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대한민국은 언제 최종적으로 사라질까?

김창훈 칼럼니스트 2024. 7. 20. 20:5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인문견문록] <세계사의 구조> · <신의 가면 원시신화> · <정치와 삶의 세계>

어느 철학자로부터 "이 나라에 대한 기대를 아예 접었다"란 말을 들었다. 평소 존경하던 분에게 이런 말을 듣고 나자, '국가의 존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란 의문이 생겼다. 대한민국은 도대체 왜 이렇게 추락하게 되었을까? 지난해 출산율은 우크라이나와 한국이 거의 비슷하다. 전문가들은 출산율을 거론하면서 노동력부족을 말한다. 그런데 정확히 말한다면 노동력부족이라 말하기 전에 국민의 '국가에 대한 파업'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듯하다. 한국인들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거부하는 것이다. 한국인들의 거부는 국가는 응당 이러해야 한다는 판단에 대한민국이 못 미친다는 판단에 근거한 것이다. 그럼 이렇게 질문해보자. 국가는 어떤 배경으로 탄생한 것인가?

우리는 정체체제로서의 국가를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국가'란 인간 역사에서 지극히 이례적인 현상이었다. 국가란 기본적으로 자신을 향해 행사될 수 있는 권력을 권력자란 낯선 이들에게 양여하는 행위다. 국가가 생겨나고 권력집중과 지배·피지배의 분화가 더욱 심화된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일이 고대인들에게는 두려운 일이었다. 채집유목생활에서 농경정주문명으로 변화된 신석기혁명 이후 인간은 씨족사회로 발전해가고 있었다. 프랑스 인류학자 알랭 테스타는 저서 <불평등의 기원>(학연문화사 펴냄)에서 식량과 자원의 축적이 가능한 정주문화로부터 인간의 불평등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이때부터 불평등이 시작되었지만 불평등이 정치체제로는 쉽사리 제도화되지 않았다. 인간은 불평등을 본능적으로 거부했다. 드라마 <아스달연대기>는 씨족, 부족사회로부터 군왕제로의 이행이 얼마나 달성되기 어려운 일이었는지를 잘 묘사하고 있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은 여기에 주목한다. 그는 책 <세계사의 구조>(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오히려 비축에서 생겨난 불평등이 계급사회나 국가로 귀결되지 않았다는 쪽이다. 그것은 불평등을 억제하고 국가의 발생을 억제하는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씨족사회이다." 정주하고 농업생산을 시작해 여분의 식량과 자원이 확보되어도 인류는 국가탄생을 예비하는 권력집중현상을 쉽사리 허용하지 않았다. 고진은 불평등을 억제하고 국가발생을 지연시키려는 씨족사회의 원리를 '호수성'(호혜성-필자주)이라 말한다. 수십만년간 인간은 평등하게 살았다. 이런 경험은 인간에게 호수성이라는 원리로 내면화되었다. 고진이 말하는 호수성은 일반적 의미의 사해동포주의나 휴머니즘과 다르다. 호수성은 상대주의다. 호수성이란 내가 이만큼을 베풀고 상대로부터 등가물을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 북서부에서 인디언들은 포틀래치라는 축제를 행하고 있었다. 부자들이 이웃들에게 재산을 탕진할 정도로 가진 것을 선물하는 축제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부자가 적당한 권력자에서 압도적인 권력자 또는 준국가적 제도의 창설자로 나서는 상황을 막았다. 이런 증여문화는 전세계에서 다양하게 보고된다. 과도한 불평등을 막지 않으면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될 것이란 점을 씨족사회의 사람들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책 <신의 가면 원시신화>(이진구 옮김, 까치 펴냄)에서 고대 국왕살해와 관련된 오랜 관습을 소개한다. 수단의 실루크족에서는 사제들이 7년을 주기로 왕을 살해했다. 남부 인도의 말라바르 지역의 사제왕은 12년이 지나면 스스로를 희생제물로 바쳐야했다. 많은 지역에서 발견되는 관습이었다. 왜 이랬을까? 권력을 집중시킨 국왕은 권리에 못지않게 국가에 대한 무제한의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서슬 퍼런 동시대인의 인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간의 내면에는 권력과 불평등에 대한 선천적인 '거부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시점에 결국 국가가 등장한다. 이때 어떤 일이 생긴 것일까? 사람들의 심리적 거부감을 정치체로서의 국가는 어떻게 돌파했을까? 특정 씨족이 다른 씨족을, 특정 부족이 다른 부족을 정복해도 국가는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정복으로부터는 진정한 권력이 나오지 않는다는 루소의 생각과 씨족사회 내부로부터는 권력집중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이율배반이 만나면 국가는 생겨날 여지가 없었다. 그럼에도 국가는 탄생했다. 어째서일까? 고진은 이렇게 말한다.

"이 안티노미(이율배반-필자주)는 국가의 기원으로서 지배공동체와 피지배공동체 사이에 일종의 '교환'을 발견함으로써 해소된다. 그것은 정복한 측이 피정복자의 복종에 대해 보호해주고, 공납에 대해 재분배를 하는 '교환'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그때 정복이라는 사실 그 자체가 당사자들에 의해 '부인'당하게 된다."

즉, 국가의 성립에는 피지배자로부터의 권력에 대한 동의가 필수적이다. 피지배층은 권력의 양여를 안전과 공납을 통한 재분배와 교환하는 것이다. 이렇게 양자의 균형이 만들어지고 나서야 국가는 생겨나고 안정화된다. 만약 균형이 사라지면 국가도 존속되기 어려워진다.

지배층과 피지배층과의 '공정'한 교환이 쉽지만은 않기에 국가는 곧잘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다. 이런 상황을 피해가기 위해 지배층은 국가의 정당성을 인민들에게 설명해내야만 한다. 인민이 국가의 정당성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상황은 순식간에 악화된다. 국가정당성에 대한 설명능력과 그것의 설득력이 국가의 유지에 있어서 핵심 요소 중 하나다. 사상가 김우창은 책 <정치와 삶의 세계>(삼인 펴냄)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대체로는, 넓은 의미에서의 철학적 구도를 통하여 구성되고 설계된 사회에서 살고, 그러한 만큼 그 현실은 철학에 의하여 파악될 수 있는 것이었다. 가령 조선조 사회에서 사람들은, 그것이 전부는 아니고 또 전부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패권적 의도를 가졌던 허위의식이라고 하더라도, 성리학의 현실 속에서 그리고 성리학의 현실 설명능력 안에서 살았다."

국가를 떠받치는 이데올로기의 현실설명능력이 한계에 부딪힐 때 국민은 동요한다. 대한민국은 성립 이후 자신의 정당성을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에 두었다. 자본주의, 그것도 정글자본주의를 오랫동안 지속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자본주의에서는 여전히 따뜻함을 찾을 수 없다. 로스토의 성장단계론은 지금 고생하더라도 결국 모두가 행복한 선진국에 도달하게 된다는 스토리였다. 한국인은 언젠가는 나아질 것이라는, 적어도 내 자식들은 더 좋은 세상에 살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버텼다. 믿음은 물거품이 되었다. 자유민주주의만이 북한 공산주의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킨다는 주장의 설득력도 빛이 바랬다. 북한이 부러워하는 나라는 베트남이다. 베트남 수준에도 훨씬 못 미치는 국가로부터 무엇을 지킨다는 말인가? 한때 북한이 잘나가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흑인해방 무장단체 블랙팬더당이 북한을 방문하던 시절은 아득한 옛날이다. 자유민주주의의 당위성은 북한체제의 매력소멸과 소구력 부족으로 이미 부정당하고 있다.

한국 자본주의가 약속한 장밋빛 미래는 진즉에 사라져버렸다. 이에 따라 자본주의를 치장하는 이데올로기인 자유민주주의의 정당성을 회의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자유민주주의가 과두제를 위한 최선의 정치체제로 보인다. 디시인사이드 등의 인터넷 커뮤니티를 보아도 '대한민국'에 대한 저주가 가득하다. 많은 이들이 대한민국을 '조선'이라 부르며 '탈조선'을 꿈꾼다. 대한민국 공동체에 애착이 없는 청년들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개인의 내면에서 공동체에 대한 귀속감의 원천인 시민적 에토스가 사라지고 있다. 에토스란 개인들에게 내면화된 공동체의 가치, 정신, 규범, 공통감각, 집단지성 등을 의미한다. 길거리 묻지마폭행이 드물지 않게 일어나고 있다. 묻지마폭행은 타인이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nothing)이어야만 가능하다. 시민들이 타인에게서 자신과 동일한 시민적 에토스를 감지할 때는 절대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시민적 에토스는 다른 시민을 나와 같은 인간으로 보게 만든다. 나와 같은 언어, 나와 같은 역사적 체험, 나와 다르지 않은 경제적 수준, 나와 유사한 의무와 권리. 여기로부터 시민적 에토스의 핵심인 공동체에 대한 '신뢰'가 생겨난다. 공자는 경제력, 군사력, 국민의 신뢰 중 우선 순위를 묻는 제자 자공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민부신불립(民無信不立)' 국민의 신뢰가 없이는 국가는 존립할 수 없다.

대한민국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여러 이데올로기가 흔들리고 있다. 국가존립의 마지막 보루인 시민적 에토스, 그리고 이에 기반한 공동체에 대한 신뢰조차 무너지고 있다. 내전 직전인 미국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공동체로서의 대한민국은 언제까지 존속될 수 있을까? 아마도 대한민국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완전히 끊어지는 지점까지일 것이다. 필자는 그 때가 머지 않다고 생각한다.

▲ <세계사의 구조>(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b(도서출판비) 펴냄)·<신의 가면 원시신화>(조셉 캠벨 지음, 까치(까치글방) 펴냄)·<정치와 삶의 세계>(김우창 지음, 민음사 펴냄). ⓒ프레시안

[김창훈 칼럼니스트]

Copyright © 프레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