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벤져스급 출연진, 공주가 된 햄릿 등… 고전 명작 ‘햄릿’, 골라보는 재미
햄릿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고뇌하기보다 “우리는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일갈
이호재·전무송·박정자 등 ‘이해랑 연극상’ 수상자만 11명…이승주, 루나 등 30∼80대 배우 조화
국립극단, 코로나19로 온라인 극장에 머물렀던 ‘햄릿’ 3년 8개월만에 무대 올려
햄릿 공주 등 등장인물 성별 바꾸고 그에 맞춰 내용도 손질한 젠더 벤딩 작품
정의감 넘어 왕권에 집착하다 파멸하는 햄릿 공주…‘봉련 햄릿’, 이봉련의 열연 돋보여
세계적 고전으로 생명력이 긴 예술작품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시대와 세대, 국경을 초월해 울림이 크다.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샘처럼 창작 고통에 시달리는 후대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400여년 전 작품인 셰익스피어 ‘햄릿’도 그중 하나다. 온갖 군상과 관계를 통해 인간 본성과 부질없는 욕망을 예리하게 포착한 ‘햄릿’은 여전히 전 세계 무대에 자주 오른다. 창작진에 따라 색다른 ‘햄릿’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가 있다. 2016년과 2022년에 이어 올해 세 번째 시즌인 신시컴퍼니 ‘햄릿’(연출 손진책, 각색 배삼식)과 2021년 제작됐으나 코로나19 사태로 이제야 무대에서 관객과 만나는 국립극단 ‘햄릿’(연출·윤색 부새롬, 각색 정진새)이 그렇다. 10월엔 예술의전당이 ‘햄릿’(연출 신유청, 각색 황정은)을 CJ토월극장에서 공연한다.
“광대든 단역이든 참여하는 것 자체가 행복합니다.”(손숙, 배우2 역)
“배우라면 누구나 꿈꾸는 연극이고, 특히 햄릿 역은 남자 배우라면 누구나 해보고 싶은 역할인데 처음 하게 돼 기쁩니다. 특히 이런 분들과 한 무대에 같이 선다는 게 큰 영광이에요.”(이승주, 햄릿 역)
이번 공연은 국내에서 ‘햄릿’을 처음 선보인 이해랑(1916∼1989) 탄생 100주년이던 2016년 ‘이해랑 연극상’ 수상자 9명이 출연한 초연과 강필석(햄릿 역), 박지연(오필리어 역) 등 젊은 배우가 가세한 2022년 재연에 이어 세 번째다. 이번에도 배역과 상관없이 어떤 무대에 서든 존재감이 대단한 호화 출연진을 자랑한다. 이해랑 연극상 수상자 배우만 해도 이호재, 전무송, 박정자, 손숙, 김재건, 정동환, 김성녀, 손봉숙, 남명렬, 박지일, 길해연 11명에 달한다.
실제 전체적인 작품 분위기가 그전 무대와 상당히 달라졌다. 예컨대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라고 고뇌하는 햄릿이 아니라 “우리는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는 법을”이라고 일갈하는 햄릿을 만날 수 있다. 이중 거울을 벽처럼 세워 햄릿의 분열적 모습과 등장인물 간 감시의 눈초리 등 각양각색 모습이 드러나거나 감추어지게 한 무대 연출도 돋보인다. 연극 시작과 끝에 등장인물 모두가 의자를 들고 나와 몽환적 상태에서 같은 동작을 하는 장면은 ‘삶이 연극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야기 줄기가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우리 고유 말맛과 리듬을 잘 살린 배삼식 작가 글솜씨 덕에 ‘햄릿’의 주옥 같은 대사가 쏙쏙 귀에 들어온다. 무엇보다 한국 연극계의 전설적 원로와 중추, 미래인 배우들이 어우러져 뿜어내는 힘이 대단하다.
‘햄릿’ 공연 수익금 일부는 한국연극인복지재단과 차범석(1924∼2006) 탄생 100주년을 맞은 차범석연극재단에 기부돼 연극인 복지 환경 개선과 창작희곡 발굴에 쓰인다. 공연은 9월 1일까지.
국립극단이 창단 70주년(2020년) 기념작으로 준비한 ‘햄릿’은 팬데믹(감염병 세계적 유행) 여파로 이듬해 국립극단 온라인 극장에만 공개됐다. 그럼에도 평단·관객 호평과 재공연 요청에 따라 3년 8개월 만인 지난 5일 서울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올랐다. 등장인물 성별을 바꾸고 그에 맞춰 내용도 새로 손질한 젠더 벤딩(Gender Bending) 작품이다. 햄릿을 공주로 설정하면서 연인 오필리어는 남성, 가까운 친구 호레이쇼는 여성으로 바뀌는 식이다. 부새롬 연출과 정진새 작가가 ‘이 시대 관객들이 보고 싶어하는 햄릿’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싸맨 결과다.
극 중 햄릿 공주는 검투에 능한 해군 장교 출신으로 원작과 달리 왕권을 차지하려고 고군분투한다. 호레이쇼에게 “착한 공주는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악한 공주는 뭐든지 할 수 있다”며 야욕을 숨기지 않는다. 이처럼 국립극단 ‘햄릿’은 원작의 가족 내 복수극과 달리 권력 암투극 성격이 짙다. 정진새 작가는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원작에선 햄릿이 어떤 왕이 되고자 하는지가 안 나온다”며 “정복 전쟁을 통해 나라를 통치한 선왕과 달리 해군 장교까지 역임하며 국가 시스템을 이해하고 다른 이상을 품은 햄릿 공주를 그리려 했다”고 말했다.
이어 “자신이 생각한 정의를 실현하려다 (왕권 획득을 위한) 더 큰 욕망에 잠식당한 채 잘못된 길에 들어 죽음을 맞는 햄릿을 찾아가고(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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