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독일 소재 독립운동 사적지를 가다…"역사 학습하고 공유해야"
한인회의 주동 '포츠담 한인구락부'…건물은 리모델링·표지판 없이 흔적만
(베를린=연합뉴스) 김귀근 기자 = 한여름 베를린은 뙤약볕이 내리쬐고 하늘은 푸른 물감을 풀어놓은 듯 파랬다.
나무 그늘 밑에는 간혹 산들바람이 너울거려 더위를 식혀주지만, 그늘을 벗어나면 금방 땀방울이 맺혔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청년들, 가방을 등에 메고 바삐 걷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며 100여년 전 독일에서 유학하며 조국의 독립을 꿈꿨던 한인 유학생들을 떠올렸다.
한여름 파란 하늘을 감상할 여유마저 마음 한켠에 내어주지 못한 채 전공 서적을 뒤로 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했을 청년들의 모습에 가슴이 먹먹했다.
고국에서 8천㎞가 넘는 머나먼 타국에서 청춘을 내던져 독립을 갈망했던 그들의 흔적은 베를린과 포츠담에 남아 있었다.
독립운동가 후손들, 사적지 탐방…독일 '기억문화'도 체험
광복회의 '독립영웅 아카데미' 제1기 수강생으로 구성된 '독일기억문화탐구단'(이하 탐구단)은 지난 17일(이하 현지시간)과 19일 독일 거주 한인 및 유학생들의 독립운동 사적지를 방문했다. 독립운동가 후손 9명이 참여했고, 의병장 이강년 선생의 외손자 김갑년 고려대 교수가 단장을 맡았다.
아울러 독일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저지른 범죄를 기억하고 반성하는 목적으로 설치한 희생자 추모시설과 강제 수용소도 둘러보고 교훈을 찾는 시간도 가졌다. 독일은 전쟁 범죄를 반성하고, 미래세대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하지 말자며 교육과 기념행사, 추모 활동을 하고 있다. 이를 독일 특유의 '기억문화'라고 한다.
일제 강점기 유럽지역에서 가장 많은 한인 유학생이 있었던 곳은 독일이다. 당시 중국에서 발급한 여권으로 입국한 많은 유학생은 대부분 어렵게 고학 생활을 하면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 일제 만행을 알리는 대외 선전 활동, 유럽지역에서 열리는 국제대회 참가 등 주로 외교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을 폈다.
베를린에 있는 재독한인회·유덕고려학우회를 비롯해 베를린 도심에서 약 25㎞ 떨어진 포츠담에 있는 한인구락부가 이들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 이들 3곳은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이 15년 전 발굴해낸 곳이다.
독립기념관과 광복회 자료에 따르면 재독한인회는 독일 한인들이 1923년 10월 26일 관동대지진 때 일제의 조선인 학살 만행을 세계에 알릴 목적으로 '재독한인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서는 '한국에서의 일본의 폭정'이란 제목의 선전물을 영어와 독일어로 작성해 배포했다. 일제의 침략과 식민통치·학살만행 등을 고발했고,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사실을 알리며 한국 독립을 위한 지지를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7월의 독립운동가' 황진남 지사도 베를린대학에서 유학 중 이 대회에 참가했다.
탐구단은 당시 재독한인회가 있던 베를린 아우구스부르게어 슈트라세 23번지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1950년께 리모델링된 7층짜리 아파트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건물 입구 외벽에는 아동심리학자 멜라니 클라인이 1921년부터 1926년까지 거주했다는 플라스틱 표지판이 붙어 있지만, 재독한인회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어떠한 표식도 없어 안타까웠다.
두 번째 방문지인 유덕고려학우회는 1921년 1월 유럽지역에서 최초로 결성한 한인 유학생 단체라고 했다.
일본 경찰의 집중적인 감시를 받았던 학우회에는 상하이 임시정부 파송 유학생 16명을 포함해 독일 10개 대학 유학생 88명이 참여했다. '7월의 독립운동가' 김갑수 지사가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유학 중 이 학우회의 첫 간사장을 맡았다.
학우회가 있었던 베를린 칸트 슈트라세 122번지 건물은 5층짜리로, 1층에는 상가가 있고 2~5층까지 아파트로 사용됐는데 현재 내부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이었다. 베를린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훔볼트 대학과는 약 5~6㎞ 떨어진 곳이다.
탐구단에 속한 김구 선생 장손자 김용정 씨는 학우회가 있었던 건물을 둘러본 뒤 "이국에서 헌신하신 독립운동가분들 덕분에 우리가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유덕고려학우회 정신을 이어받아 최선을 다하겠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세 번째 방문지인 포츠담 한인구락부 터는 차량 통행이 번잡한 도심에서 한참을 걸어가자 나타났다.
한인구락부가 있던 건물은 사라지고 나무 몇 그루와 잔디가 무성한 공터로 남아 있었다. 한인들의 독립운동단체였던 이 구락부는 관동대지진 때 일본의 조선인 학살 만행 규탄을 위한 베를린 재독한인대회가 열렸을 때 주동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일제는 이곳을 '기밀정사'(機密政社)로 지칭하며 주시했다. 독립기념관이 발굴한 일본의 정보수집 자료에는 주말에 유학생들이 모여 회의했으며, 조선인학생구락부와 같아 보인다고 기록돼 있다.
1920년대 초반, 유학생들이 구락부를 결성해 독립운동했던 포츠담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연합국 대표들이 한 자리에 모여 발표한 포츠담선언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재확인했던 곳이다. 당시 유학생들은 20여년 뒤 이곳에서 일본 항복 촉구와 한국의 독립을 재확인하는 회담이 열릴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김갑년 교수는 이번 탐구단 방문 목적에 대해 "피해자의 고통을 기억하고 역사적 책임을 지는 의무적인 기억은 독일 민주주의의 도덕적 기반이자 독일 연방공화국의 존재 이유였다"면서 "역사적인 사건을 학습하고 공유함으로써 우리는 서로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독립운동 사적지에 '표지판' 설치가 과제…주독한국대사관서 임시 보관
광복회는 베를린 재독한인회와 유덕고려학우회가 있던 건물에 표지판 설치를 추진하고 있다. 중국 등 다른 지역보다 덜 부각된 유럽지역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을 알리고 기억하자는 취지에서다.
이번 탐구단 방문 때 구리로 제작한 표지판 두 개를 현지로 가져왔다. 이들 표지판을 사적지 건물에 부착하려면 건물주와 거주자들의 동의를 일일이 받아야 한다.
재독한인회가 있었던 건물은 현재 30여 가구가 거주하는 아파트여서 거주자들의 동의만 있으면 가능하다고 한다. 현재 거주자 상당수가 표지판 설치 취지를 이해하고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베를린에서 전시 및 이벤트 업체를 운영하는 정수빈 대표가 표지판 설치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정 대표는 "표지판 설치 의도를 거주민들에게 전달해 놓은 상황"이라며 "주민들 상당수가 동의하고 있다. 앞으로 계속해서 동의를 구하고 설득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베를린 재독한인회 건물에 설치할 표지판에는 "이 장소는 독일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관동대지진 때 일본이 저지른 만행을 세계 각국에 널리 알릴 목적으로 1923년 10월 26일에 모여 '독일에 있는 한인들의 위대한 회의'를 개최한 곳이다"라는 문구가 한글과 독일어로 씌어있다.
유덕고려학우회에 표지판에도 한글과 독일어로 단체명과 주요 활동상을 요약한 기록을 새겼다.
그러나 유덕고려학우회가 있던 건물은 소유주와 연락이 닿지 않아 협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 대표는 "건물 소유주와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계속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탐구단은 표지판을 설치할 수 없게 되자 주독일한국대사관에 협조를 요청했다.
임상범 주독일대사의 초청으로 대사관을 방문한 탐구단은 표지판 설치 추진 취지를 설명하고 대사관과 주독한국문화원에 도움을 청했다. 그러면서 표지판 설치가 성사될 때까지 대사관에서 임시로 보관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임 대사는 흔쾌히 요청을 받아들였고, 앞으로 설치와 관련한 방안들을 찾아보겠다는 뜻도 피력했다.
three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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