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누드 자화상 그린 女화가...남편보다 더 가까웠던 ‘세기의 소울메이트’ [나를 그린 화가들]
독일 뮌헨에 있는 ‘영국 정원’에 가면 나체로 일광욕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알몸인 채로 돌아다니는 사람을 보면서 당황한 기억이 있는데요. 미술사에서도 독일은 누드화와 독특한 연관이 있습니다.
최초로 자신의 누드 자화상을 그린 남성 화가가 누구일까요? 바로 독일의 알브레히트 뒤러입니다. 뒤러는 1500~1505년경 습작용으로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그렸습니다.
여성 최초의 누드 자화상은 이로부터 400여년이 지난 1906년에야 그려졌습니다. 처음으로 누드 자화상을 그린 여성도 독일인입니다. 파울라 모더존 베커라는 화가입니다. 1900년대 초 여성이 자기 모습을 나체로 그리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특히 그녀의 자화상은 임신한 모습이어서 더 파격적으로 평가됩니다.
하지만 파울라의 부모는 그림 공부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파울라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결혼하거나, 가정 교사가 되라고 했죠. 당시 여성들이 미술 교육을 받으려면 제약이 따랐습니다. 당시 독일에서 여성은 참정권이 없었고, 국공립 미술 대학에 들어갈 자격도 없었습니다. 교육에 필수적인 누드 수업을 고려할 때, 여성이 수업받는 것은 미풍양속을 이유로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여성에게는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이 우선시됐습니다. 아이(Kinder), 부엌(Küche), 교회(Kirche)로 일컬어지는 ‘3K’가 당시 독일 여성 교육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래도 파울라는 자신의 길을 개척합니다. 운 좋게 작은할머니의 유산을 받게 되면서 베를린 여성미술가협회에서 운영하는 미술학교에서 수업을 받았습니다. 스물 두 살에 독일 북부에 있는 보르프스베데라는 예술가 마을에 정착하며 예술 활동을 이어갑니다.
파울라는 프랑스 파리에 오가며 미술 공부를 했습니다. 프랑스의 국립 미술 대학인 에콜 데 보자르에선 여성에게도 수업을 열었습니다. 파울라는 이곳에서 해부학 강의를 듣고 미술관을 다니며 폴 세잔,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 등의 화풍을 받아들입니다.
또 물감을 두텁게 덧칠해서 그림을 더 평면적으로 보이도록 했습니다. 색상도 과감하게 선택했죠. 대담하고 표현력이 풍부한 색채를 사용해 파격적인 시도를 했습니다.
파울라는 독일 표현주의 미술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습니다. 여성과 아이들을 그린 초상화에선 인물들의 내면과 감정을 전달하려고 했습니다.
초록색 배경 속 여성의 얼굴을 거칠게 표현했는데, 이는 고흐가 농민을 묘사한 방식과 유사합니다. 여인의 무릎에는 작은 노란 꽃이 놓여 있습니다. 파울라가 고흐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림에 이 노란 꽃을 그렸다는 해석도 나옵니다.
파울라는 보르프스베데에서 동네 주민들, 그 중에서도 여성과 아이들을 주로 그렸습니다. 지역에 있는 구빈원에 가서 할머니들을 그리기도 했죠.
하지만 결혼 후 파울라는 아내로서 역할과 직업 화가로서 역할 사이에서 갈등했습니다. 파울라는 오토의 딸 엘스베트도 돌봐야 했습니다. 엘스베트는 오토와 그의 첫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였습니다. 오토의 첫 부인은 결핵으로 세상을 일찍 떠났습니다.
결혼 후에도 파울라는 자신의 화실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오토는 파울라를 예술적 동반자로 여겼지만 그녀가 좀 더 가정에 충실하기를 바랐습니다.
파울라는 보르프스베데의 평화로움을 사랑했지만 예술을 경험하고 누릴 수 있는 파리를 그리워했습니다. 파울라는 결국 수차례 파리와 보르프스베데를 오가는 생활을 합니다. 프랑스 화단의 모더니즘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파울라는 풍경화를 그리던 보르프스베데의 예술 공동체와는 다른 작품 세계를 구축하죠. 파리에서 누드 수업을 받으면서, 파울라는 더 적극적으로 누드화를 그렸습니다.
릴케는 프랑스에서 로댕의 비서로도 일했는데요. 파울라는 파리에서 클라라, 릴케 부부와 교류했습니다. 조각가인 클라라는 로댕의 제자이자 조수였습니다.
예술을 인생의 중심에 둔 릴케는 가정을 떠나 파리에서 활동한 파울라를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죠. 또 화가로서 파울라의 능력을 알아봤습니다. 파울라의 작품을 처음 구매한 사람도 릴케였습니다. 두 사람은 부부는 아니었지만 서로에게 필요한 ‘소울메이트’였던 셈입니다.
인생을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는 정말 비슷합니다. 다음은 릴케가 쓴 시 ‘인생’입니다.
“인생을 꼭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다 / 인생은 축제와 같은 것 / 하루하루 일어나는 그대로 살아가라 / 바람이 불 때 흩어지는 꽃잎을 줍는 아이들은 / 그 꽃잎을 모아 둘 생각은 하지 않는다 / 꽃잎을 줍는 순간을 즐기고 / 그 순간에 만족하면 그뿐”
파울라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적은 적 있습니다.
“내가 아는데 나는 아주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슬픈가? 축제가 길다고 더 아름다운가? 내 삶은 하나의 축제, 짧지만 강렬한 축제이다. (…) 그러니 내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내 안에서 사랑이 한번 피어나고 좋은 그림 세 점을 그릴 수 있다면 나는 손에 꽃을 들고 머리에 꽃을 꽂고 기꺼이 이 세상을 떠나겠다.”
이 그림을 그릴 때 사실 파울라는 임신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손으로 아랫배를 감싸며 임신한 모습을 상상하며 그린 거죠. 이 모습은 여성 예술가가 가진 이중적인 창조력을 의미합니다. 파울라는 아이를 낳을 수도 있고, 예술 작품을 만들 수도 있는 존재죠.
파울라는 1907년 11월 아이를 낳지만 출산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색전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죽기 전 남긴 마지막 말은 “아, 아쉬워라!”였습니다. 그녀의 나이 서른한 살이었습니다.
파울라가 죽고 20년이 지난 후, 독일 브레멘에선 파울라를 기리기 위한 미술관 ‘파울라 모더존 하우스’가 문을 열었습니다. 이 미술관은 독일에서 근대 예술가를 위한 첫 박물관이자, 여성 예술가를 위한 세계 최초의 박물관입니다.
하지만 파울라는 정작 생전에 크게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팔았던 작품은 세 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파울라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던 원동력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녀는 동생에게 쓴 편지에서 “나는 뭔가가 될 거야.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을 한시도 잃지 않아”라고 말했다고 하죠. 당찬 표정으로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는 파울라처럼 우리도 스스로에게 응원을 보내면 어떨까요.
<참고자료>
-마리 다리외세크(2020), 여기 있어 황홀하다 : 파울라 모더존 베커의 삶과 예술, 에포크
-이현애(2017), 독일 미술가와 걷다 : 나치 시대 블랙리스트 예술가들이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 마로니에북스
-라이너 슈탐(2011), 짧지만 화려한 축제, 솔출판사
-미국 뉴욕현대미술관 홈페이지(https://www.moma.org/) 속 파울라 모더존 베커 소개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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