA가 나왔다는 내용이다. 이것과 일치하는 사람만 찾으면 범인을 잡을 수 있었다. 경찰은 K씨의 주변 남성을 대상으로 DNA를 대조했으나 일치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수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이때쯤 병원 중환자실에 있던 H씨가 깨어난다. 경찰은 H씨를 찾아가 범인 목격 내용에 대한 진술을 요청했다. 하지만 H씨는 악몽을 떠올리기가 힘들다며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게 몇 번을 설득한 끝에 "나이는 2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쯤 되고, 170cm 키에 보통 체형"이라는 진술을 받아냈다.
경찰은 오피스텔 입주자를 대상으로 수사를 확대했다. 당시 오피스텔에는 약 320세대, 10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경찰은 구강세포를 채취하기 위해 입주자들의 협조를 구했으나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입주자 전부의 DNA를 채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경찰은 입주자 중 H씨가 진술한 인상착의를 토대로 DNA 채취 대상을 10여 명으로 압축했다. 이들의 DNA를 피해자의 몸에서 검출된 정액과 대조했더니 이 중 한 명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는 피해자 K씨 바로 옆집에 입주해 있던 김아무개씨(28)였다. 범인은 바로 사건 현장 코앞에 있는 '옆집 남자'였던 것이다.
김씨의 차 트렁크에서 나온 가방 안에서는 범행에 사용한 흉기와 목을 조른 전기선 등 범행도구가 나왔다. H씨에게 김씨의 모습이 담긴 비디오를 보여줬더니 "이놈이 범인 맞다"고 확인해 줬다. 경찰은 사건 발생 2주 만에 김씨를 전격 체포한다. 그는 처음에는 혐의를 완강하게 부인했으나 경찰이 제시한 증거 앞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그러면서 사건 전말도 드러났다.
제대로 잠기지 않았던 현관문이 비극 불러
김씨는 교사로 재직 중인 부모 밑에서 여유 있게 자랐지만 사회성이 부족했다.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후 관련 회사에 취업했으나 얼마 못 버티고 그만두었다. 그렇게 입사와 퇴사를 6번이나 반복했다. 범행 전에는 광고회사에 다니다 사표를 내고 무직 상태였다. 김씨는 오피스텔 앞에서 담배를 피우다 옆집에 사는 피해자를 알게 된다. 그에게 첫눈에 반한 김씨는 호감을 갖는다.
이때부터 매일 피해자의 오피스텔 앞을 서성거렸다. 담배를 피우는 척하며 K씨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다시피 했다. K씨가 약혼자와 함께 오피스텔 안에 있을 때는 현관문에 귀를 대고 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엿듣기도 했다. 김씨의 집착은 심해졌고, 그럴수록 K씨를 향한 성적 욕구는 커져만 갔다.
김씨는 K씨를 차지하겠다고 마음먹고 범행 기회를 노린다. 그의 약혼자가 오피스텔에 와서 K씨와 함께 지낸 후 새벽에 나간다는 사실도 파악한다. 김씨는 K씨가 혼자 있는 그때를 노리기로 한다. 범행에 사용할 흉기와 도구도 미리 준비했다. 그리고 사건 당일 K씨의 약혼자가 나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간에 담배를 피우는 것처럼 밖으로 나왔다. 그는 주변을 살핀 후에 피해자가 사는 오피스텔 현관문을 살짝 열었다. 손잡이가 돌아가더니 쉽게 문이 열렸다.
K씨는 분명 문을 잠갔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자동잠금장치가 설치된 문은 꽉 닫지 않으면 간혹 문이 열리기도 한다. K씨의 현관문 또한 이러했고 하필 이때 김씨가 문을 열어본 것이다. 현관문만 제대로 잠겼더라도 친구와 함께 있던 K씨는 화를 면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방 안으로 침입한 김씨는 K씨 혼자 있는 줄 알았으나 친구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당황한다. 그 찰나 H씨와 눈이 마주치자 흉기를 휘두른 후 계획대로 범행을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김씨는 범행 당일 오전에는 미리 예정된 입사 면접을 보는 등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행동했다. 김씨는 강간살인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돼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범행 수법이 잔인하고 치밀할 뿐만 아니라 범행을 감추기 위해 증거를 없앤 점 등을 볼 때 김씨를 사회에서 무기한 격리시킬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김씨는 현재 19년째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당시 서초경찰서에서 사건을 담당했던 이인열 강력팀장은 2017년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소설 《열대야》를 출간해 화제를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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