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만든 술? 덥고 습한 여름, 당신의 짜증을 날려버릴 와인 음료 [전형민의 와인프릭]
한동안 주춤하던 장마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과거와 달리 며칠 간 지속되는 우천(雨天)이 여름 동안 여러 번 나뉘어 발생하는 것이 달갑지 않지만, 현명하게 변화한 기후를 잘 헤쳐나가야겠습니다.
날이 너무 덥고 습하면, 불쾌지수가 치솟고 쉽게 짜증이 납니다. 아무리 와인 애호가여도 코르크를 따는 것부터 잔을 준비하고 따라 마시는 것까지 여러모로 복잡한 와인을 마시는 게 내키지 않는 시기죠. 차라리 즉각적인 청량감을 부여하는 시원한 맥주나 탄산수에 손이 가는 편입니다.
이번 주 와인프릭은 덥고 습한 여름, 특히 불쾌지수가 높은 장마철에도 와인을 즐기고 싶은 와린이들을 위한 스페인 전통 펀치 음료인 상그리아(Sangria)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상그리아는 겨울철 와인 음료인 뱅쇼(Vin chaud·프랑스어로 따뜻한 포도주)처럼 여름을 나기 위한 와인 음료입니다.
그리고 상그리아보다 좀 더 간편하게 집에서 즐길 수 있는 와인 음료인 틴토 데 베라노(Tinto de Verano)도 소개합니다. 간단하고 만든 후 쟁여놓기도 좋아서, 실제로 요새 스페인 어디를 가든 상그리아보다 쉽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기원전 200년, 당시 히스파니아(지금의 이베리아 반도) 지역 정복에 나선 로마군은 자신들이 진군한 길을 따라 수많은 포도원을 만듭니다. 지중해 연안국들을 정복하며 파죽지세로 영토를 넓혀가던 로마군에게는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보급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로마군이 시민군이고 다재다능했다고는 하지만, 길 주변에 우후죽순으로 만든 와이너리에서 만들어진 와인에 맛까지 바라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단순히 식수를 구하기 위한 대안이었으니까요.
그렇다보니 저렴한 와인의 끔찍한 맛을 견디다 못해 여기에 허브 등 여러 첨가물이 추가됐습니다. 단순한 군용 음료일 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도 만들어 즐겨 마시는 음료가 된 것이죠.
예컨대 건조한 재료(뿌리 채소와 같은)는 끓이고, 젖은 음식은 굽는 식입니다. 당시 와인은 차갑고 건조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여기에 설탕, 생강, 계피와 같은 따뜻한 재료를 추가해 히포크라스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과정 마지막 단계로 마니쿰 히포크라티쿰( manicum hippocraticum·히포크라테스 슬리브,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의사 히포크라테스가 물을 걸러내기 위해 고안한 원뿔 필터)를 통해 와인을 걸러냈기 때문에 히포크라스라는 이름이 붙었죠.
얼핏보면 동양의 음양오행과 흡사해보이기도 합니다. 다만 설탕은 당시 엄청난 고가의 조미료였기 때문에 어떤 지역에서는 ‘설탕은 귀족만, 귀족이 아닌 자는 꿀을 넣으라’고 규정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히포크라스는 중세 유럽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대중적인 음료였습니다. 스스로를 태양왕으로 칭한 루이14세도 이 음료를 즐겨 마셨던 사람으로 남아있습니다.
당시 보르도 레드 와인의 주류는 지금 떠올리는 강건하고 무거우면서 농밀한 와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진한 로제에 가까울 정도로 가볍고 부드러운 와인이었죠. 영국과 프랑스의 귀족을은 이 클라레에 자신만의 레시피로 각종 향신료를 타먹었고, 이 자체를 클라레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실제로 현재까지 유일하게 클라레를 와인의 종류에 대한 표기 중 하나로 인정하고 있는 영국 정부는 옅은 붉은 와인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는 표현으로 등록된 ‘전통적인 와인 용어’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럽의 중심이었던 영국과 프랑스 지도층의 이러한 유행은 당시 막 발견되기 시작한 신대륙에도 전해집니다. 서인도 제도와 카리브해 지역에서 활동하던 스페인 무역상들이 레드 와인이나 포트 와인으로 생거리(Sangaree)라 불리는 음료를 제조해 마시면서 입니다.
하지만 꼭 레드 와인으로만 만들어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화이트 와인은 물론 스파클링 와인으로도 상그리아를 만듭니다. 만드는 방식과 스타일은 대체로 동일합니다. 냉장 와인, 오렌지 주스, 설탕, 과일이 반드시 들어가는 편입니다.
한 가지 과거와 상반된 중요한 점은, ‘좋은 와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 입니다. 과거 맛 없는 저품질 와인을 조금이라도 맛있게 즐기기 위해 만들었던 것과는 비교되는 부분이죠.
사람마다 좋은 와인의 정의가 다르겠지만, 복합미가 뛰어나고 숙성 잠재력이 뛰어난 강건한 와인을 접할 때 대부분 좋은 와인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상그리아를 만들 때 좋은 와인의 정의는 프루티(fruity·과실미가 풍부한) 와인에 가깝습니다.
바로 이게 스페인의 상그리아가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스페인 와인의 대표를 꼽으라면 반드시 거론되는 리오하(Rioja) 지역의 템프라뇨(Tempranillo) 품종이 이런 조건에 꼭 맞는 포도기 때문입니다. 과실미가 좋으면서도 무겁지 않고 경쾌한 품종입니다.
상그리아는 1964년 뉴욕 세계박람회에서 스페인관을 찾은 미국인들에게 웰컴 드링크로 제공되면서 가장 큰 와인 시장 중 하나인 미국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60여년이 지난 지금은 전세계의 와인 애호가들이 덥고 습할 때 떠올리는 음료가 됐고요.
다만 주의해야할 점은 상그리아에는 제법 많은 설탕이 들어간다는 점입니다. 맛있다고 덮어놓고 홀짝거리다가는 와인보다 훨씬 높은 잔당(와인 발효 프로세스가 완료된 후에도 남아있는 설탕분) 때문에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으니 경계해야 합니다.
만드는 법은 아주 단순합니다. 컵에 얼음을 넣고 스프라이트나 세븐업 같은 사이다나 탄산수와 저렴하지만 과실미가 좋은 레드 와인을 1대 1로 넣어 섞은 후 레몬이나 오렌지 한 조각을 넣어서 제공하는 겁니다.
탄산수 대신 우리의 데미소다 같은 레몬 또는 오렌지 음료를 섞는 등 변형도 쉬운 편인데, 저렴한 와인에 오렌지맛이나 파인애플맛 환타와 섞어도 편하고 기분좋게 마실만한 틴토 데 베라노가 만들어집니다.
어디서 받아왔는지 모를 집에 굴러다니는 저렴이 와인을 활용해 간단하게 여름 한철 즐길 와인 음료를 만드는 데 제격인 셈입니다. 어렵고 복잡하게만 느껴졌던 와인, 올여름엔 상그리아와 틴토 데 베라노로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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