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인플루언서 누군지 궁금하지? [물리학자 김상욱의 ‘격물치지’]
문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5000년 전쯤 발명된 것으로 보인다. 점토판에 새겨진 기호가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당시 사람들은 놀랐으리라. 문자가 발명되고 오랫동안 오직 소수의 사람만 문자를 사용할 수 있었다. 말하기와 달리 글쓰기는 엄청난 노력을 통해 습득되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도시와 국가가 탄생하자 관리와 통치에 필요한 엄청난 양의 정보를 기억에만 의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문자는 국가 운영에 필요한 정보를 저장·관리하는 필수적인 도구였다.
메소포타미아의 통치자들은 문자의 힘을 이내 깨달았다. 말이 문자가 되면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금’이 귀한 이유는 철과 달리 녹슬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점을 치거나 신탁을 받는 데 사용했던 중국의 갑골문자에서 보듯이 초기의 문자에는 주술적 의미도 있었다. 한마디로 문자는 신성한 것이었다. 기원전 18세기 바빌론의 함무라비 왕이 반포한 ‘함무라비 법전’의 텍스트는 사람을 죽이거나 살리는 신성한 힘을 가졌다.
기원전 6세기 이스라엘의 유다왕국은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로니아에 정복당한다. 패배한 유대인들은 수도 바빌론에 노예로 끌려갔는데 ‘바빌론 유수’라 불리는 유대인의 비극이다. 끌려간 이들은 바빌론에서 문자와 같은 발전된 문물을 접하게 된다. 이 시기 구약성경의 기초가 만들어지고, 두루마리 형태의 성경이 문자로 기록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이후 유대교는 텍스트로 쓰인 경전을 숭배하게 된다. 유대교의 예배에서 랍비는 두루마리 경전의 성스러운 텍스트를 읽는 사람이다. 심지어 유대교의 신은 자기 생각을 문자의 형태로 사람들에게 전한다. 모세의 십계명은 신의 말씀이지만, 신이 직접 석판에 문자로 써서 준 것이다. 이제 문자는 신만큼 중요한 것이 되었다. 문자를 쓰고 읽는 서기(書記)가 지배하는 세상이 온 것이다.
문자문화가 우리에게 준 능력
텍스트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여러 종교의 전통이다. 천주교가 박해당하던 조선 말, 신자 여부를 판별하기 위해 성경을 밟아보라고 시험한 적이 있을 정도다. 고려시대에는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불교의 경전인 팔만대장경을 제작해 텍스트의 힘으로 국난을 극복하려 한 적도 있다. 이슬람교의 코란은 풍자의 대상으로 삼는 것조차 위험한 신성한 텍스트다. 유교의 사서삼경은 조선시대 엘리트들이 평생을 두고 공부한 텍스트다. 경전의 문구 해석을 두고 사화(士禍)가 일어나거나 정적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죽이기도 했다. 텍스트는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오랫동안 세상을 지배해왔다.
흥미롭게도 주요 종교와 사상의 창시자들은 글을 쓴 적이 없다. 성경은 예수가 쓴 글이 아니라 훗날 제자들이 쓴 것이다. 석가모니, 마호메트, 공자 모두 글을 쓰지 않았고 경전은 나중에 추종자들이 쓴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는 글쓰기에 부정적이기까지 했다. 그의 생각은 이렇다. 글은 생각이 아니라 사물이며 만들어낸 제품이다. 글에 의존하다 보면 기억하는 능력이 약해지고 결국 정신이 쇠락한다. 텍스트는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결국 그것을 말한 사람의 생각을 오해하게 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글을 쓰지 않았지만 그의 제자 플라톤이 그의 생각과 말을 글로 남겼다. 그 덕분에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이런 생각을 알 수 있기는 하다. 소크라테스 말대로 문자는 정말 우리에게 해로운 걸까?
문자는 단순히 말을 기호로 옮긴 것이 아니다. 월터 J. 옹의 저서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 따르면 문자문화의 사람은 구술문화의 사람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본다. 우리는 이미 문자문화를 내면화한 터라 문자문화가 우리에게 준 능력을 인식하기 힘들다. 문자문화의 사람은 정확성과 분석적인 능력을 내면화한다. 구술문화에 리스트나 도표 같은 것은 없다. 여러 가지 사건들을 객관적으로 늘어놓고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것은 문자문화에서만 가능하다. 말로만 이야기하며 일관성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A를 물었을 때 A에 대해 답하는 척하다가 적당히 B로 바꾸어 대답해도 사람들은 종종 눈치 채지 못한다. 하지만 글에서 이런 식으로 하면 금방 탄로 난다. 글은 생각을 순서대로 펼쳐놓고 한꺼번에 조망하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수학이 좋은 예다. 종이에 쓰지 않고 고등학교 수학 문제를 머릿속으로만 풀기는 힘들다. 수식을 통해 생각을 눈앞에 펼쳐놓고 차근차근 논리를 따라가야 한다. 그래서 수능에서 유독 수학 시험지에는 풀이를 위한 빈 공간이 많다. 문자나 글이 없었다면 논리나 수학 같은 고도의 정신 능력이 없었을지 모른다는 뜻이다. 결국 텍스트를 사용하는 문명은 그렇지 못한 문명을 압도해갔다. 텍스트는 힘이다.
텍스트는 힘이고 권력이었기에 누구든 함부로 읽고 쓸 수 없었다. 읽고 쓰는 법을 배우고 싶어도 구할 수 있는 텍스트 자체가 많지 않아 기회는 제한적이었다. 오랫동안 책은 손으로 써야 했는데, 필사는 노동집약적이고 어려운 작업이었다. 따라서 책은 귀했고, 소수의 사람만 소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15세기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텍스트 역사에 혁명을 가져온다. 잘 알려진 것처럼 금속활자는 우리 조상이 먼저 만들었으나 우리 사회에 혁명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1517년 마르틴 루터는 당시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는 95개조를 교회의 문에 내걸었다. 교회는 무관심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 인쇄되어 대중에게 보급되기 시작하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교황청도 이에 대응하여 칙서를 인쇄해 뿌렸다. 루터와 교황청의 논쟁이 전 유럽으로 생중계된 것이다. 마르틴 루터는 인쇄미디어의 힘을 적극 이용한 최초의 인플루언서였다. 루터는 일반인은 읽을 수 없었던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독일어 성경은 인쇄되어 널리 보급되었다. 교회의 텍스트 권력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신의 권력을 가진 교회와 싸워야 했던 루터는 더 강력한 권력에 의지한다. 루터의 모토였던 ‘Sola scriptura(오직 성경)’, 바로 성경이다. 루터는 당시 교회의 부정부패 가운데 하나였던 ‘면죄부’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며 교회를 공격했다. 루터는 독일어 성경으로 교회의 텍스트 권력 독점을 무너뜨렸으나, 결국 텍스트 권력의 힘 자체는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성경의 텍스트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
사실 역사시대란 책의 지배를 받는 시대라고 할 수도 있다.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에서 시작하여 성경, 불경, 사서오경, 코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 로마 법전 등이 인간사회를 지배했다는 뜻이다. 지금도 우리는 책의 지배를 받고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데, 왜냐하면 이런 글이 헌법이라는 책에 문자로 쓰여 있기 때문이다. 인간사회에 문제가 생기면 법이라는 책을 찾아서 문제를 해결한다. 법이라는 책에 쓰인 문자들은 사람을 살리거나 죽일 수 있다. 현대 문명화된 인간사회의 교육이란 대개 책을 읽고 이해하는 것이다.
‘흥분 소통’ 사회에서 잃어버리는 것
인쇄술로 책이 널리 공급되고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나자 텍스트 권력의 민주화, 나아가 지식 혁명이 시작된다. 새로운 사상, 특히 근대과학의 내용이 책으로 쓰여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17~18세기를 지나며 케플러·갈릴레오·뉴턴의 책을 통해 과학 혁명이 시작되고, 볼테르·존 로크·몽테스키외·루소의 책을 통해 계몽주의 사상이 널리 전파된다. 계몽주의는 미국의 독립과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책이야말로 민주주의 탄생에 가장 중요한 물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병철은 〈정보의 지배〉에서 책 출판이 없었다면 이성을 사용하고 깊이 생각하는 계몽도 없었을 거라고 주장한다. 이는 월터 J. 옹이 말한 문자문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따라서 책의 위기는 민주주의의 위기이기도 하다. 텔레비전과 같은 미디어는 책 문화가 만든 합리적 담론을 파괴한다. 텔레비전 토론에서 관건은 합리적 논증이 아니라 재미다. 재밌는 것이 옳은 것이다. 정치는 쇼가 되고, 민주주의는 예능이 된다. 이는 데모크라시가 아니라 미디어크라시라 할 만하다. 이제 우리는 미디어크라시에서 인포크라시, 즉 정보 지배사회로 이동 중이다. 사람들이 텔레비전 대신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는 뜻이다.
정보 지배 사회는 정보로 넘쳐난다. 많은 정보 속에서 자극적인 정보만 눈에 띈다. 우리는 정보의 세계에서 짧은 흥분만을 추구한다. 정보가 넘쳐나니 지체할 시간이 없다. 이른바 흥분 소통이다. 흥분 소통에서는 민주주의의 기반이 되는 깊은 생각이나 정확한 논증은 쓸모없다. 더 큰 흥분을 유발하는 정보가 선택되고 유통된다. 따라서 가짜뉴스, 아니 거짓조차 될 수 없는 헛소리(bullshit)가 더 많이 주목받는다. 이렇게 민주주의는 조금씩 무너져가는 것이 아닐까?
오랜 기간 문자와 책은 권력이었다. 인쇄술은 책의 민주화를 이루었고, 대량으로 인쇄된 책은 시민혁명과 민주주의의 바탕이 되었다. 민주주의는 책을 읽고 깊이 생각하는 계몽된 개인을 요구한다. 정보화 사회가 문자를 멀리하고 책을 읽지 않는 사회라면, 우리는 민주주의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김상욱 (경희대 물리학과 교수)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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