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 은 이름 그 자체가 브랜드가 된 창업자의 스토리를 들려드리는 콘텐츠입니다. 아래 기자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트럼프 피격사건을 담은 역사적 사진
지난 주말,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총격 사건이 미국에서 발생합니다.
전 미국 대통령이자 올해 11월 치러질 미국 대선의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 피격 사건이 그 주인공입니다. 1981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총격 사건 이후 43년만에 벌어진 전·현직 대통령에 대한 암살 시도 사건은 미국 대선에 큰 변곡점이 되며 트럼프에게 큰 호재로 작용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목숨을 건 위기였지만 대선 승리를 위한 기회로 더욱 부각시킨건 다름 아닌 바로 이 사진 한장입니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 마치 합성이라도 한 듯 완전히 펼쳐져 펄럭이는 빨갛고 파란 성조기. 죽을 고비를 몇초 전에 넘겼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오른손 주먹을 굳게 쥐고 하늘로 치켜든 도널드 트럼프의 결연한 표정. 총알이 스친 귀에서 떨어진 피로 젖은 뺨.그리고 그를 감싼 수 명의 경호원들까지. 사진을 구성한 모든 요소 하나하나가 마치 정교하게 맞춰 연출한 스튜디오 사진인 것처럼 우연에 우연의 요소가 겹쳐 만들어진 역사의 순간 그 자체였습니다.
이 사진은 트럼프 전 대통령 뿐 아니라 기업가 일론 머스크, 미국 주간지 타임지 등 수많은 사람들과 언론 등을 통해 전 세계로 송출되며 이날 사건의 대명사로 곧바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진을 찍은 사진기자가 바로 AP통신의 수석 사진기자 에번 부치입니다.
이번 사건과 별개로 이 사진은 여러 사진 전문가와 언론인, 그리고 정치평론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유명세를 치르고 있습니다. 당연히 올해의 ‘퓰리처상’은 떼놓은 당상이란 이야기도 나오고 있죠. 당시 부치 기자가 어떻게 해당 사진을 찍었는지를 분석한 영상 등도 함께 화제가 됐고요.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20년 넘는 경력을 가진 부치 기자가 이미 2021년 퓰리처상을 받은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2020년 흑인인 조지 플로이드에 대한 경찰들의 과잉진압으로 사망한 이른바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이후 미 전역으로 흑인 인권 시위가 확산했고 그러던 중 수도인 워싱턴DC에서 벌어진 항의 시위를 촬영한 사진입니다.
사진계의 노벨상, 퓰리처상의 탄생비화
서설이 조금 길었는데요. 주인공의 등장은 항상 늦은 법이네요. 오늘은 사진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퓰리처상의 탄생비화, 그리고 이를 만든 ‘조지프 퓰리처’의 삶을 조명해보겠습니다.
조지프 퓰리처는 헝가리계 미국인입니다. 그는 1847년 4월 ,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남동쪽으로 200km 떨어진 마코라는 지역에서 태어납니다. 유대인 가문의 집안답게 그의 아버지는 돈에 밝았으며 각종 상점을 운영하며 부를 쌓은 사업가였습니다. 마코 지역에서 2번째로 큰 사업체를 운영하던 그의 아버지는 자식들을 잘 기르고 교육하기 위해 부다페스트로 이주시켜 가정교사를 붙여 공부에 매진토록 합니다. 프랑스어와 독일어 등을 배우며 성장한 그의 유년기는 유복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1858년 사망하며 사업도 크게 흔들리고 맙니다. 당시 12살에 불과했던 퓰리처 역시 딱히 손쓸 방법이 없었고 결국 파산한 그의 가족은 완전히 가난해졌습니다. 돈을 벌어야 했던 퓰리처는 전 세계적 갈등이 치솟던 당시 상황에 맞춰 여러 나라의 군대에 입대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프랑스, 영국 등 여러 군대에 지원할 때마다 번번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너무 어린 나이탓에 군대 입대도 쉽지 않았습니다.
취업사기 당한 퓰리처, 미국서 기회를 찾다
결국 그의 손을 잡아준 나라는 우연히도 미국이었습니다. 1864년 20살도 안 된 어린 나이에 그는 미국의 남북 전쟁에 참전할 수 있는 용병으로 선발됩니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출발한 그는 17세의 나이에 미국 북부 매사추세츠 군대 입대를 위해 보스턴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영어 한마디 쓸 줄 모르는 10대 소년 퓰리처의 고난은 이어졌습니다.
보스턴에서 받아야 할 돈 대부분을 모집 담당자가 빼돌린 것입니다. 결국 그는 또다시 뉴욕으로 떠나 링컨 기병대에 입대합니다. 당시 그가 받은 돈은 200달러였습니다. 당시 그의 연대는 대부분 독일 이민자로 구성돼 있어 전쟁 내내 그는 영어 한마디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목숨을 건 돈벌이를 이어갔습니다.
다행히 그는 큰 사고없이 참전을 마무리합니다. 잠깐 보스턴으로 돌아가 포경선에 올라 돈을 벌었지만 역시 그에겐 힘들고 쉽지 않았기에 다시 뉴욕으로 돌아갔습니다. 여전히 수중에 돈이 부족했던 그는 길가에 세워진 마차에서 잠을 자거나 그가 가지고 있는 손수건을 75센트에 팔며 겨우겨우 버텨나갔습니다. 그러던 그는 우연히 세인트루이스로 떠날 기회를 잡습니다. 화물차 한 쪽에 끼여 힘들고 고단한 뉴욕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가 도착한 세인트루이스는 그에게 딱 맞았습니다. 독일은 1848년 독일혁명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 향했고, 그들 상당수가 정착한 곳이 바로 세인트루이스였습니다. 그는 당시를 “이 곳의 불빛은 나에게 약속의 땅으로 보였다”고 회상합니다. 영어를 할 줄 모르는 퓰리처는 자신이 익숙한 독일어를 사용하는 세인트루이스가 마치 고향 같았습니다. 마구간에서 노새를 돌보거나 레스토랑에서 웨이터로 일하며 조금씩 생활도 안정되기 시작했습니다.
퓰리처를 알아본 칼 슐츠와의 만남...기자의 길을 걷다
여유가 생긴 그는 시간을 내 영어를 공부하고 독서를 즐기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또한 당시 도서관 사서로 일하던 친구 우도 브라흐보겔을 사귀게 됐습니다. 그는 그 덕에 도서관 체스룸에 자주 놀러 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인생을 바꿀 귀인을 만납니다. 정확히는 그 곳을 자주 찾았던 칼 슐츠의 눈에 퓰리처가 띄게 됩니다. 그의 적극적이고 밝은 성격이 마음에 든 것이죠.
독일계 이민자였던 칼 슐츠는 퓰리처의 롤모델이었습니다. 자신과 비슷하게 유럽에서 건너와 변호사 자격증을 딴 뒤 미국 남북 전쟁에서 장군을 지내며 게티즈버그 전투 등을 진두지휘했습니다. 또 링컨 대통령과 가깝게 지내며 링컨의 독일어 연설문을 대독하며 이민자들의 지지를 얻어낸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는 언론에 대한 관심도 컸습니다.
1866년 디트로이트 포스트의 편집장으로 일했던 그는 이듬해 세인트루이스에 이주해 독일어권 신문인 베스틀리체 포스트(웨스턴 포스트)를 창간합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퓰리처를 만난 것입니다. 베스틀리체 포스트를 만들며 기자가 필요했던 슐츠는 평소 눈여겨보던 퓰리처를 기자로 고용합니다. 그렇게 기자 퓰리처의 삶이 시작됩니다.
당시 설탕 플랜테이션 등 대농장이 많던 루이지애나에는 여러 채용 사기가 많았습니다. 한번은 5달러를 내면 좋은 농장 일자리를 소개해주겠다 홍보해 수십명의 남성들을 모집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다들 5달러씩 낸 뒤 증기선에 올라 도시에서 30마일 떨어진 강 하류로 이동했지만 이 곳에 도착하자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이들은 전부 내쫓겨 버립니다. 이 사건이 바로 퓰리처가 기자가 된 후 처음으로 기사화한 뉴스였습니다. 기자 퓰리처는 해당 기사를 송고한 뒤 뛸 듯이 기뻤고 드디어 자신의 일을 찾은 느낌이었습니다.
그가 기자가 된 1867년, 퓰리처는 미국 시민으로 귀화하며 조셉 퓰리처라는 영어식 이름을 얻게됩니다. 그는 오전 10시부터 새벽2시까지 하루 16시간을 일한 워커홀릭이었습니다. 날카로운 기사와 취재력은 당시 지역에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배경이었습니다. 또 그는 철학협회에 가입했고, 많은 지식인들이 몰리는 독일 서점을 자주 찾았습니다. 그리고 지역명사가 된 그는 1869년 공화당에 가입하며 정치인의 삶도 병행하게 됩니다.
공화당에서는 주 의회 공석을 채울 후보가 필요했고 수소문끝에 젊고 유능한 열정적인 남성 퓰리처가 간택됩니다. 그의 나이 불과 22세였습니다. 사실 25세 이상 입후보할 수 있다는 당시 규정이 있었음에도 그의 에너지는 그것을 뛰어넘어버렸습니다. 그는 성실한 모습과 신뢰도있는 모습으로 결국 미주리주 의원 선거에서 당당히 승리합니다.
기자에서 언론사 사장이 된 그의 야욕
이후 1873년 그는 아예 베스틀리체 포스트의 경영자가 되며 언론인으로서의 경력을 쌓아가기 시작합니다. 이어 1878년 망하기 직전의 세인트루이스 디스패치를 인수하고 세인트루이스 포스트와 합병해 세인트루이스 포스트-디스패치사를 설립합니다. 거침없던 그의 성공 가도는 그의 언론관을 왜곡시키기 시작합니다.
참 기자였던 그는 경영자가 되며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기사에 매료됩니다. 그는 강력한 포퓰리즘식 접근이 결국 독자로부터 사랑받는다는 강력한 믿음을 바탕으로 신문 제작에 몰두합니다. 포스트-디스패치는 인수 직후 4000부 가량 발행됐습니다. 하지만 점차 그의 전략대로 제작된 신문은 2년뒤 8700부까지 늘어났고 1882년, 불과 4년만에 2만2000부가 발행되며 인기몰이를 했습니다. 퓰리처는 새로운 인쇄기를 2대나 샀고 직원 급여도 가장 높은 수준으로 올렸습니다.
당연하게도 그는 언론을 정치적으로도 활용했습니다.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옮긴 그는 당시 공화당 진영의 후보와 의원들에 대한 무차별적 공세를 퍼부은 것이죠. 그러던 중 사고가 발생합니다. 민주당 진영의 법률 대변인이던 알론조 슬레이백이 권총을 찬 채 포스트-디스패치사에 직접 찾아와 강력하게 항의한 것입니다. 그리고 편집장이던 존 콕커릴은 결국 슬레이백을 죽여버리죠. 해당 사건 이후 공화진영에서는 퓰리처와 그의 언론사에 대한 격렬한 비판을 쏟아냈습니다. 이 사건으로 그간 퓰리처가 쌓아올린 모든 명성은 한순간에 무너졌고 그는 결국 세인트루이스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재기를 꿈꾼 뉴욕생활, 뉴욕월드를 창간하다
그는 뉴욕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또다시 파산직전이던 ‘뉴욕 월드’라는 언론사를 34만6000달러에 인수합니다. 그는 “재미없는 신문은 죄악이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며 또다시 확고한 그의 언론 경영 DNA를 심기 시작합니다. 자극적인 헤드라인, 사실과 가짜뉴스의 경계를 넘나드는 위험한 내용. 이러한 그의 전략은 또다시 성공적으로 먹혀들었고 뉴욕월드는 전미 발행부수 1위에 오를 정도로 인기를 구가합니다. 그는 1890년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뉴욕월드 빌딩을 건설하기도 합니다.
당시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프랑스가 자유의 여신상을 제작해 미국으로 보내려했지만 운반과 재조립 비용이 없어 지체된 바가 있습니다. 이에 뉴욕월드가 전폭적으로 이를 위한 모금 캠페인을 펼쳤는데 실제로 자유의 여신상을 세우는데 큰 기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퓰리처와 뉴욕월드의 위상을 보여주는 대표적 일화입니다.
뉴욕월드는 1896년 4색 인쇄기를 사용해 신문사 최초의 컬러 광고와 지면을 제작하기도 합니다.
치열한 라이벌 경쟁, 옐로저널리즘의 탄생
그랬던 뉴욕월드에도 라이벌이 등장합니다. 바로 샌프란시스코 출신의 ‘신문왕’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했던 허스트는 아버지가 소유했던 이그재미너를 경영하며 언론계에 진출합니다. 이어 1895년 뉴욕의 모닝 저널을 인수해 (뉴욕)저널 아메리칸으로 이름을 바꾸고 퓰리처의 뉴욕 월드와 정면대결을 선언합니다.
그의 뉴욕저널은 전투함 ‘메인호’ 폭파 사건에 대한 음모론을 제기하며 사실상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하도록 여론을 조성하는 등 역시나 자극적인 기사들을 쏟아냈습니다.
이 둘의 경쟁은 점입가경으로 흘러갑니다. 자극적인 뉴스 경쟁으로 끝이 나지 않자 허스트는 1부당 1센트로 파격적인 신문가격 인하를 단행하며 자본력을 내세운 치킨게임을 유도합니다. 이와 함께 뉴욕 월드의 핵심 기자들을 빼오며 대공세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 경쟁의 화룡점정은 1895년 처음 연재된 ‘호건의 골목길’이란 만화에서 찍게 됩니다. 뉴욕월드 주말판에 연재하던 해당 작품은 상당한 팬덤을 형성하며 킬러 컨텐츠로 불렸습니다. 이에 뉴욕 저널은 해당 만화를 그린 아웃콜트라는 작가를 뺏기로 마음먹고 거액의 이적료를 제시합니다. 이에 뉴욕 월드 역시 웃돈을 더 얹어 다시 아웃콜트를 설득합니다.
치열한 경쟁끝에 아웃콜트는 뉴욕 저널로 이직을 결정합니다. 이에 퓰리처는 신박한 아이디어를 내놓습니다. 호건의 골목길에 나오는 주인공 ‘옐로키드’는 뉴욕 월드가 특허를 내놓았기 때문에 다른 작가를 쓰더라도 옐로키드를 주인공으로 만화를 그릴 수 있다는 논리였죠. 이렇게 양사는 옐로키드라는 주인공을 놓고 동시에 만화연재를 시작합니다. 이러한 양사간 경쟁에 대해 업계에선 해당주인공 옐로키드의 이름을 딴 ‘옐로우 저널리즘’이라고 비꼬았고, 이게 지금의 황색언론이라고 불리는 취재윤리 대신 판매부수와 영리에 집중하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언론사의 대명사가 됐습니다.
황색언론에의 반성, 퓰리처상의 탄생
자본의 힘으로 밀어부친 끝에 뉴욕 저널은 뉴욕 진출 2년만에 뉴욕 최대의 언론사가 됐고 퓰리처는 돈의 힘에 밀려 패바하고 맙니다. 이제 50대에 접어든 퓰리처에게 이번 패배는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줬습니다. 1890년대부터 그의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고 시력을 거의 잃어버리며 사실상 업계에서 은퇴하게 됩니다.
말년의 그는 그의 이름을 알렸던 옐로 저널리즘에 대한 후회를 쏟아냈고 오히려 언론인 양성을 위한 교육 활동에 매진합니다. 1892년 퓰리처는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컬럼비아 대학 세스 로우 총장을 만납니다. 그는 세계 최초의 저널리즘 스쿨을 만들어달라면서 기부를 합니다. 당초 로우 총장은 기부금 수령을 거부했습니다. 그 후 10년이 지난 1902년, 새로운 총장 니콜라스 버틀러는 언론대학 설립과 언론상 설립 등의 계획을 본격화합니다. 하지만 이 꿈은 퓰리처의 사후에 실현됩니다.
퓰리처는 1911년 10월 29일 자신의 별장이 있는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에서 사망합니다. 그는 숨을 거두기 직전 독일어로 “부드럽게, 아주 부드럽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그의 유언장에 따라 그의 재산 200만달러는 저널리즘을 위해 쓰이게 됩니다. 그렇게 미주리대학과 컬럼비아 대학교에 미국을 대표하는 저널리즘 스쿨 2곳이 탄생합니다. 그리고 1917년, 그가 남긴 유산 중 50만달러를 바탕으로 저널리즘 분야에서 큰 공을 세운 언론인에게 수여되는 퓰리처상이 조직됐습니다. 해당 상은 14개의 언론 부문과 문학, 시, 역사, 음악, 드라마 등 예술분야 7개 부문에서 업적을 세운 사람들의 공을 기리는 상으로 자리매김합니다.
기자계의 노벨상을 만든 황색언론의 창시자의 아이러니. 언제나 자신의 삶에 열정적으로 임했고 최선을 다했던 퓰리처. 세계 최초의 컬러 신문을 만들고 언제나 자신이 몸담은 곳에서 최고의 성과를 냈지만 결국 그로 인해 자신의 이마에 생겨진 주홍글씨, 아니 황색(Yellow)글씨. 언론이 가장 지양해야할 삶을 살아온 퓰리처가 만든 퓰리처 상이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기자가 꿈꾸는 것이 됐다는 점만으로 퓰리처의 부채의식은 좀 덜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흥’미로운 ‘부’-랜드 ‘전’(傳). 흥부전은 전 세계 유명 기업들과 브랜드의 흥망성쇠와 뒷야이기를 다뤄보는 코너입니다.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 오리저널 시리즈를 연재 중입니다. 아래 기자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