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덤 정치의 연료, 혐오와 증오…누가 부추기나?
양극화에서 정치인 테러까지…“민주주의엔 존중과 예의 필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피살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넘겼습니다. 트럼프 총격 사건을 계기로 정치인을 대상으로 한 살해와 폭력 범죄가 다시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정치인은 사람을 만나는 직업입니다. 많은 사람과 접촉하면 위험에 노출됩니다. 정치인을 살해와 폭력의 위험으로부터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정치인을 노리는 범죄자와 이를 막으려는 경호원 사이에 벌어지는 대결을 그린 영화가 많습니다. 리처드 기어와 브루스 윌리스가 연기한 ‘자칼의 날’이 있고,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의 ‘사선에서’라는 영화도 있습니다.
가장 위험한 정치인 증오 범죄
정치인을 향한 공격에는 몇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 조직적 배후가 존재하는 ‘정치 테러’가 있습니다. 둘째, 개인이 증오심에 휩싸여 저지르는 ‘증오 범죄’가 있습니다. 셋째, 유명인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범죄’가 있습니다. 세가지 유형이 정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제각각 특징이 있습니다.
정치 테러는 정적을 물리적 수단으로 제거하려는 범죄입니다. 해방 직후 혼란한 정국에서 정치 테러가 난무했습니다. 1945년 12월 반탁-찬탁 논쟁 와중에 한국민주당 초대 당수 송진우 동아일보 사장이 찬탁론자로 몰려 총격으로 살해됐습니다. 1947년 7월 좌우합작운동을 하던 몽양 여운형이 총격으로 살해됐습니다. 1949년 6월 백범 김구가 경교장에서 포병 장교 안두희에 의해 총격으로 살해됐습니다. 야만의 시대였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박정희 정권에서 당했던 교통사고와 납치 사건도 정치 테러입니다. 정치 테러의 배후는 밝혀지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정치 테러를 저지른 세력이 사건을 적극적으로 은폐하기 때문입니다.
증오 범죄는 조직적 배후는 없지만, 개인이 정치적 소신에 의해 정치인을 해치는 경우를 말합니다. 2006년 5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커터칼 피습 사건, 2022년 3월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 망치 피습 사건, 2024년 1월 이재명 민주당 대표 흉기 피습 사건 등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증오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를 다른 사람이나 사회의 탓으로 돌리며 분노를 키우다가 정치인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구에서는 이러한 유형의 범죄자를 ‘외로운 늑대’로 부르기도 합니다. 아직 진상이 다 밝혀지지 않았지만 도널드 트럼프에게 총을 쏜 토머스 매슈 크룩스도 ‘외로운 늑대’였던 것 같습니다.
무차별 범죄는 정치적 동기에 의해서 벌이는 범죄가 아니고 꼭 정치인만을 대상으로 벌이는 범죄도 아니라는 점에서 정치 테러나 증오 범죄와는 좀 다른 것입니다. 지난 1월 배현진 국민의힘 의원이 15살 중학생에게 둔기로 머리를 가격당했습니다. 범인은 배현진 의원이 정치인이 아니라 유명인이기 때문에 범행 대상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세가지 유형 가운데 우리가 가장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은 증오 범죄입니다. 증오 범죄는 자생성을 가장 큰 특징으로 합니다. 특별한 배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지령을 내리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그만큼 더 위험합니다.
증오 범죄는 정치 양극화의 토양에서 자라납니다. 정치 양극화는 언제 어떻게 시작됐을까요? 학자들에 의하면 정치 양극화는 세계화로 인한 빈부격차 심화의 부산물입니다. 2000년대에 시작된 디지털 혁명, 2010년대에 시작된 모바일 혁명, 그로 인한 확증 편향 심화와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2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 이른바 보수와 민주당 지지층의 상호 적대감이 깊어지면서 정치 양극화가 더 벌어졌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검찰 수사와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명박 대통령 수입 쇠고기 파동과 촛불집회, 세월호 참사, 박근혜 대통령 탄핵, 문재인 대통령 당선, 조국 사태 등을 차례차례 겪으며 이른바 보수와 민주당 지지층은 서로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상대를 혐오하고 증오하는 단계까지 나아갔습니다.
증오라는 연료로 달리는 팬덤 정치
정치 양극화가 극심해지면서 2019~2020년부터는 팬덤 정치라는 새로운 현상이 출현했습니다. 팬덤 정치는 정치인을 대신해 강성 지지층이 정치의 주도권을 행사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정치인의 말과 행동에 만족하지 못하는 강성 지지층이 정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 것입니다.
팬덤 정치는 이른바 보수와 민주당 지지층의 대립으로 시작됐지만, 곧 당내 대립으로 번졌습니다. 효능감으로 무장한 강성 지지층이 특정 정치인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난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후보 경선 과정에서 벌어진 ‘수박 논쟁’, 최근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한동훈 당대표 후보를 둘러싸고 벌어진 폭력 사태가 바로 당내 대립 팬덤 정치입니다.
팬덤 정치에는 연료가 필요합니다. 경쟁하는 다른 정치인이나 집단에 대한 혐오가 바로 그것입니다. 혐오는 필연적으로 증오를 낳습니다. 증오는 필연적으로 폭력을 낳습니다. 과거 문재인 대통령 열성 지지자들과 현재 이재명 대표 열성 지지자들이 쏟아붓는 문자 폭탄과 댓글 공격은 거의 폭력 수준입니다. 그래도 직접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습니다.
최근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훨씬 더 심각합니다. 한동훈 후보 지지자들과 다른 후보 지지자들이 행사장에서 의자를 들고 뒤엉켜 몸싸움을 했습니다. 팬덤 간 충돌이 마침내 폭력 사태로 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다가 더 끔찍한 증오 범죄가 빈발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요?
여야 정당의 열성 지지층이, 그리고 같은 정당 안에서 특정 정치인을 중심으로 뭉친 강성 지지자들이 상대방을 향해 폭력을 행사한다면 그건 바로 민주주의의 붕괴를 의미합니다.
민주주의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제도입니다. 전쟁 대신 선거로 승부를 가리는 제도입니다. 선거에서 패배한 세력이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다음 선거 때까지 기다리는 제도입니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정치학자 박상훈씨가 2023년 8월 펴낸 ‘혐오하는 민주주의’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민주주의는 복수의 정당이 있고 의회가 있고 주기적인 선거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다. 같은 공동체에 속해 있는 동료 시민들에 대한 존중과 예의가 없이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운영될 수 없다.”
“의원도 당원도 당직자도 더 이상 동지 관계가 아니다. 같은 당 안에서도 의견이 다르면 곧 적이다. 이제 정당의 토대는 당의 풀뿌리 지역 조직이나 당의 대중조직을 통한 참여에 있지 않다.”
“이런 정당을 누가 지배할까? 당파적 갈등을 부추기는 언론들과 인터넷 커뮤니티, 유튜브 정치 채널, 에스엔에스 반응 등등이다. 팬덤 정치인들은 이들의 도구이기도 하고 또 애용자이기도 하다. 적대와 혐오, 야유와 경멸, 모욕과 비난의 언어가 일상이 된 이 연결망을 공론장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같은 공동체에 속해 있는 동료 시민들에 대한 존중과 예의’가 핵심이라고 봅니다. 이재명 대표 지지자들을 ‘개딸’이라고 부르거나, 지난 대선 때 윤석열 대통령을 찍은 유권자들을 ‘이찍이’라고 부르는 것은 동료 시민들에 대한 존중과 예의가 아닙니다. 같은 정당 안에서 이재명 대표에게 비판적인 의원이나 당원들을 ‘수박’이라고 부르는 것도 동료 시민들에 대한 존중과 예의가 아닙니다.
정치권·유튜브·언론·커뮤니티의 책임
국민의힘 전당대회 폭력 사태를 보수 신문에서도 심상치 않게 보는 것 같습니다. 조선일보는 7월16일치 1면에 ‘총 대신 의자…미국과 뭐가 다른가’라는 제목으로 국민의힘 전당대회 폭력 사태 기사를 실었습니다. ‘혐오의 정치에 여 전대 난장판, 충청 합동연설 한동훈 발언 때 일부 참석자들 “배신자 꺼져라” 의자까지 들어 지지자 몸싸움’이라는 부제를 달았습니다.
조선일보는 7월18일치에 ‘‘21세기 정치깡패’에 판 깔아준 정치권의 책임’이라는 제목의 사설도 실었습니다. 중앙일보도 같은 날 ‘국가의 분열 부추기는 극단 유튜브 규제 시급하다’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습니다. 중앙일보 사설 내용은 이렇습니다.
“유튜브는 정치 양극화를 조장한다. 당장은 듣기 불편해도 자신과 다른 의견도 함께 청취해야 사고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유튜브에서 구미에 맞는 얘기만 골라 듣게 되면 세상을 보는 시선이 점점 왜곡·편향된다. 정도가 심해지면 자신과 조금이라도 견해가 다른 집단은 모두 적대시하게 된다. 이러면 민주주의의 핵심인 관용과 타협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 지금 실제로 한국 정치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정치학자 박상훈씨와 같은 논지입니다. 그러나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사설은 폭력과 혐오의 책임을 주로 정치권과 유튜브에 돌리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 박상훈씨가 지적한 대로 ‘당파적 갈등을 부추기는 언론과 인터넷 커뮤니티’도 반드시 추가해야 한다고 봅니다. 한겨레신문도 그런 비판을 받습니다. 반성할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자유주의 질서는 정원과도 같다. 인위적이고 늘 자연의 위협을 받는다. 정원을 보존하려면 넝쿨과 잡초에 맞서 끈질기고 중단 없는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오늘날 정원에 넝쿨과 잡초가 다시 무성해져 밀림으로 회귀하려는 조짐이 온 사방에서 감지된다.”
로버트 케이건이 자유주의 세계 질서의 붕괴를 우려하며 2018년에 쓴 책 ‘밀림의 귀환’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민주주의는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과 비슷합니다. 민주주의를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민주화 이전 야만의 시대로 되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부족주의 유전자를 훨씬 더 많이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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