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디지털교과서로 종이·연필 대체하려는 건 위험한 발상”···신경과학자의 경고

반기웅 기자 2024. 7. 21.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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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내년부터 전국 초·중·고교에 인공지능(AI) 디지털교과서를 도입한다. AI 디지털교과서를 통해 학생들에게 개인별 맞춤 학습을 제공한다는 취지다. ‘교육 디지털화’를 추진하는 나라가 한국 뿐만은 아니다. 일본은 올해부터 전국 초·중교 영어 수업에 디지털교과서를 활용하고 있다. 내년에는 수학 등 다른 과목으로 확대할 방침이다.

사카이 구니요시 교수가 19일 도쿄대 연구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반기웅 기자

사카이 구니요시(酒井 邦嘉) 도쿄대 대학원 종합문화연구과 교수(기초과학)는 디지털교과서 도입을 반대하는 신경 과학자다. 그는 교육의 디지털화가 아이들의 능동적 사고력을 저하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유아기에 잦은 디지털 콘텐츠 노출 역시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앗아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공간 단서’ 남기는 종이와 연필은 검증된 도구

19일 도쿄대 코마바 캠퍼스 연구실에서 만난 사카이 교수는 인터뷰에 앞서 연필과 메모지부터 꺼냈다. 그는 기억력을 기르는 핵심 도구로 ‘종이와 연필’을 꼽았다.

제본된 종이 교과서는 사진이나 문단, 내용이 고정돼 있어 ‘공간적 단서’가 변하지 않는다. 종이 교과서를 읽고 나면 ‘이쯤에 이런 내용’이 있다는 사실이 뇌에 각인된다.

그러나 디지털교과서는 화면마다 내용이 다르게 배치된다. 콘텐츠도 수시로 확대·축소된다. 각 페이지마다 단서가 있는 종이 교과서와 달리 디지털교과서는 스크롤 하는 순간 단서를 잃게 된다. 전원을 끄는 동시에 교과서의 ‘실체’는 사라진다.

사카이 교수는 “종이 교과서로 학습을 하고 필기를 하면 능동적으로 생각 하게 된다. 어디에 어떤 내용을 메모했는지, 받아 쓸때 선생님이 무슨 얘기 했었는지를 떠올리게 된다. 이런 에피소드들이 모두 단서로 남아 더 잘 기억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방적인 ‘정답’ 노출 반복···학습 효과 낮아

디지털교과서가 내세우는 수준별 맞춤형 학습 효과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선천적으로 난독증이 있는 학생의 경우 음성 변환 기능을 활용하면 양질의 교육을 제공할 수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특수한 사례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수업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에게 실시간으로 더 많은 정보를 줘서 이해를 돕겠다는 건데, 이런 방식은 ‘이쪽에 정답이 있으니 이걸 보라. 여기로 따라 오라’는 일방적인 정보 노출의 반복에 불과하다. 학습 증진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다”고 했다.

사카이 구니요시 교수가 19일 도쿄대 연구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반기웅 기자

모르는 개념을 그때 그때 디지털 화면에서 검색과 클릭(링크·QR코드)으로 습득하는 방식은 편리하지만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빼앗는다. 떠먹여 주는 ‘검색’에 익숙해지다보면 자신만의 논리를 짤 수 없게 된다. 능동적으로 사고하지 않고 ‘정답’만 받아 먹다보면 틀리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검색을 통한 정보를 활용한 ‘평론가’는 늘었지만 스스로 생각하는 ‘연구자’가 줄어든 이유다.

‘검색’으로 정보 획득…사고할 기회 빼앗아

사카이 교수는 “생각하기 전에 검색부터 하는 풍조가 일반화되고 있어 걱정이 크다. 검색을 안 해도 SNS에 ‘무엇에 대한 답을 달라’고 하면 답을 얻을 수 있으니 스스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학습 뿐만 아니라 스마트폰 SNS에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되는 정보들이 집중력을 떨어뜨려 업무 효율성이 낮아진다. 스마트폰 덕분에 능동적으로 액티브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일뿐 생산적인 활동은 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불편한 필름 카메라가 디지털 카메라보다 뛰어난 ‘작품 사진’을 남길 수 있는 이치를 설명하며 ‘생각의 힘’을 강조했다.

필름 카메라는 디지털 카메라와 달리 현상까지 시간이 걸린다. 실시간으로 결과물을 확인할 수 없다. 바로 여기서 두 카메라 간 사진 퀄리티에 차이가 생긴다.

“필름 한정된 카메라에서 더 좋은 사진 가능”

“작품 사진을 찍는다고 가정해보자. 필름 카메라는 찍을 수 있는 기회가 제한적이다. 한정된 필름 안에서 결과물을 내야 하기 때문에 사진사는 치밀한 촬영 계획을 세운다. 예컨대 ‘일단 10장은 이런 구도, 빛 아래서 연습 삼아 찍고, 다음 10장에 승부를 건다. 나머지는 예비로 다른 각도에서 찍어보자’는 식이다. 하지만 디지털 카메라는 무한정 연속으로 찍는다. 일단 찍은 다음 더 나은 사진을 골라내는 방식이다. 무의식적인 촬영이 가능하기 때문에 현 시점에서 나온 결과물만 신경을 쓴다. ‘과거’의 사진을 놓고 평가할 뿐 ‘미래’의 촬영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필름 카메라는 다르다. 앞으로의 촬영에 대해 계속 고민한다. 인간이 더 많은 생각을 하도록 하는 필름 카메라가 더 좋은 결과물을 남길 수 있다”

인간은 자유롭지 않고 불편할 때 뇌를 쓴다. 한정된 자원에서 더 많은 생각을 한다는 게 사카이 교수의 지론이다. 이런 관점에서 교과서에 AI를 접목하려는 시도는 위험한 발상이다.

사카이 교수는 “이미 많은 학생들이 AI를 작문에 활용해 자신의 문장을 쓰지 못하고 있다”며 “AI 의존도가 높아지면 학습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각도 AI가 대체하게 된다. 교육에 AI 도입 만큼은 절대 막아야 한다”고 했다.

사카이 구니요시 교수가 19일 도쿄대 연구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반기웅 기자

이미 디지털 전환이 이뤄진 사교육 시장에 대해서도 우려했다. 학원·교육업체 입장에서는 관리가 편리하고 더 경제적이지만 학생들에게는 필요한 지식을 납작하게 축소해 공급하기 때문에 뇌 속 ‘생각의 가지’가 뻗어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학습 관련해 기억해야 할 배경 지식들이 압축돼 컴팩트하게 저장되도록 프로그램을 짜는데, 이런 학습은 교육이 아닌 경제적인 접근 방식에 불과하다. 어느 날 어느 공간 어떤 기온에서 무엇을 하고 배웠는지 불필요한 정보도 통째로 기억하는 것이 인간의 뇌인데 이 기능을 오히려 축소시키게 된다”고 했다.

미취학 아동들의 디지털 콘텐츠 노출 빈도가 높아지고 있는 현상도 심각하게 보고 있다. 대표적으로 유튜브는 쏟아내는 정보량이 무척 많은 반면 정보 공급 방식은 일방적이다. 유아기에도 나름의 사고를 통해 생각을 정리하고 정보를 습득해야 하는데 유튜브는 그런 과정을 생략한 채 무차별적으로 정보를 주입한다.

“유아기 유튜브 과다 노출, 사고력에 악영향”

사카이 교수는 “자신만의 페이스로 스스로 정보를 습득하는 힘을 기르는 게 중요하다”며 “부모가 그림책을 읽어주고 듣는 과정에서 이뤄지는 커뮤니케이션 역시 뇌에 중요한 기억으로 자리잡는데 이런 소통은 유튜브로는 절대 할 수 없다”고 했다.

사카이 교수는 다른 나라와 비교하며 경쟁적으로 교육 디지털화를 추진하는 추세를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디지털을 수단으로 경제를 활성화려는 자본과 새 정책 도입을 업적으로 삼는 정치인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실효성과 부작용에 대한 검증 없이 속도전을 벌인다는 것이다.

사카이 교수는 “현 세대는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스스로 비교해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었지만 지금 아이들은 옵션이 없다”며 “이미 역사를 통해 손색없이 훌륭한 학습 도구로 증명된 종이와 연필을 검증 안된 디지털로 대체하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고 말했다.

도쿄 | 반기웅 일본 순회특파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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