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지 입은 '햄릿 공주'가 묻는다…"약한 자여 그대는 누구인가"

오보람 2024. 7. 2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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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가 쓴 희곡 '햄릿'에 나오는 이 대사는 책이나 무대를 접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말이다.

덴마크의 왕자 햄릿이 남편의 친동생과 결혼한 어머니를 더럽다며 비난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햄릿을 여자로 설정한 데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절대 약하지 않기 때문이다.

햄릿 역을 맡은 배우 이봉련은 작은 체구가 주는 연약한 이미지와 햄릿은 남자여야만 한다는 편견을 깨고 복수의 화신으로 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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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 연극서 여자로 설정된 햄릿…여성혐오 요소 덜어낸 각색 눈길
국립극단 연극 '햄릿' 공연 장면 [국립극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여자!"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가 쓴 희곡 '햄릿'에 나오는 이 대사는 책이나 무대를 접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말이다.

덴마크의 왕자 햄릿이 남편의 친동생과 결혼한 어머니를 더럽다며 비난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그러나 국립극단이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하고 있는 연극 '햄릿'에선 이 대사가 없다. 햄릿을 여자로 설정한 데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절대 약하지 않기 때문이다.

'햄릿 공주'는 대신 이렇게 묻는다.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작품은 단순히 햄릿의 성별을 바꾸는 데서 그치지 않고 원작에 있던 여성혐오 요소를 상당 부분 걷어냈다. 400여년 전 쓰인 원작을 보며 눈살이 찌푸려졌던 경험을 이 작품을 보는 동안에는 하지 않아도 된다.

햄릿이 마음에 품은 오필리어 역시 여자에서 남자로 바꿨다. 햄릿이 그에게 폭력적으로 굴거나 희롱하는 모습도 당연히 사라졌다.

오필리어는 죽기 전 하얀 면사포를 쓴 채 등장한다. 반면 햄릿은 대부분 검은색 셔츠에 슬랙스 차림이고 멜빵바지를 입거나 장화를 신기도 한다.

국립극단 연극 '햄릿' 공연 장면 [국립극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클로디어스가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햄릿이 광기에 휩싸이고, 결국 주요 등장인물 모두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는 스토리는 원작과 같다.

하지만 햄릿의 캐릭터는 완전히 바뀌었다. 진실을 알고서도 복수를 망설이는 우유부단함은 간데없고, 치밀하게 복수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주체적인 인물로 재탄생했다.

그를 움직이게 하는 건 복수심이기도 하지만 왕위를 향한 욕망이기도 하다. 그는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자신을 제치고 왕이 된 삼촌을 자리에서 끌어내리려 한다.

그래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햄릿의 대사는 존재론적 고뇌가 아니라, 복수와 왕위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무릅쓰겠다는 결기를 담은 말로 다가온다.

햄릿 역을 맡은 배우 이봉련은 작은 체구가 주는 연약한 이미지와 햄릿은 남자여야만 한다는 편견을 깨고 복수의 화신으로 분한다.

물구덩이 안에서 레어티즈와 아찔한 칼싸움을 벌이는 등 몸을 아끼지 않는 연기도 눈에 띄지만, 무엇보다 감정을 폭발하는 연기가 압권이다.

아버지의 망령을 본 뒤 도저히 사람에게서 날 것 같지 않은 기이한 소리를 내며 울부짖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무릎을 감싸 쥐고 공포에 질린 얼굴로 벌벌 떨다가, 미친 척 고함을 지르다가,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비탄하는 등 변화무쌍한 감정선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봉련은 이 역할로 2021년 백상예술대상 연극 부문 최우수 여자연기상을 받았다. 당시에는 코로나19 여파로 온라인으로만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지만, 이젠 그의 연기를 직접 볼 수 있다.

국립극단 연극 '햄릿' 공연 장면 [국립극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원작과 달리 배경을 '어느 곳, 어느 때'로 설정한 '햄릿'은 정치권력에 대한 풍자도 빼놓지 않는다.

"이 나라엔 진상 조사가 유행이 됐어", "예술가랍시고 국가 지원 좀 받으려는 거지", "이런 개돼지 같은 놈들" 등 위정자들이 뱉는 대사는 요즘 시대와 맞물려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이 작품은 정진새 작가가 각색을, 부새롬이 윤색과 연출을 맡았다.

이봉련 외에도 클로디어스 역의 김수현, 왕비 거투르드 역의 성여진, 총리 폴로니어스 역의 김용준, 오필리어 역의 류원준 등이 출연한다.

서울 공연은 오는 29일까지 이어지며, 다음 달 9일부터는 세종예술의전당에서 상연한다.

ramb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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