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국가대표를 꿈꾸던 북한군 민경병사, 한국에서 영화배우가 되다[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미래의 꿈은 통일 이후 평양영화대학 총장
정 씨의 눈앞에는 남쪽 파주·연천 지역이 펼쳐져 있었다. 고개를 약간 돌리면 대성동 마을에서 펄럭이는 태극기가 손에 잡힐 것처럼 가까이 보였다. 항상 가고 싶었던 곳이었다. 당장이라도 가고 싶었지만 가족이 걸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옥 같은 이곳의 생활을 앞으로 9년 이상 더 버틸 자신은 더더욱 없었다. 군에 온 지 1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불합리한 모습에 신물이 났다. 무엇보다 권력이 있고 돈 있는 집 자제들은 평양에서 근무하고 최전방에는 대부분 노동자나 농민의 자식들이라는 게 싫었다. 그나마 일부 있는 간부 자제들은 편안한 근무지에서 시간만 떼우고 있었다.
이런 세상을 지키기 위해 한 평생을 바칠 수는 없었다. 그렇게 30분 넘게 갈등하던 그는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가자, 가다 죽더라도 가자.”
결정에는 당시 그가 근무하던 주변지역 환경도 영향을 미쳤다. 한 달 전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 카눈의 영향으로 탈북의 가장 큰 장애물로 여겨지는 2200볼트 철조망과 220볼트 철조망, 가시철조망 등이 모두 망가진 채 복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결심이 서자 정 씨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총과 수류탄 2발, 탄약 90발, 쌍안경 등 갖고 있던 장비를 모두 갖고 쓰러진 철조망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2년이 흐른 이달 3일 그의 인생에 오래 기억될 큰 일이 또한번 펼쳐졌다. 이날 개봉한 영화 ‘탈주’의 엔딩크레딧에 정하늘이라는 이름이 또렷하게 올려진 것이다. 그것도 두번이나 나온다. 영화제작 자문과 단역출연자로서다. 올해로 30세. 길지 않은 그의 인생이 영화보다 더 많은 드라마로 채워진 사연을 들어봤다.
● 태어나니 ‘장마당세대’
정 씨는 전형적인 북한의 ‘장마당세대’이다. 1994년 그가 함흥에서 태어났을 때 김일성은 이미 죽었고, 고난의 행군이 막 시작된 시기였다. 당시에는 배급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화학공장 노동자였던 아버지는 아무 것도 주지 않는 직장을 죽을 먹으며 억지로 다녀야 했고, 어머니는 장마당에서 빵과 떡을 팔았다. 아이를 맡길 곳이 없던 어머니는 그를 업고 장사를 했다. 그에게 영유아기가 장마당의 왁자지껄한 소음으로 채워진 이유다.
4살이 넘자 업기 버거워진 그를 어머니는 집에 가둬두고, 장사를 나갔다. 소음 가득했던 세상이 순식간에 침묵과 고독으로 바뀐 것이다. 이때를 회상하면 단편적으로 하루 종일 부모가 돌아오는지 문 앞에서 기다리던 일, 들어오는 어머니 손에 무엇이 들려있는지 살펴보던 일들이 떠오른다.
어머니가 떡장사를 할 때엔 죽을 입에 달고 살았다. 다행히도 그가 다섯 살이 되던 해 시작한 신발장사로 형편이 나아지면서 그는 처음으로 쌀밥을 구경했다.
7살이 되던 해 정 씨는 남들처럼 인민학교에 입학했다. 2학년 때엔 축구에 꽂혔다. 전교 1등을 하면 축구를 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부모님의 다짐을 받고, 공부에 매달려 최우수 성적을 받아냈다. 이후 정 씨의 삶은 축구로 채워졌다. 11살에 중학교로 진학해서도 축구부의 에이스였다.
그런데 어느날 어머니가 보위부에 끌려가 밑천을 다 뺏기는 일이 터졌다. 이후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고, 그는 다시 죽으로 하루하루를 버텨야만 했다. 돈이 없어 신발과 양말을 몇 번씩 기워신는 일도 이어졌다.
하지만 축구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무엇보다 축구로 성공하고 싶었다. “어렸을 때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보면 타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후 비행기를 타려면 외교관이나 체육인, 예술인이 돼야 한다는 사실을 듣고, 그 중 가능성 있는 국가대표 축구선수가 되기로 맘을 먹었어요.”
● 갑작스러운 군 입대
2010년 졸업을 1년 앞둔 중학교 5학년이 되자 진로를 정할 시기가 왔다. 16살에 불과했지만 정 씨는 국가대표가 되려면 실력도 중요하지만, 부모의 권력과 재력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지방 체육단에 가던가, 대학 체육학과에 진학하든가, 군대에 입대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앞의 두 선택에는 많은 돈도 필요했다는 것이다. 현실을 깨달은 그는 쉽게 군에 입대하기로 맘을 먹었다.
이듬해인 2011년 3월 중학교를 졸업하자 친척 한 명이 1년 정도 운전을 배우고 군에 가면 운전병으로 편하게 군 복무를 할 수 있다고 귀띔했다. 그는 심지어 자기가 관련 교육을 주선해주겠다는 제안하기도 했다.
그 말을 믿은 그는 제법 동네에서 떨어진 산을 찾았다. 군 입대 전 부모님에게 소토지(개인 화전)라도 남겨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혼자 나무를 자르고 뿌리를 들어내고 풀을 뽑아 200평 정도 밭을 만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지금 당장 군에 입대하라는 연락이 왔다.
결국 집에 돌아와 그는 곧바로 군복을 입어야 했다. 그런 모습에 어머니는 “군에 가는 다른 애들은 1~2년 전부터 보약을 먹이는데, 나는 1년 뒤에나 갈 줄 알고 아무것도 먹이질 못했다”며 눈물을 흘렸다.
군 입소행 열차를 타는 날 아침 그는 가족에게 “영웅이 되어 돌아오겠다”고 했다. 군에 입대하는 자녀들이 부모에게 하는 의례적인 인사였다. 그런데 어머니는 “내겐 죽은 영웅이 필요없다. 엄마에겐 아들이 필요하다”며 무사귀환을 신신당부했다.
어머니가 그에게 건넨 병사수첩에는 “달을 향해 쏜 화살이 달을 맞힐 수는 없지만, 땅을 향해 쏜 화살보다 멀리 간다”는 격언이 손글씨로 씌여있다. 정 씨는 이를 아직도 인생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그는 열차가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가장 환경이 열악한 것으로 알려진 강원도만 가지 않으면 좋겠다고 바람만 있었다. 다행히 그의 마음을 헤아려주듯 열차는 개성에 도착했다. 역사를 나서자 이전에 본적이 없는 글씨체가 씌어진 버스들이 눈에 띄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개성공단 출퇴근 버스였다.
● 영양실조와의 전쟁
열차에서 내린 정씨와 동료들은 신병훈련소까지 꼬박 이틀을 걸어야만 했다. 연료난 때문에 신병들을 실어 나를 자동차마저 구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힘겹게 도착한 훈련소에서 직면한 현실은 처참했다. 2~3개월 먼저 입대한 신병들 대부분이 영양실조에 걸려 좀비처럼 보였다. 정 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입대할 때 62㎏이었던 몸무게가 3개월 훈련을 마친 뒤 45㎏로 줄었다.
옥수수와 쌀이 7대 3 비율로 섞인 밥을 주었는데 늘 허기가 졌다. 자고 나면 광대뼈가 솟구친다는 말을 실감했다. 훈련도 고됐다. 오전 6시부터 밤 10시까지 쉬지 않고 굴러야 했다.
주변 농장으로 모내기와 김매기 지원도 수시로 나갔다. 북한에선 중학교 3학년, 만 13~14세 때부터 1년에 두 달 정도 농촌동원을 다닌다. 그래서 일반 신병들은 모내기가 익숙하다. 그러나 축구부의 특혜로 농촌동원을 면제받았던 정 씨는 모든 일이 서툴렀다. 덕분에 구타를 당하기도 여러 차례였다.
논에서 다른 신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흙탕물에 쓰러져 매맞던 기억은 지금도 치욕처럼 가슴에 남아있다. 귀순 직후 받은 조사 때 “여기도 모내기를 해야 하냐”고 물었을 정도다. 조사관이 “그걸 왜 하냐”고 답변하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훈련 기간이 끝나고 8월이 되자, 함께 온 동료들이 하나둘씩 흩어졌다. 부대를 정하는 기준은 가축의 품종을 결정하는 일과 비슷했다. 대열참모가 와서 옷을 홀딱 벗기고 엉덩이를 살펴서 배치할 부대를 정했다.
엉덩이 골에 손가락 하나가 들어가면 허약 1기, 2개가 들어가면 허약 2기, 3개가 들어가면 허약 3기로 나뉘었다. 허약 정도가 심할수록 약골로 판단돼 좋지 않은 부대로 배치된다. 몸무게가 45㎏에 불과했지만 운동으로 다져진 정씨의 신체상황은 다른 신병들보다 나았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군관을 따라 하루종일 길을 걸었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2군단 산하 민경부대였다. 민경부대는 적들이 마주보는 곳에 위치한 부대라 체격이 좋은 사람들을 선별해 배치한다. 북한군에서도 에이스 중의 에이스만 갈 수 있는 곳이다.
과거 이곳에 오려면 신병 훈련만 따로 1년씩 받으며, 격술과 사격술을 연마해야 했다. 그런데 정 씨가 입대할 쯤엔 그냥 영양실조가 덜한 신병이 가는 곳으로 바뀌었다.
중대에 도착하니 또 바지를 벗고 엉덩이를 내밀어야 했다. 훈련소에서 어느 정도 손상이 돼 왔는지를 판단하는 것 같았다.
민경중대엔 보양소라는 시설을 자체 운영했다. 이곳에선 3개월 정도 아무 것도 시키지 않고, 먹고 재우기만 했다. 허약해진 신병들이 군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쓰러지다보니 부대에서 ‘살을 찌워 잡아먹는’ 묘책을 낸 것이다.
나중에 북한군 최정예 부대로 불리는 민경부대도 정원을 채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소대 정원 37명 가운데 8명 정도가 허약환자로 병원이나 보양소에 보내졌기 때문이다.
● 김정일 사망일의 밥도둑
2011년 12월 19일 추운 겨울날이었다. 그때까지 정 씨는 보양소에 머물렀다. 갑자기 정오에 당장 모두 중대 교양실로 모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매우 드문 지시라 병사들이 모두 어리둥절해 했다.
보양소로 다가가는 도중 갑자기 곡성이 터져 나왔다. TV에선 김정일 사망 소식을 눈물과 함께 알리는 이춘희 아나운서의 울음 섞인 목소리도 흘러나왔다. 순간 “지금은 울어야 하는 때”라는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다. 일단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짜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침을 손가락으로 찍어 눈에 바르며 주변을 훔쳐봤다. 제일 목청껏 우는 사람은 중대 정치지도원이었다. 그리고 앞자리에 앉은 입당을 앞둔 고참들도 큰 소리로 울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울음보다 걱정이 앞섰다. “김일성 사망되는 해에 태어났는데, 군에 나오니 김정일이 사망하는구나.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리를 통일 병사라고 하더니 통일은 물 건너 간 것인가?”
김정은 후계세습을 준비하던 2010년 북한은 국민들을 상대로 태양절 100주년(김일성 100번째 생일인 2012년 4월 15일)까지 조국을 통일하겠다고 선전했다. 그래서 정 씨가 군에 입대할 때 군 간부들은 “동무는 꼭 통일 병사가 될 거다”는 말을 격려사처럼 해주었다. 그런데 김정일이 죽었으니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게 상념에 빠져 있던 정 씨는 문뜩 점심시간이 지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 지금 밥시간인데, 오늘 점심은 물 건너간 건가. 배고파 죽겠는데”라는 짜증 섞인 푸념마저 떠올랐다.
2시간에 걸친 통곡시간이 끝나자 식사 모집 지시가 떨어졌다. 대열을 맞춰 식당에 도착한 순간 중대 정치지도원이 분노 가득찬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모두가 교양실에서 통곡하는 동안 누군가 몰래 식당에 숨어들어 4~5인 분량의 밥을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정치지도원은 반드시 범인을 잡아내겠다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CCTV 같은 시설이 없는 상황에서 증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실제로 끝내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중대 본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김정은을 애도하기 위한 ‘서거장’이 만들어졌다. 아침, 저녁으로 대원들이 찾아가 애도를 표시해야만 했고, 돌아가며 경비도 서야 했다. 그해 겨울은 몹씨 추워 경비를 설 때마다 발이 꽁꽁 얼어붙기 일쑤였다.
정 씨는 경비를 설 때마다 화로에서 달군 돌을 들고 가 고참들에게 나눠줬다. 애도행사가 끝났을 때 정 씨에게 돌아온 것은 정치지도원의 구두표창(말로 칭찬하는 것)이었다.
● 잠복 초소의 생활
그때까지 보양소에 머물던 정 씨가 마침내 근무에 투입됐다. 민경중대는 소대별로 두 달 근무를 서고, 한 달 쉬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3개 소대 가운데 두 개 소대가 걸어서 2시간 정도 걸리는 산꼭대기 초소에 올라가 두 달을 근무하고, 나머지 1개 소대는 중대 본부에서 휴식을 취하는 식이다.
정 씨는 처음 초소에 올라갔던 날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눈앞에 불바다가 펼쳐져 있었어요. 북한은 깜깜한 암흑인데, 앞쪽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야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야간 잠복은 3인 1조로 나갔다. 여름은 짧지만 겨울은 오후 5시 30분에 나가 이튿날 오전 6시까지 12시간 넘게 잠복초에서 교대 없이 머물러야 했다. 추위에 동상을 입는 군인이 부지기수였지만 웬만한 동상은 병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여름철 야간 잠복 때엔 모기와의 치열한 전쟁이 펼쳐졌다.
잠복초에서 웅크린 채 근무를 서는 일을 10년 정도 하면 관절이 상하지 않는 병사가 없었다.
잠복초는 100m에 하나씩 있는데, 정 씨의 중대가 담당한 잠복초는 20개였다. 결국 중대가 담당해야 할 구역이 2㎞에 달한다는 뜻이다. 저녁마다 들어갈 잠복초는 상황에 맞게 정해졌다.
정 씨는 첫 잠복근무를 마친 뒤 앞으로 10년 동안 같은 생활을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하지만 그 때까지도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당에서 2012년 4월 15일까지 통일을 시킨다고 선전했으니 그날까지 뭔 일이든 일어나겠지. 통일은 안 된다 쳐도 강성대국의 대문을 연다고 했으니 뭔가 달라지진 않을까. 그때까지 버티는 것이 1차 목표다.”
17세에 통일 병사의 꿈을 꾸었던 정 씨에게 그 이상을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쌀밥과 이따끔씩 나오는 닭고기나 콩기름, 간식거리인 건빵과 사탕 몇 알 등은 어린 병사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견딜 수 있게 하는 위안거리가 됐다.
● 미스터리한 한국
그렇게 시간은 흘러 마침내 기다리던 4월 15일이 됐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 때 정 씨는 노동당의 선전은 믿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때쯤 그는 한국에 대한 적잖은 정보도 접하게 됐다. 잠복근무가 끝나고, 낮에 땔감 나무를 하기 위해 숲을 돌아다니다 접한 삐라가 주된 정보원이었다.
“삐라를 많이 봤습니다. 그중 ‘김정은이 이마가 좁아 나라 망칠 관상’이란 게 가장 충격적이었습니다. 어떻게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지 하는 생각이 들어군요.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고, 수림이 울창하다는 내용의 삐라도 있었습니다. 세상에 나라가 얼마나 많은데 10위권이라니, 거짓말이구나 싶었습니다.”
그렇게 접한 삐라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했지만 그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었다. 바로 밤마다 눈앞에 펼쳐지는 남쪽의 불야성이었다. “남쪽 철조망의 불빛이 북쪽까지 옵니다. 우리가 밤에 감시대에 서있으면 그림자가 벽에 생겼으니까요. 전기가 풍족한 것을 보니 멀리 자동차의 불빛 흐름도 거짓은 아니겠다 싶었습니다.”
상관들은 전방의 대성동 마을은 북한처럼 선전마을이어서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했다. 그말을 곧이 믿고, 낮에 일하는 모습을 봐도 선전용으로 동원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쌍안경을 통해 대성동에 위치한 한 가옥에서 TV를 보고 있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이때부터 그는 대성동에 사람이 살고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한국에 오기 전까지도 미스터리하게 생각하던 것이 있었다. 밤이 되면 남쪽 하늘에서 불이 깜빡깜빡하는 것이었다. 낮에 보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이상하게 밤에만 보였다. 한국에 와서야 항공충돌방지 조명임을 알았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던 중 분계선 철책과 지뢰밭을 다 망쳐놓은 태풍 카눈을 만나게 됐다.
마침 같이 나온 선임도 쿨쿨 자고 있었다. 경계가 가장 약한 정오였다. 정 씨는 철책선을 넘어가기로 결심했다.
● 머리 위로 스쳐간 총탄
무너진 철책을 넘어서자 울창한 갈대밭이 모습을 드러냈다. 갈대밭을 지나면 강이었다.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것으로, 중간에 군사분계선이 있다. 다른 중대의 관할지역이라 정 씨는 강의 이름도 몰랐다. 다만 강을 따라 내려가면 남쪽이 나온다는 사실만 알았다.
갈대밭에 뛰어드니 가시넝쿨이 빼곡했다. 살이 찢기고 옷이 찢겨져 나갔다. 하지만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몸이라고 생각했다. 지뢰를 피하기 위해 짐승 발자국을 찾아 조심스레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렇게 1시간쯤 지났을 때 자고 있던 선임이 그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한참을 숨죽이고 있었다. 이후 다시 조심조심 움직였지만 오전 5시경 다른 북한군 초소에서 그를 발견했다.
대각선 방향으로 있던 초소는 약 7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는 갈대를 보고 “서라”고 외친 뒤 총을 쏴댔다. 한국에 당도해서 들으니 그렇게 발사된 총탄은 모두 12발이었다.
총소리를 듣자마자 갈대밭에 납작 엎드렸다. 순간 한 발이 머리 위로 ‘피융’하는 소리와 함께 지나갔다. 그가 엎드린 옆으로 총알이 박히기도 했다. “이제 죽었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지나온 인생사가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후회가 밀려들자 이제껏 한 번도 찾아본 적이 없는 신을 찾았다.
그런데 북한군 추격조의 움직임이 보이질 않았다. 갈대밭으로 들어오지 못한 것이다. 지뢰밭이라 공병의 도움 없이 들어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어두워진 뒤에도 총성은 울렸다. 바스락 소리가 나는 곳으로 북한 병사들이 총을 쐈기 때문이다.
정 씨는 어둠을 이용해 강을 건너가려 했다. 하지만 거센 물살에 몇 번을 시도하다 포기했다. 대신 강을 따라 그냥 내려갔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가다 지쳐 뭍에 오른 뒤 긴장이 풀어지면서 쓰러지듯 누워 잠에 빠졌다.
정신없이 잠을 자다 바스락 소리에 눈이 떠졌다.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수류탄을 꺼내 핀을 뽑았다. 고라니 한 마리가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본인만 몰랐던 생사의 순간
다시 강에 뛰어들어 내려가다 물이 얕아 보이는 곳을 찾았다. 마침내 찾은 곳은 진흙펄이었다. 온몸이 쑥쑥 빨려 들어갔다. 죽음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그때 나무 가지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걸 잡고 살살 잡아당기면서 겨우 몸을 빼냈다.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며 쉬다보니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강 옆에 떠내려 온 옥수수로 허기를 채웠다. 그 때 나무통도 보였다. 먹을 것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반갑게 뚜껑을 열었다. 그러나 목함지뢰였다. 물에 떠내려 오면서 망가져 터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다시 강에 뛰어들어 내려가다 보니 한국군 초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즉시 강기슭으로 올라 품속에 숨겨뒀던 사품용 비닐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는 바늘과 실, 목달개, 거울이 있었다. 북한군들은 도난 방지를 위해 늘 이 주머니를 품에 차고 다닌다. 그만큼 물자가 귀했기 때문이다. 신병 시절 중대원 하나가 바늘을 잃어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바늘 도둑을 찾겠다며 지휘관은 대원들을 마당에 모아놓고 40분 동안 꽁꽁 언 땅에 주먹을 대고 엎드리게 하는 얼차려를 주기도 했다.
정 씨는 강기슭에서 옷을 씻었다. 그리고 새 목달개를 꺼내 군복에 달았다. 찢긴 군복도 기웠다. 한국군 앞에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싫었기 때문이다. 군인 대 군인으로 만나고 싶었다. 군모도 각을 잡아 쓰고 싶었지만 물에 흠뻑 젖은 상태라 생각대로 모양이 나질 않았다. 군모는 결국 강에 던져버렸다.
그렇게 옷매무시를 단장한 그는 비닐주머니를 흔들며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가 강 중간에 다달았을 때 한국군들의 외침이 터져나왔다. 정확하진 않았지만 무기를 버리라는 뜻으로 들렸다. 그는 그 자리에서 총과 수류탄, 쌍안경 등을 버렸다. 더 이상 무기는 필요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을 건너자 군인들이 그를 초소로 데려갔다. “귀순하려 왔냐”는 질문에 머리를 끄덕이자 한 군인이 “귀순을 환영합니다”고 했다. 억양은 좀 낯설지만 같은 말을 하는 곳에 왔다는 사실에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왔구나.”
마음이 진정되자 주변에 눈길이 갔다. 맨 처음 든 생각은 놀라움이었다. 한국군의 군복과 장비가 너무 좋은 데다 초소까지 아스팔트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배가 너무 고팠다. 먹을 것을 기대했지만 전화기 건너편 한국군 상관은 아무 것도 주지 말고 빨리 지휘부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지휘부에 가서야 간단한 조사와 함께 치킨 스프를 먹을 수 있었다.
조사관 한 명이 물었다. “아직도 북한군은 강냉이밥을 먹습니까.” 그닥 중요하지 않은 질문이었지만 정 씨는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우리가 먹는 것까지 알지?”
나중에 들은 사실은 한국군이 오래 전부터 그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또 그가 탈북한 이튿날 북한군이 비무장지대에 수색조를 파견해 추격전을 진행 중이었다. 조금만 지체해도 북한군에게 사살될 수도 있었던 긴박한 상황에서 그는 옷매무새를 다듬겠다고 바느질에 몰두했던 것이다.
그의 귀순을 유도한 사단은 정 씨의 귀순사례를 ‘무결점 귀순자 유도작전’으로 평가하고 10년 넘게 이를 기리고 있다. 정 씨를 무사히 인도한 공으로 해당 사단은 2013년 대통령 부대 표창, 2012년 합동참모본부 전투준비태세 최우수부대 표창을 받았다. 정 씨가 강에 던진 소총과 수류탄 등은 나중에 모두 빠짐없이 회수됐다.
● 한달 만에 29㎏ 늘어
이후 정 씨는 합동조사기관으로 이송됐다. 도중에 눈에 띈 한국 거리는 그가 초소에서 쌍안경으로 지켜봤던 것보다 훨씬 황홀했다. “이것이 다 가짜가 아닌 사실이구나.”
멀미를 느껴 잠시 들른 휴게소에서 같이 가던 사람이 메로나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맛이었다. 정 씨는 한국 정착 이후 7~8년 동안 메로나만 먹었다.
조사기관 건물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몇 년 뒤 다시 가보니 낡은 건물이었는데, 아직 한국 생활을 경험하지 못한 정 씨의 눈에는 별궁이나 다름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에 가니 너무나 맛있는 밥이 나왔다. 김치와 된장국을 보고 그는 엉엉 울었다. 군에 입대한 이후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김치였다.
조사기관에선 밥도 양껏 먹을 수 있게 해주었다. 매 끼니 두 식판씩 밥을 먹었다. 천하장사 소시지를 즐겨 찾자 아예 박스채 주기도 했다. 그 결과 몸무게가 뻥튀기처럼 늘었다. 탈북 직후 43㎏에 불과했던 정 씨의 몸무게가 조사기관에서 보낸 한 달만에 무려 72㎏가 된 것이다. 마치 부종이 온 것처럼 보였을 정도였다.
조사를 받는 동안 놀란 일 가운데 하나는 탈북민이 무척 많다는 것이었다. 조사관에게 “나 말고 몇 명이나 더 넘어왔냐”고 물었더니 “2만 3000명”이라는 수치를 들려줬다. “거짓말 마십시오. 제가 근무 설 때 넘어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는데 언제 그렇게 많이 왔다고 그럽니까. 어디로 왔는데요”라고 되묻자 “중국을 통해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때서야 그는 처음으로 북한에서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조사를 마친 뒤 하나원에 들어가자 훨씬 자유로운 생활이 가능했다. 다른 탈북민들과 어울릴 수도 있었다. 오랫동안 축구선수 생활을 했던 그는 하나원에서 인기 스타가 됐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이 천국에 온 걸로 여겼다. 사회에 나가면 어떤 고난이 닥칠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 방황의 시간들
2013년 1월 머물 집도 배정받지 못한 채 그는 하나원을 나와야 했다. 귀순병사였지만 만 19세가 되지 않았기에 임대주택 입주대상이 되지 못한 것이다. 탈북민은 만 20세가 돼야 임대주택을 받을 수 있다.
처음 한달은 하나원에서 알게 된 ‘삼촌’의 집에서 살았다. 하지만 눈치가 보여 오래 살 순 없었다. 할 수없이 기숙형 대안학교를 찾아가 의탁했다. 하나원을 나와 생소한 사회에 던져졌지만, 그를 이끌어줄 멘토는 없었다.
방황이 시작됐다. 처음엔 인터넷에서 접한 축구게임에 빠져 지내다 6개월 뒤 친구를 따라 아르바이트도 시작했다. 처음 작업장에 갔을 때 그는 사람들이 기계처럼 쉬지 않고 일하는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북에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광경이었다. “자본주의 사람들이 일을 훨씬 더 잘하는구나.”
첫 아르바이트는 오후 8시에 시작해 오전 6시 반에 끝났다. 첫날 일하고 나니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급여는 세후 230만 원으로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3개만에 그만 뒀다. 일이 힘든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너무 외로웠다.
이후 그는 건설현장, 닭 도살장 등 여러 곳을 전전했다. 그렇게 1년쯤 목적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을 한 지인이 신학교를 추천해줬다. 그런데 그마저도 적성에 맞지 않았다. 특히 새벽잠이 많은 그에게 신학교의 새벽 기도는 참기 힘든 고역이었다. 결국 그곳에서도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다시 나왔다. 건설현장을 전전하는 삶이 다시 시작됐다.
만 20세가 넘은 2015년, 그는 마침내 임대주택을 배정받았다. 보금자리가 생기자 안정적인 일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 끌렸던 일은 항해사였다. 배를 타면 전 세계를 누빌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항해학교에 입학도 했다. 그런데 배를 타고 6개월 동안 해외로 나다니다 보면 아내가 바람이 난다는 말을 듣는 순간 학교를 포기했다.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경비회사에 취직했다. 나름 적성에 맞는 했지만 6개월 쯤 지난 어느날 “내가 여기에 경비나 서려고 왔냐”는 생각에 포기했다.
그렇게 방황을 거듭할 때 또다른 지인이 “성경을 100번 읽으면 미국 신학교에 보내주는 선교단체가 있는데, 들어가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비행기를 타는 어린 시절 꿈을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경기도 포천에 있는 수련원에 입소했다. 그곳에서 10개월 동안 성경 80독을 했을 때 미국에 보내준다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듣게 됐다. 망설임 없이 뛰쳐나왔다.
한국에 온지 4년이 되던 2016년 그는 마침내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당시 다니던 교회에서 유럽 지역에 선교여행을 가면서 그를 일행에 포함시킨 것. 여권을 받았을 때 그는 드디어 인생의 목표를 이루었고 성공한 삶이 됐다고 감격했다. 하지만 막상 비행기에 타고 보니 생각과는 달랐다. “그냥 여행수단의 하나일 뿐”임을 깨달은 것이다.
● 촬영현장에 가다
그렇게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방황하다 2017년 그는 대학을 가기로 했다. 그리고 1년 간의 준비과정을 거쳐 2018년 외국어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한국에 정착한 지 5년 만의 일이다.
대학 생활은 즐거웠다.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했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해외여행을 즐겼다. 외국은 어떻게 사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다녀온 나라는 무려 20개가 넘는다.
그 중에 미국도 있었다. 미국에 가보니 사람들이 너무나 신사다웠다. 인간을 인간으로 인정해주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북한군 최전방에서 ‘승냥이 미제를 타도하자’고 외치던 소년병사는 미국에서 “인간이 승냥이가 되는 나라가 있다면 그건 북한일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후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정치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국회 인턴 생활을 겪어본 뒤 포기했다. 매력을 느낄 수가 없었다. 기자 생활도 잠시 꿈꿨다. 그러나 지인 중 기자로 사는 형이 매일 술에 빠져 지내는 것을 보고 포기했다. 사업가도 해보고 싶었지만 주머니에 돈이 없었다.
2020년 탈북민 커뮤니티에 유튜브 채널 개설이 유행처럼 확산됐다. 한번 해볼만 하다는 생각에 1년 늦게 귀순한 친구와 함께 ‘북시탈’이란 제목으로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다. 구독자도 쑥쑥 늘었다.
2021년 12월 그에게 한 통의 이메일이 날라들었다. 북한 관련 영화를 만들고 싶은데 자문을 해줄 수 있겠느냐는 내용이었다. 유튜브를 통해 그를 알아본 영화제작자들이 보낸 것이었다.
영화의 주인공으로 이제훈 배우가 내정돼 있었다. 파파로티라는 영화를 보고 이제훈의 팬이 됐던 그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영화사와 인연을 맺은 뒤 1년 반 동안 북한군 말투 등을 자문해주었다. 일하는 동안 좋아하는 배우와 함께 영화를 만드는 흔치 않은 기회를 갖게 되니 비현실적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게다가 그는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까지 했다. ‘소총남1’이 그가 연기한 인물이다. 북한 내부 저항세력의 두목 역할인 배우 이솜 옆에서 총을 쥐고 있는 청년 역할이다. 그렇게 그가 자문하고 출연한 영화 ‘탈주’는 올해 7월 드디어 개봉됐다.
“영화에서 묘사된 북한이 비현실적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건 감독의 영역이라 제가 어찌할 수는 없는 것이죠. 저는 촬영현장을 다니면서 영화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매력적인 일이었습니다.”
● 영화배우의 꿈
영화를 찍으면서 그는 영화계에 진출하기로 진로도 정했다. 감독도 좋지만 좀 더 끌리는 일은 배우였다. 영화계에서서 이름을 알리는 일은 낙타가 바늘을 뚫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도 이런 사실을 잘 알지만 영화를 찍을 동안 느낀 재미와 행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지난해엔 모 단체에서 예산을 받아 단편영화 ‘두 병사’를 찍기도 했다. 북한군 시절 겪었던 불합리한 일들을 담은 것으로 23분 분량이다. 올해 1월 시사회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목숨을 걸고 탈북을 결정한 인생의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2년 넘게 영화계 일을 하면서 쌓은 친분 덕분에 이런저런 일감도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내년 4월에 대학 때 사귄 여자친구와 결혼할 예정이다. 그녀는 해보고 싶을 때 한 번 도전하라며 정 씨의 꿈을 적극 응원한다.
그는 이제 자신이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고 자평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뿌리는 더욱 단단해질 것으로 믿는다. “저는 아직 젊습니다. 도전할 여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통일되면 하고 싶은 꿈도 생겼습니다. 평양영화연극대학 교수, 더 나아가 총장이 되는 겁니다. 여기서 잘 배워서 나중에 북한 젊은 친구들에게 영화는 이렇게 만드는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싶습니다.”
올 여름 그는 분계선에서 지뢰작업을 하다가 폭발사고로 실려 가는 북한군 사진을 보며 너무나 안타까웠다. 발목이 잘린 병사가 그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편으로는 지옥의 땅을 벗어난 자신이 대견했다.
그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철책선을 앞두고 몇 년 전의 자신처럼 잠복근무에 시달리고 있을 북한군들에게도 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 바로 최전방에 나가 ‘너희가 독재의 노예로 살고 있을 때 목숨 걸고 그 삶을 뿌리친 이 선배는 자유의 땅에서 자유로운 창작을 하는 내 삶의 주인으로 살고 있다’고.”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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